여문
유선우는 사방이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떴다.
여전히 살풍경한 장소다. 다른 관리자들은 다들 큰집 짓고 호화롭게 살던데. 엔라의 취향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음….”
아브나바가 꼼지락거리며 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어울리지도 않게 태도가 조심스럽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유선우는 그녀가 떠받쳐온 신계의 일원을 죽였으니까. 원망이라기보다
는 경외와도 같은 감정이다.
“어색하게 왜 그래? 의자나 꺼내줘.”
“아, 응.”
그것을 이해했기에 유선우는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브나바는 배려를 눈치채고 속을 쓸어내렸다. 그
녀가 손가락을 튕겨 의자를 꺼내줬다.
둘이 서로 마주 앉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마음을 추스른 아브나바가 본론을 꺼냈다.
“결정했어?”
“했지. 한 달하고도 조금 더 걸렸네.”
유선우는 돌아온 뒤로 보내온 한 달을 회상했다.
바쁘게도 지내왔다. 귀환하자마자 몬스터와 조우했고 서울의 테러리스트를 소탕했다.
미국까지 가면서 관리자를 죽여왔으며, 결국에는 신까지 죽였다.
모든 게 앞으로의 일을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갈 생각은 아니고. 일단 방법부터 듣고 싶은데.”
“음… 우선 명계는 일반적인 차원이랑은 달라.”
“잡지식은 됐어.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억지로는 못 뚫고, 허가를 받아야 돼. 근데 네가 할 건 딱히 없어.”
아브나바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자부심이 가득한 모습이다.
“내가 어떤 분한테 부탁해뒀거든. 관리자 사회도 인맥이 전부야.”
“지금 뭐라는 거야. 내 얘기 까발리고 다녔다고?”
“당연히 네 얘기는 안 했지. 그런데 이미 다 알고 계시더라.”
“…그래?”
유선우가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굴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할 듯했다. 아군
으로 삼으면 좋겠지만, 어긋난다면 죽일 필요가 있다.
“하여튼 그분 찾아가서 문 열어달라고 하면 끝이야. 게이트 넘는 것처럼.”
“관리자한테 그런 권한도 다 있어?”
“보통은 없지. 원래는 명계로 넘어가려면 절차가 좀 필요한데, 위쪽 극소수는 자기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신계로는 못 가지만.”
“그럼 엔라보다 윗선이라는 거네. 어째 수상한데.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끼어들어?”
“그건 직접 얘기해 봐.”
그렇게 말한 아브나바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그러자 눈앞에 2m 높이의 문이 나타났다. 기분 나
쁘게 생긴 게이트와는 다르게 겉모습이 평범했다.
“뭐야. 들어가라고?”
“너랑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그냥 이쪽으로 오라 그래.”
“못할 것도 없지만… 위험 부담이 좀 있지. 관리자가 돌아다니면 기록이 남거든.”
유선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일 가능성도 있으나 필요한 모험이다. 만일 함정
일지라도 전부 족치면 될 뿐이다.
“내가 갈게.”
- 조심해. 이상한 데로 팔려갈지도 몰라.
“통수 칠 거였으면 진작 그랬겠지.”
“그럼요. 선배랑 선우랑 같나요?”
- 얄미운 년….
유선우는 티격태격하는 둘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그는 약간의 긴장감을 안은 채 발을 내디뎠다.
***
뭉클.
문을 넘어가자마자 푹신한 감각이 발에서 느껴졌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흰색의 솜사탕 같은 것이 잔뜩 깔
려 있었다.
한편으로 주변은 한없이 푸르렀다. ‘하늘 위는 이렇지 않을까’ 하는 아이들의 상상을 구현해낸 듯한 장소
였다.
‘진짜 너만 이상한 거 같다. 인테리어 좀 하고 살아.’
-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브나바 집이 더 이상해.
‘끼리끼리 노네.’
유선우는 엔라와 잡담을 나누며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의 시선이 먼발치에 꽂혔다. 그곳에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걸어오는 노인이 보였다.
- 소개해준다는 게 저 할배였구나. 지팡이 저거 컨셉이야.
‘누군지 알아?’
- 응. 나랑 좀 친해.
‘착각이겠지. 너랑 친한 사람이 나 빼고 어딨어.’
- 뭐, 뭐?
떠드는 사이에 노인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체구가 생각보다 커다랬다.
허리가 굽었는데도 유선우와 눈높이가 비슷한 정도였다. 노인이 눈을 맞추면서 감정이 희미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네. 여문이라고 함세.”
“…유선우입니다. 절 보자고 하셨다고요.”
유선우는 말을 받으며 여문을 살펴봤다. 체격만 듬직할 뿐이지, 주름살은 깊고 머리카락에 윤기가 없다.
있는 척하며 꼴값 떠는 여타 관리자들과는 딴판인 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노인, 딱 그 짝이었
다.
“생각보다 예의 바르군. 만나자마자 주먹부터 들이댈 줄 알았는데.”
“도와주신다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유선우는 공손한 태도로 여문을 대했다. 그는 본래부터 개념을 밥 말아 처먹은 상놈은 아니었다. 예의를
지켜야 할 상대를 그다지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여문이 그것도 그런가, 하며 흘흘 웃었다. 그가 복잡한 눈빛으로 유선우를 지그시 쳐다봤다.
“엔라, 너도 오랜만이구나.”
- 그러게. 이렇게 볼 줄은 몰랐네.
“자네 말투가 원래 그랬었나?”
- 이게 편해. 댁도 그 지팡이 갖다 버리지 그래?
“못 보던 새 싸가지가 없어졌군.”
여문은 혀를 차면서도 화를 내진 않았다. 그는 엔라의 상급자였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위치였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감세. 자네가 말했다시피 난 자네를 도울 생각이네.”
“왭니까? 아브나바 때문은 아니시겠고.”
여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득한 후배 부탁이라고 들어주기엔 너무 큰 일이지. 자네가 하려는 건 반역이니까.”
“그건 엔라랑 아브나바죠. 덤으로 당신까지.”
“그럼 자네는?”
“전 애초부터 신계랑 붙어먹었던 적 없어요. 그냥 맞은 만큼 돌려주려는 거죠. 저희 스승님 몫까지 쳐서.”
“백명 말인가. 괴물 같은 자였지.”
여문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유선우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저를 잘 아시나 봅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대화에 막힘이 없다. 유선우의 목적. 그리고 그가 백명의 제자라는 사실
까지. 여문은 현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경계하지 말게. 조금 들은 게 있을 뿐이니.”
“누구한테?”
“한주라는 친구인데, 기억나는가?”
“한주 씨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유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주의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
지 못했다.
“친해진 지는 제법 오래되었지.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마는.”
“그게 무슨…….”
“넷상 인맥이라는 말일세.”
여문의 말이 지구의 언어에 맞추어 적당하게 번역되었다. 유선우는 어이없어하다가도 금세 납득했다.
‘그 사람 히키코모리였지.’
말랑에게 들은 정보다. 일은 안 하고 처박혀서 게임만 한다던가. 알고 보니 친목질도 하는 모양이었다.
- 근데 걔가 술술 말해줬다고? 이상한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흠.”
여문이 태연한 낯으로 설명을 이었다.
“그 친구에게 반항심을 심어준 게 바로 나라네.”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일세.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새장의 밖을 알아야 안이 답답하다는 것도 알지 않겠는가. 낙원
바깥의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려주니 굉장히 부러워하더군.”
“……허.”
톱니바퀴로 살아가던 한주를 일부러 자극했다는 뜻이다. 오로지 신계에 적대감을 안겨주기 위해서. 목적
은 몰라도 여문이 못돼먹은 새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유선우는 여문의 인성은 관심도 없었다.
그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딱 그것만 알고 싶었다.
“이유가 뭔데요?”
“반역의 초석을 쌓기 위함이었지. 정확히는 자네 스승에게 연줄을 대고자 했네. 한주가 조심한답시고 백
명에게도 입을 열지 않을 줄은 몰랐네만.”
- 낙원에다 인맥 만들어서 뭐하겠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 백명 외에는 아무런 수가 떠오르질 않았어.”
여문이 쓴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열망이 담겼다.
“그리고 이렇게 자네가 찾아온 걸세. 내 생각이 마냥 틀리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여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유선우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한주에게 역심이 없었더라면 낙원에서 돌
아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유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린 뒤에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신계를 왜 적대하십니까? 높으신 양반이라 들었는데.”
“이유라. 그럼 반대로 자네에게 묻지.”
돌연 여문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지팡이를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찬탈자들을 따를 이유가 있는가.”
기세가 자못 사납다. 유선우는 쏘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저기, 죄송한데. 자기만 아는 얘기 하면서 화내지 마시죠.”
갑자기 혼자 진지 빨고 있으니 어울려주기가 힘들다.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선 아무래도 반응이 곤란했
다.
그의 말에 여문이 멋쩍게 헛기침했다.
“…크흠. 실례했군. 사죄함세.”
“그 정도까진 아니고요. 그래서 그게 뭔 소린데요?”
“앉아서 얘기하지. 제법 길어질 테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의자가 만들어졌다. 유선우는 앉기에 앞서 잠깐 고민했다.
‘솔직히 그렇게까진 안 궁금한데.’
마음 같아선 40자 내로 요약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문은 입이 근질근질해 보였다. 찬물 끼얹
으면 삐질지도 몰랐다.
유선우는 내심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부터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다.
여문은 까마득한 옛날얘기로 서두를 꺼냈다.
“본래 신계는 지금처럼 무뢰배 소굴이 아니었다네. 어진 신들께서 의회를 통해 모든 차원을 보살피셨었
지.”
- 난 처음 듣는데?
“자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니 말일세. 그때는 관리자와의 교류도 잦았었을뿐더러 초월자와의 관계
도 양호했었네.”
“좀 상상이 안 가네요.”
현재 상황이 막장이라는 게 새삼 와닿았다.
신계에서 차원을 두루 살피기는커녕 망쳐놓질 않나. 관리자를 도구처럼 굴리는 한편으론 초월자를 낙원
에 처박아버리질 않나.
인간 하나 잡겠다고 직접 강림까지 하고 자빠졌으니 말 다 했다.
“내 때는 그랬었지. 하지만-”
“대충 알겠어요. 몇몇 신들이 그 의회인가 뭔가에 반항하고 초월자들 뒤통수쳤겠네요.”
“으, 음?”
“우리 스승님이 가만히 계셨을 리가 없으니 결국 싸웠을 테고. 신계에선 파벌이 갈라졌겠네요. 주모자들
이 척화파, 의회가 주화파. 맞죠?”
두 파벌이 대립하는 와중에도 초월자들은 멈추지 않았을 터. 신들이 하나하나 죽어가자 척화파가 득세했
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주모자들이 원했던 대로 의회는 물갈이. 힘이 빠진 초월자도 낙원에 전부 가두면서 태평천
하가 찾아온 것이다.
“뻔하다, 뻔해. 진짜 사람 사는 데랑 똑같네.”
여문의 분노도 원인이 보였다. 그를 만들어낸 신이 기존 의회의 구성원이었으리라.
그 신과 여문의 관계가 좋았다면 복수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역사 강의는 이쯤이면 됐습니다.”
“끄응……. 무안해지는군.”
여문이 멋쩍은 듯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내 얘기가 자네에게 신뢰를 줬다면 다행일세.”
“아직 약간 모자라네요. 딱 하나만 더.”
“조금 전에 마지막이라 하지 않았는가?”
“기억 안 납니다.”
뻔뻔한 태도에 웃음소리가 흘렀다.
“신계의 방침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개입을 꺼리나 싶었는데, 막무가내 짓도 하고. 일관성이 없던데
요.”
“흠.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마는. 아마 시스템의 제약이 있다고 알고 있네.”
“시스템도 자기들이 만든 거 아닌가요?”
“아닐세. 이전 의회에서 만들었지. 그분들께선 누군가가 물질계를 제 맘대로 휘두르는 것을 우려하신 게
야.”
“지금처럼요.”
“그리고 자네가 말한 막무가내 짓은… 자네를 보니 알겠군.”
여문은 유선우가 신격을 흡수했음을 알아봤다. 그가 흡족하다는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그만큼 대가를 지불했을 걸세. 한동안은 손가락밖에 빨지 못하겠지.”
“시간이 생겼다는 말이시군요.”
“그래.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자네 몫이고.”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가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번에 찾아뵙죠.”
대화는 끝났다.
여문과 목표가 일치함을 알았고, 의문도 여럿 해소되었다. 수확으로는 썩 만족스러웠다.
“감사 한마디도 안 하는가. 괜히 어울려줬군.”
“고마워해야 할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퉁 칩시다.”
“그것도 그렇지.”
짤막한 인사 후에 유선우가 등을 돌렸다. 그는 문으로 걸어가던 중에 발을 우뚝 멈췄다.
한 가지 부탁할 게 떠올랐다.
“아, 그 전에. 한주 씨 아직 안 잘렸나요?”
“음? 현재는 강등됐다고만 들었네. 위태위태하게나마 버티고 있다지 아마.”
“다행이네요. 그럼 그 사람 통해서 저희 스승님한테 전해주세요.”
유선우가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곧 뵈러 가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