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왔어?
화아아악!
유선우가 창을 상상하자 손안에 빛무리가 휘감겼다. 그는 생성된 새하얀 창을 붙잡고는 지오반을 살펴봤
다.
‘투신이라.’
아무래도 신계에서 친히 내려온 모양이다. 개입을 꺼린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의 강경수단을 꺼낼 줄이
야. 신계의 방침도 슬슬 막장이 되어가는 듯했다.
‘근데 혼자네.’
유선우는 감각을 곤두세워 주위를 탐색했다. 느껴지는 존재감은 지오반 외엔 하나뿐. 그마저도 상당히
미약하다. 아마도 이곳의 관리자일 터.
즉 지오반은 홀로 내려왔다는 의미다.
판단을 끝마친 유선우가 입가를 이죽거렸다. 그가 허공으로 도약하며 지오반에게 쇄도했다.
“내려와. 새끼야.”
콰아아아!
유선우의 창에 담긴 힘이 일순간에 부풀어 올랐다. 천지를 얼리는 한기가 뿜어지며 창이 휘둘러진다.
창끝이 공간을 갈라 길쭉한 틈새가 생겨났다. 그 안에 서리가 맺히고 주위로 얼음이 퍼져간다.
쩌억!
⼀拳얼어붙은 밤하늘 속에서 지오반의 일권( )이 쏘아졌다. 허공을 뒤덮고 있던 한기가 걷어지며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얼음이 무수한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유선우의 창날이 번쩍거리자, 조각들도 빛을 뿜어내며 길게 자라
났다. 수만의 창으로 변한 파편들이 지오반에게 쏘아졌다.
쿠웅!
지오반이 발을 구르자 밤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압력이 얼음을 으스러뜨리며 하늘의 은하수마저 잠재웠
다.
몸을 짓누르는 거력에 유선우가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분하다는 감정은 없었다.
반대로 입꼬리가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그가 창을 부서지라 붙잡으며 광소를 터뜨렸다.
피가 끓어오른다. 매번 억지로 꺼트렸던 투쟁심의 불씨가 격렬하게 타오른다. 지오반은 유선우에게 실망
만 안겨주던 관리자들과는 달랐다.
유선우는 모든 잡념을 떨쳐냈다. 신계에 대한 의문과 여태까지 그를 괴롭히던 초조함. 그따위의 생각들
을 모조리 집어던지고 지금에 집중했다.
“…불쾌하군. 짐승 같은 놈.”
유선우를 쳐다보던 지오반이 낯을 구긴 채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인간이 눈에 거
슬렸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마냥 만용이 아니라는 사실. 지오반은 찰나의 공방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인
간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음을.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는 신계의 의회에서 내린 결정에 마지못해 내려온 존재였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는 경
계심을 굳혔다.
사아아아-
지오반의 몸에서 희뿌연 안개가 흘러나왔다. 삽시간에 퍼져나간 안개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유선우는
재빨리 호신강기를 둘러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호신강기가 녹거나 찢어지기는커녕 미약한 충격조차 없었다.
‘뭐지?’
유선우가 의아함에 눈매를 좁힐 때였다.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하늘이 열렸다. 밤이 걷힘과 동시에 수천 갈래의 뇌전이 내리꽂힌다.
유선우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로 창을 휘둘렀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모든 벼락을 갈라냈다. 그러자 지금
을 노렸다는 듯이 안개 속에서 지오반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유선우는 창을 회수하지 않고 창대를 풍차처럼 돌렸다. 타격이 명중했음에도 지오반의 팔은 뭉개지지 않
았다.
대신에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마찬가지로 유선우가 잘라낸 번개들도 어느새 연기가 되어 있었다.
두 번의 눈속임. 그다음에야 은밀한 일격이 내뻗어졌다. 손바닥이 유선우의 호신강기를 찢어발기고 옆구
리를 스쳐 지나갔다.
“읍…!”
육체적인 통증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 존재가 흔들리는 감각이 머리를 뒤흔든다. 유선우는 이를 악물어
참아내며 지오반의 팔을 붙잡았다.
“내 차례다. 인마.”
유선우가 격을 온전하게 드러냈다. 그의 어깨 위에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공간을 난도질하며 숨통을 조인다. 지오반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가 붙
잡힌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는 크게 거리를 벌렸다.
“허억, 허억!”
지오반은 흔들리는 눈으로 유선우를 응시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초월자의 반열에
이르렀다고 하나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개미처럼 찍어누를 수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공포에 떠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네놈이 감히…!”
두려움과 더불어 굴욕감이 치밀어 올랐다. 지오반은 오만하게 뒷짐을 지고 자신을 짓밟았던 한 초월자를
떠올렸다.
수만 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는 그 날의 일.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를 분노케 했다.
쿵, 쿵!
지오반이 발을 떼어낼 때마다 공간이 우그러졌다. 안개를 뿌리며 다섯 걸음을 떼어낸 순간.
그는 목덜미에서 서늘한 감촉이 느껴져 고개를 확 꺾었다.
“크윽!”
어느새 날아온 창이 지오반의 목을 스쳐갔다. 가까스로 회피한 그가 눈알만 굴려 앞을 바라봤다.
神槍 ⿁槍그곳에는 악귀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단신으로 악마들을 도륙하던, 신창( )이자 귀창( )의 모
습.
지오반은 투신의 이름이 무색하게도 공포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저 인정하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쓸 따름
이었다.
“날 그렇게 보지 마라! 무릎을 꿇어라, 머리를 조아려라! 미천한 인간이 누구에게 이빨을 들이미느냐!”
천지를 깔아뭉개는 압력이 끝도 없이 강해진다. 광활한 평야가 붕괴하고 하늘과 지면의 경계가 모호해진
다.
지오반은 만 번의 환상 사이에 단 한 번의 권격을 섞었다. 유선우는 그것이 조잡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하
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훌륭했다. 그의 눈으로는 허상과 진상을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모든 환상과 실재가 창 한 자루에 잘려나갔다.
시도가 무산되자 지오반의 낯이 허망함으로 물들었다.
여태까지 환계를 간파해낸 이는 몇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른 이는 하나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똑같다.’
지오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구걸했던 상대. 그 기억 속의 괴물이 눈앞의 귀신과 겹쳐 보였다.
까마득한 옛적에 품었었던 감정이 엄습해왔다.
그것은 무력감이었다. 지오반은 악착같이 주먹을 휘두르며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그는 격렬한 동요 속에서도 틈 없는 권막을 펼쳐냈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신속의 권격이 시선을 사로잡
는 환상에 섞여든다.
유선우는 여전히 허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작 몇 분의 싸움으로 아직 닿지 못한 경지가 많음을 알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공간에 선연한 푸른색의 선이 그어졌다. 무수한 선이 번쩍이는 벼락과 밀어닥치는 파도를 갈라낸다.
청색의 빛이 하늘을 물들였다.
이윽고 빛이 잠잠해졌을 때.
관리자의 공간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하나의 정신계에 수많은 금이 갈라져 세상이 붕괴해갔다. 투명한 파편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사아아아-
정적이 찾아왔다. 무아지경으로 주먹을 뻗던 지오반은 자신의 몸을 내려봤다.
“……대체 뭐냐. 네놈은.”
지오반의 전신은 처참하게 난자되어 있었다. 바람구멍이 수십이었고, 베인 흔적은 셀 수도 없었다. 어느
샌가 사지도 잃어버린 채였다.
잘린 팔다리로 허공에 드잡이를 놓았던가. 지오반은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부끄러움도 이제는 필요 없는 감정임을 직감했다.
“허무하군.”
지오반은 다가오는 소멸에 저항하지 않았다. 비참하게 살아남았던 기억은 오랫동안 그의 정신을 좀먹어
왔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여간 꼴값은 다 떠네.”
지오반을 쳐다보던 유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비 없이 창을 휘둘러 패자의 목을 베어냈다.
콰아아아!
지오반이 완전한 죽음에 이르자 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빛무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유선우에게 흘러
들어왔다.
유선우는 눈을 감고 그릇이 차오르는 감각에 집중했다. 엔라를 담을 때도 여유롭던 그릇이 눈에 띄게 차
오른다.
하지만 아직도 공간은 많았다. 수십의 관리자를 흡수하고 신마저 죽였음에도 반의반조차 차지 않았다.
유선우는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며 사투의 여운을 즐겼다. 그는 수 분이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그땐 이미 빛이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져 있었다.
‘이제 갈까.’
유선우가 시시각각 무너지는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의 시선이 한 장소에서 멈췄다. 그곳에선 아
이의 모습을 한 관리자가 숨을 삼키고 있었다.
“히끅!”
관리자를 보며 유선우가 혀를 끌끌 찼다. 그가 찝찝한 기분으로 창을 꼬나쥐었다.
***
“선우 왜 저럴까요?”
“네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형님의 암컷이니.”
“아, 암컷이라니! 말조심해요!”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널찍한 거실에서 세 식객이 소곤거렸다. 그들은 서로 떠들면서도 유선우가 들어간 방을 물끄러미 쳐다봤
다. 방의 문은 들어오지 말라는 듯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한마디도 안 하는데 저라고 알 리가 있나요.”
걱정 어린 시선을 향하던 아이릴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유선우는 지구로 돌아온 뒤로 줄곧 입을 열지 않
았다. 얼굴도 수척해 보였기에 그녀로서는 염려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항상 말이 부족하신 감이 있긴 합니다.”
“으음… 복잡하군. 난 TV나 보겠다.”
“지금 TV가 문제예요? 이런 배은망덕한!”
“성녀님, 입 다물던가 소리라도 낮추십시오. 분위기 파악 안 됩니까?”
“뭐, 뭐라고요?”
“군대에서는 이러면 훅 갑니다. 알아서 조심합시다.”
거실에서 셋이 티격태격하는 한편.
유선우는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죽겠다. 어우.’
전투의 후유증이 생각보다 극심했다. 격의 사용으로 인한 정신력의 소진과 한 대 얻어맞은 충격. 그리고
지오반의 힘을 흡수하며 걸린 부담까지.
전부 더해지니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 골골대는 거 보니까 며칠은 쉬어야겠다.
‘뭐야. 아까까진 다물고 있더니 이제 떠드네.’
- 그, 음. 내 입장이 좀….
‘나도 알아. 그냥 말해봤어.’
엔라는 졸지에 반역자 낙인이 찍혀버린 관리자다. 오래간 신계를 떠받쳐온 그녀로서는 신과의 대면이 불
편할 수밖에 없었다.
지오반은 그녀를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지만.
- 그래서 어쩌려고? 쉬라고 해놓고 이런 말은 뭐한데. 이제 시간 없어.
앞으로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했다.
지오반의 죽음을 계기로 신계에서도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터. 신들이 단체로 내려오진 않겠으나 제한
시간이 대폭으로 줄어들었음은 분명했다.
‘직접 내려올 줄은 몰랐네. 제약이 있는 거 아니었나.’
여태까지 봐온 바로는 신계가 개입을 꺼림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무언가의 제약이 걸려 있다고 판단했었
다.
하지만 이번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면서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됐다.’
유선우는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냈다.
고민해봤자 답도 안 나온다.
현재 중요한 점은 지오반이 주고 간 성과다.
‘갈 때가 됐어.’
놈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확신을 얻어냈다.
유선우는 여태껏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기준은 항상 백명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자신의 무력이 이미 충분한 선에 도달해 있음을 깨달았다.
유선우는 미뤄뒀던 결심을 내렸다.
그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아브나바를 만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