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갔다
다음날부터 유선우는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했다. 미국 전역을 누비며 게이트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다.
“엇차.”
유선우는 맥 빠지는 기합과 함께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기존의 파티원도 그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소피아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낙하했다.
“선우.”
“네?”
“저는 왜 같이 온 거예요?”
소피아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동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수천의 몬스터를 30분 만에 청소한 일행들에 더해서 S급 헌터인 자신까지. 입이 떡 벌어지는 스쿼드. 즉
과잉병력이다.
“어라. 싫어요?”
“으음… 그렇게 물으면 오히려 좋은 쪽인데. 저도 쉰 만큼 할당량 받았으니까.”
소피아는 능력자 관리부에서 던전의 토벌을 지시받았다. 평소에 누리는 혜택에 대한 의무이니 거절할 수
도 없는 노릇.
귀찮음을 무릅쓰고 움직여야 했는데, 유선우가 동행을 제의해온 것이다.
“같이 뛰면 좋잖아요. 덜 지루하고.”
“하긴. 던전도 돌다 보면 질리기는 해요.”
“누나 덕분에 헬기도 빌렸고요.”
“솔직히 말해봐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에이, 무슨 소리예요. 그냥 덤이지. 누나 없었으면 공갈이라도 쳐서 빌려왔을걸요.”
“…오길 잘했네.”
소피아는 유선우가 능관부에서 깽판 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절로 입맛이 떫어지고 위장이 따가워지는
장면이었다.
“그럼 갑시다.”
유선우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태평하게 게이트로 걸어갔다. 아이릴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따라붙
었다.
“기분상으론 별론데 이번엔 이해할게요.”
“응?”
“저 여자 데려온 거 말이에요. 따로 움직였다가 저 여자 때문에 우리 몫이 줄어들면 안 되니까. 그렇죠?”
아이릴이 431-9 차원의 언어로 소곤거렸다. 유선우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슬슬 급하거든. 근데 그렇게 맘에 안 들어?”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어도 전 평범하게 순애가 좋아서요. 그때 괜히 살려줬어, 진짜.”
“일 대 일이라고 다 순애는 아니지. 네 다리여도 순애일 수 있는 거고.”
“개소리하지 마요.”
토라진 아이릴이 유선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바위처럼 단단한 감촉에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
다.
“가끔은 좀 말랑말랑했으면 좋겠는데. 만지는 맛이 없어.”
“네 가슴도 그래.”
“…뭐라고요?”
“너무 좋다고.”
무심코 막말을 뱉은 유선우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이릴은 그를 째려보다가 돌연 발을 멈췄다. 그러고는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
다.
“있잖아요. 왜 네 다리예요?”
“아, 맞다.”
생각해보면 아이릴은 차세정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인터넷도 안 하니 알 수 있을 리가. TV를 보기는 해도
옛날 스캔들을 방송사에서 자주 떠들 리도 없었다.
“그 세정인가 뭔가 하는 사람인가?”
“뭐야. 어떻게 알아?”
“핸드폰 소파에 막 던져놓고 다니잖아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에 아이릴이 투덜거렸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한숨을 폭 내쉬었다.
“돌아가면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약속 잡아줄래요?”
“물어보지 뭐. 근데 만나서 뭐하게?”
“기강! 기강을 잡아야겠어요.”
아이릴이 자칭 본처로서 의지를 불태웠다. 그녀를 보며 유선우는 둘의 만남을 상상해봤다.
‘의외로… 아니, 그냥 잘 맞겠네.’
아마도 차세정이 말로 잘 구슬리지 않을까. 아이릴은 아예 언니언니,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게 될지도. 그
모습을 떠올려보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친해지면 나도 좋지.’
밤낮으로 이득이다.
***
뉴욕 외곽에 출몰한 게이트. 그곳의 B급 던전에 입장한 유선우는 하품을 찍찍 뱉어내고 있었다.
“더럽게 재미없네.”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모래뿐. 변함없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졸음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두 번째부터 사막 지형… 오늘따라 재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맞는군. 저번에 그 폐허는 부술 맛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말이다.”
리디와 쉬발이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가 극도로 지루한 기색이었다.
게스트인 소피아를 제외하고서.
“저기, 그래도 너무 마음 놓는 건-”
캬아아아!
주의하려는 순간, 때마침 샌드웜이 모랫바닥을 뚫고 나타났다. 침을 뚝뚝 흘리는 흉측한 아가리가 선두
의 유선우를 노리고 덮쳐들었다.
하지만 유선우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에 바람이 부나 싶더니 샌드웜의 몸이 세로로 두 동강 났다.
쿠웅!
3m를 넘는 거구가 맥없이 쓰러졌다. 사체를 보던 소피아가 시선을 돌려 박아연을 쳐다봤다. 박아연은 자
신이 처리해놓고도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아, 아니에요.”
어색하게 웃자 박아연이 싱겁다는 양 옅게 미소지었다. 일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이동을 재개했
다.
소피아는 멍한 시선으로 그들의 등을 좇았다.
‘적응 안 돼.’
소피아는 그들의 실력을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녀도 B급 던전이야 간단하게 클리어할 수 있
다.
그러나 S급 헌터라고 방어력도 S급일까. 자칫하면 죽는 건 대부분의 헌터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고등
급의 헌터들도 저 나름의 마지노선을 지키는 편이다.
‘근데 이 사람들은… 모르겠어.’
놀면서도 몬스터가 나타나면 곧바로 반응한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내가 제일 뒤떨어지는 걸까.’
전투력이라면 비빌 구석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헌터로서의 종합 능력으로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
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재능충 금수저 소피아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패배감이었다.
“누나. 뭐해요?”
그때 유선우의 목소리가 상념을 일깨웠다. 소피아는 아무것도요, 하고 대답하고는 발을 움직였다. 애써
정신을 다잡은 그녀가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했다.
“선우. 심심하면 방송이나 할까요?”
“오. 그거 좋죠.”
유선우는 고민하는 낌새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 생각해보면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방송에 얼굴을 들이민
적이 없었다. 그가 해온 대외활동은 기자들에게 뱉은 막말과 인스타뿐이었다.
“잠깐만요.”
허락이 떨어지자 소피아가 부랴부랴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선우는 그녀를 보던 시선을 쉬발에게 옮겼다.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쉬발. 너 폴리모프 좀 해라.”
“이미 했습니다만.”
“아니, 용으로 다시 하라고.”
“해제하라는 말씀입니까?”
쉬발의 물음에 유선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음… 네 딸 어릴 때 기억나? 해츨링 시절.”
“그야 기억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귀여웠는데. 하하.”
“그걸로 변해 봐.”
“……예?”
유선우가 히죽 웃었다.
“방송에는 마스코트도 있어야지.”
***
유선우의 방송 재개.
그 소식은 커뮤니티 사이트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켰다. 그의 방송에서 네티즌들이 놀란 요소는 한둘
이 아니었다.
- 윾선우 요즘 방송하더라
- 중계 방까지 10만 훌쩍 넘음 쌉머기업 ㄷㄷㄷ
- 딱 천 명만 떼주라... 하꼬 서럽게 ㅠㅠ
먼저 말도 안 되는 시청자 수. 합방으로 인해 소피아의 팬까지 전부 흡수한 숫자였다.
한 마디만 떠들어도 도네이션이 펑펑 터지니 닉네임을 읽을 새도 없었다.
다른 요소는 당연하게도 유선우 일행의 실력이었다. 그들은 두 자릿수가 넘도록 던전을 돌면서 생채기 한
번을 입지 않았다. 타임어택으로 찍어낸 최단 공략시간이 1분 37초이니 말 다 했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은 새까만 용이었다. 유선우가 데리고 다닌다던 거대한 용이 아니었다.
멋들어지진 않아도 미친 듯한 귀여움을 자랑하는 새끼용. 루루라는 이름의 해츨링이었다.
- 루루 사람으로 변신 같은 건 못 하나?
- 페도 쉐끼들 환장한다ㅋㅋ
- 아조씨랑... 라면땅 먹을까? 하아아아아아악!
- 진짜 콩밥 안 먹이냐; 개더러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몬스터를 기른다며 유선우를 까던 소수의 이들도 루루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귀여우면 뭐든지 용서되는 세상이었다.
안은 수백 살 처먹은 시커먼 아저씨였지마는.
“끄흑, 끄흐으윽!”
“야, 왜 그래.”
“쪽팔려 뒈지겠습니다…. 돌아가서 딸을 어떻게 봅니까!”
“다 컸잖아 걔. 이해해주겠지.”
유선우가 쉬발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자신 같았으면 절대로 이해 못 하겠지마는. 그에게는 하등 중
요치 않은 일이었다.
‘내 알 바 아니니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쉬발은 끅끅 눈물을 삼켰다.
듣다 듣다 어이가 없던 아이릴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눈총이 꽂힌 상대는 유선우가 아니라 쉬발이었다.
“아니, 그러게 누가 딸 이름 가져다가 쓰래요? 적당히 속이면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내가 지어준 이름을 내가 숨겨서야 쓰나!”
“지가 딸 망신 다 시키네.”
“딸이 불쌍합니다….”
실제 루루는 현재 인간으로 따지면 사춘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제 아비의 행각을 알게 되면 절연을 선언
할지도 몰랐다.
그 상황을 예측한 유선우는 영상을 전부 남겨두기로 했다. 훗날에 협박용으로 써먹기 위한 보험이었다.
‘요즘 쉬발이 맞는 데 익숙해진 것 같던데.’
과연 정신적인 채찍질도 견딜 수 있을지.
이후에 쉬발이 반항하는 순간이 기대되었다.
일행은 던전 공략 방송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이라기보단 출장이라던 유선우의 말이 딱 들어맞
았다.
***
한국 시각으로 5월 7일의 새벽이 되었다.
내일은 서울과 김포의 게이트 집단 발생이 예정된 날. 유선우 일행은 아침이 되면 귀국길에 오를 계획이
었다.
‘됐다.’
돌아갈 채비를 마친 유선우는 침대에 누웠다. 그는 이번 여행의 수확을 하나하나 세어봤다.
‘딱 열아홉.’
미국에서 죽인 관리자의 숫자였다.
유니언스퀘어의 다섯에서 열넷을 추가로 죽였다. 썩 괜찮은 수확이었음에도 유선우는 입맛이 썼다.
‘게이트가 죄다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지.’
다수의 게이트가 밀집된 구역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마도 능관부에서 처리했기 때문이리라. 일 처리가
너무 뛰어난 것도 두고 볼 일이었다.
- 집단 발생 시기에 맞았으면 좋았는데. 아깝네.
‘일본이나 중국이라도 들려야 하나.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
- 어쩌면 내년까지 문제없을 수도 있어. 근데 애초에 그쪽도 슬슬 사릴걸?
벌써 두 국가의 잡초를 뽑아냈다. 관리자들 사이에도 커넥션이 있으니 알아서들 조심할 터. 이제는 이만
큼의 수확은 얻기 힘들지도 몰랐다.
‘그러네. 어쩌냐.’
- 솔직히 내가 보기엔 이미 충분한 거 같은데. 네가 잡은 애들만 몇 명이야?
‘아직 확신이 안 서.’
확신을 품기에는 정보가 모자랐다. 명계의 정보야 엔라에게 들으면 되는 일이지만 신계에 대해서는 여전
히 오리무중이었다.
‘낙원을 열고 난 뒤엔 스승님한테 맡기면 되겠지만…….’
문제는 그 전이었다.
엔라의 말로는 신계에선 명계를 더러워한다던가. 이전에 그녀가 탈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상주하는 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리라 판단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아, 모르겠다.’
유선우가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끼익.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여성의 그림자가 방에 침입했다. 인영은 다시 문을 닫고는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
오기 시작했다.
유선우가 불청객, 소피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뭐해요?”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피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로 침대에 다가갔다.
“안 잤어요?”
“지금 자려고 했죠. 잤으면 뭘 당했을지 모르겠네.”
“다, 당하기는. 억지로는 안 해요.”
소피아가 짐짓 태연함을 가장해 말했다.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뭐를요?”
“이런 거.”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입을 맞춰온다. 소피아의 입술이 떼어졌을 때는 이미 당황한 기색이 지워져 있었
다. 태세변환 한번 빠른 여자다.
‘박아연 씨였으면 10분은 놀려먹었는데.’
상황은 똑같은데 둘의 성격은 꽤 달랐다. 소피아는 연상답게 행동하려는 티가 확실하게 난다고 할지. 유
선우는 처음엔 불편해했었으나 익숙해지니 매력으로 다가왔다.
“봐요. 억지 아니죠?”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옷차림이 좀….”
“어울려요?”
소피아의 옷차림은 검은색의 실크 가운이었다. 노출 부위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잠옷이 으레 그렇듯
이곳저곳이 헐렁했다.
“굉장히요.”
“다행이다. 평소에도 입는 건데.”
“그래요? 일부러 신경 써서 입은 줄 알았네.”
그 말에 소피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가 돌연 아련한 눈빛으로 유선우를 쳐다봤다.
“일부러 이러고 온 건 맞아요. 내 평소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
느릿한 손길로 볼을 매만진다. 유선우는 근질거림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몸을 맡겼다.
“선우가 여기 있는 동안 그런 컨셉으로 가려고 했는데, 맨날 바쁘게 구니까 이렇게 됐네. 보상해요.”
“어떻게요?”
“내 말 다 들어줘요. 아침까지만.”
“참나. 알았어요.”
“웬일이래. 자존심 세울 줄 알았는데.”
유선우가 쓰게 웃었다. 고집이 센 성격임은 자신도 아는 바였다.
“개똥철학인데… 이런 부분은 배려해주고 싶거든요. 제가 중요한 데서는 양보 안 하니까.”
“중요한 데가 어떤 건데요?”
“네 다리라던가. 일 있으면 일 우선한다던가.”
“알긴 알아서 다행이네요.”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내 소피아가 넌지시 운을 뗐다.
“있잖아요.”
“네?”
“전 솔직히 선우가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 혹시 욕하는 거예요?”
지금 상황에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유선우의 얼빠진 반응에 소피아가 쿡쿡 웃었다.
“그게 아니라 여러 가지 있잖아요. 던전 다 깨고 나면 자기들끼리만 무슨 짓 하다가 나온다던가, 미국까
지 와놓고 자기한텐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일만 한다던가.”
“두 번째 거는 얘기하지 않았었나. 저보고 선우회 세력 넓히려는 거냐고 그랬었잖아요.”
“제가 멋대로 생각했었던 거죠.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거든요.”
“지금은 있고요?”
소피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잖아요. 저한텐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럼?”
“그냥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또 없어질 건가요?”
그 말에 유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소피아의 손만 매만졌다.
“어디서 봤는데,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더라고요.”
“…그게 할 말이에요?”
소피아가 시선을 깔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니까 또 돌아오겠죠. 이번엔 연락할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흔들렸을 뿐. 입을 다문 소피아를 보며 유선우는 내심 한
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백명의 기대뿐만 아니라 더없이 진지해진 이성 관계. 갈수록 자신의 목숨에 무게가 더해지고 있었다. 가
족만 생각하며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때와는 달랐다.
‘그래서 확신이 필요한 거야.’
소피아에게 장담한 대로, 멀쩡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유선우에겐 그것이 없었다.
아직 한걸음이 부족했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나.’
- 겁은 무슨. 이제 어른 된 거지.
‘27살에?’
- 그 백배는 먹어놓고 애 같은 사람도 많아.
엔라의 말에 유선우는 마음 깊이 수긍했다.
‘지 얘기라 그런가. 되게 생생하네.’
- 나, 나 아니야!
하긴, 백배면 엔라치고는 스케일이 작다.
유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피아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