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153화 (153/179)

미국 갔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유선우는 외딴곳으로 이동했다. 몬스터들이 진군해온 방향을 거슬러 올라갔기에

시민도 없었다.

헌터 역시 유니언스퀘어에 남아 있는 상황.

즉 눈에 띌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되겠다.”

“오히려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이런 장면 들키면 골치 아프니까.”

아이릴의 물음에 유선우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게이트를 여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문제시될 소

지가 다분했다.

“근데 다섯이라.”

유선우가 불만족스럽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섯이란 이번에 찾아낸 관리자들의 머릿수였다.

아직 한둘이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나 상황은 이미 정리된 상태. 대리자가 눈에 띄질 않으니 추적을 이

어갈 방법이 없었다.

- 그 정도면 충분하지. 여기서만 한 번에 찾아낸 건데.

‘그건 그런데…….’

엔라의 말도 옳은 소리였다. 유니언스퀘어 일대를 정리했을 뿐인데 다섯. 수확으로는 차고 넘치는 수준

이었다.

‘잡은 대리자에 비해 너무 적다 싶어서. 좀 아쉽네.’

유선우 일행이 처리한 대리자는 총 18명이었다. 관리자보다도 3배가 넘어가는 인원수. 관리자 하나하나

가 다수의 장기말을 거느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째 뽑기라도 하는 기분이었지.’

3명 연속으로 같은 좌표가 나타났을 때는 절로 쌍욕이 나왔었다. 유선우는 그때의 감정을 되새기며 전의

를 불태웠다.

“아브나바. 열어줘.”

[316-8 차원으로 안내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대형의 게이트가 출현했다. 그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뒤처리를 끝마친 일행은 다시금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워싱턴의 능력자 관리부로 이동하는 데는 수 시간

이 소요되었다.

돌아왔을 때 소피아는 이미 기진맥진인 기색이었다. 그녀는 보고도 전부 남에게 떠맡기고 차에 탑승했

다.

“하아. 이제 집 가네요. 하루가 왜 이렇게 긴지.”

“집이 어디 쪽인데요?”

“바로 근처예요.”

가문에서 소유한 집 정도야 미국 전역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소피아의 거주지는 워싱턴이었다. 그녀나

딜런이나 능관부 소속이기에 가까운 장소가 편리했다.

“여기예요.”

차가 멈춘 곳은 한 벽돌 맨션의 앞이었다. 유선우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한 차례 훑어봤다.

3층짜리 건물 하나와 그 못지않게 높은 별채.

울타리가 쳐진 넓은 뒷마당과 자그마한 수영장.

그림으로 그린 듯한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이런 집은 맨날 부서지던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노려지는 건물이었다. 익숙함 때문인지 유선우의 가슴 속에선 파괴 욕구가 치밀

어 올랐다. 쉬발과 도긴개긴이었다.

“…이거 몇 평이에요?”

한편으로 박아연은 넋이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소피아가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아마 300평 정도일 거예요. 주변 경관이 별로인 것 빼고는 나름 살 만해요.”

“나름…….”

궁핍한 환경에서 자라온 박아연은 금수저를 언짢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소피아쯤 되니 불

쾌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뭐해요? 얼른 들어와요.”

소피아가 재촉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선우 일행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드러난 내부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나 같이 커다랗고 깔끔한 가구.

간이 영화관과 당구대 등 각종 오락 시설.

심지어 고급술을 비치해둔 분위기 있는 바까지.

없는 게 없다는 말이 그렇게도 잘 어울렸다.

“이야. 돈 쓸 줄 아시네.”

“선우 씨는 돈 벌어놓고 차 하나도 안 사는데 말이에요.”

“차는 됐고 집이나 새로 사야겠어요.”

유선우는 여태 자신이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단순히 서민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 개처럼 벌었으면 개처럼 써야지.’

- 언제부터 열심히 벌었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솔직히 너무 검소하게 살았다.’

가진 명성에 비하면 거의 성직자 수준의 절약 생활이었다. 그가 신분 상승의 의지를 다질 때였다.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초로의 여인이 거실로 나왔다.

“소피아?”

“어머니. 다녀왔어요.”

소피아가 여인에게 다가가 슬며시 포옹했다. 그녀의 모친, 그레이스는 소피아를 토닥이면서 면면들을 둘

러봤다.

이내 시선이 유선우의 얼굴에 딱 꽂혔다.

“어머.”

그레이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

유선우는 홍차를 마시면서 눈알을 굴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그레이스가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실

실거리는 웃음을 띤 채로.

‘이게 몇 분 째야?’

예비 장모와의 일대일 대면.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유선우로서는 당장 피하고 싶었으나 핑계를

대기도 힘들었다. 그레이스가 직접 요청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말 대신에 홍차만 비웠지마는.

유선우가 잔을 내려놓자 드디어 그레이스의 입이 열렸다.

“차는 입에 맞나요?”

“예, 예. 향이 좋네요.”

그레이스도 한국어가 능숙했다. 한국어를 특히 잘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를 두루두루 섭렵한 것일

터. 행동거지마저도 우아해 태생의 귀천이 눈에 선했다.

“고마워요. 요즘 취미랍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빈 잔에 차를 채워준다. 다음으론 또 입을 다물고 살갑게 웃기만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유

선우가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말을 해, 말을!’

- 네가 해야지. 새파랗게 어린 것이.

‘낙원 생활까지 합치면 나도 50대 후반이야. 비슷하겠네, 뭘.’

- 얼씨구. 이럴 때만?

‘아오…. 근데 뭐라고 불러야 돼?’

- 어머님 해, 어머님.

유선우는 작게 헛기침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는 엔라를 믿고 말문을 열었다.

“저, 어머님?”

“제가 왜 당신 어머님이죠?”

말하자마자 태클이 들어왔다.

엔라 이 새끼.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은 유선우가 낯을 딱딱하게 굳혔다.

“죄송합니다. 그럼 뭐라고….”

“질책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정말로 궁금해서.”

“예?”

“제가 왜 어머님인지 듣고 싶은데. 선우 씨 입으로 말이에요.”

어느새 그레이스의 미소가 눈에 띄게 진해졌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선우가 뺨을 움찔거렸다.

‘이 소리 하려고 조용히 있었던 거야?’

소피아가 딜런과 그다지 안 닮았다 싶었더니. 아무래도 모친의 유전자를 짙게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상

대의 성격을 파악한 유선우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제가 따님과 교제하고 있으니까요.”

결혼도 안 했을뿐더러 ‘어머님’이 장모에 한정되는 호칭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지금 같은 경우에는 본인

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편이 나았다.

“그건 소피아에게 들었어요. 매번 맞선도 거절하길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저한텐 행운이었네요.”

- 아아아아악! 오글거려!

유선우는 엔라의 불평을 애써 무시했다. 그도 창피하긴 매한가지였으나 앞으로의 이미지가 중요했다.

다행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레이스가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좋은 반응도 잠시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선우와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그런데 우리 사위가 이런저런 스캔들이 많던데요.”

올 것이 왔다. 제멋대로 바뀐 호칭은 둘째치고서 앞으로가 문제였다.

유선우가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현관 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더니 헐레벌떡 달려오는 한 사내가 보였다. 유

선우의 방문 소식을 듣고 일터를 벗어난 딜런이었다.

“허억, 허억!”

딜런은 고개를 홱홱 돌리다가 유선우를 쳐다봤다. 그가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헛기침하며 표정을 다잡았

다.

“오랜만일세.”

“오랜만입니다. 딜런 씨.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아니네, 아니야. 이렇게 찾아왔으니 고맙지. 그보다.”

딜런이 갑작스레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예의 없게 딜런 씨가 뭔가?”

“예?”

“아버님이라 부르게. 장인어른도 좋고.”

그렇게 말하곤 다가와 그레이스의 옆에 앉는다. 진중한 모습을 연기하는 딜런과, 끝없이 히죽거리는 그

레이스. 유선우는 둘의 시선을 받으면서 애꿎은 바지만 구겨댔다.

‘괜히 왔다.’

***

대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유선우는 둘에게 인사하고는 안내받은 침실로 들어갔다.

달칵.

문을 닫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방을 한 차례 훑어본 뒤에 침대에 몸을 뉘었다.

‘피곤해 죽겠네.’

침대가 고급이기 때문인지 혹은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눕자마자 노곤함이 몰려와 눈꺼풀

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유선우는 스마트폰을 켜 차세정의 메시지에 답장했다. 여자친구의 친가에서 다른 여자친구

와 연락한다니. 자신이지만 쓰레기 같았다.

- 그래도 잘 넘어가서 다행이네.

‘그러게. 얘기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딜런은 차세정과의 스캔들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장난기가 넘쳐 보이던 그레이스

도 딜런이 온 뒤에는 말을 삼갔다. 인자한 장모를 연기하기라도 하듯이.

‘근데 여기서 열흘만 있어도 코 꿰일 거 같다.’

별의별 화제가 다 나왔다. 손주는 몇 명이 좋다, 다음에는 가족에게 인사하러 한국을 방문하겠다. 당장은

결혼 생각이 없는 유선우로선 반응이 곤란했다.

- 어차피 그만큼 있지도 않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

한국 시각으로 5월 8일에는 귀국할 계획이었다.

9일에 게이트 집단 발생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

체류 기간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 열리려나?’

- 글쎄? 그때 봐야 알겠지.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한국의 다른 관리자들처럼 겁에 질려 숨거나.

미국에서의 활동이 알려져 부재중이라 판단하고 모습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아예 결사의 의지로 들이댈지도 몰랐다.

- 얼마나 더 잡으려고?

‘마음 같아선 되는대로 다 잡고 싶은데.’

- 아마 시간이 모자랄걸.

‘시간 많지 않나? 지구도 안정되고 있고,’

-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거야. 아브나바가 밀려나면 다시 전처럼 돌아가겠지.

아브나바가 언제까지 지구의 관리자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제한 시간은 그녀가 권한을 박탈

당할 때까지.

그 이후로는 관리자들도 침공을 재개할 것이다. 유선우 혼자서는 관리자를 죽일 방법이 없으니까.

‘그럼 걔가 잘리기 전에 가야 하나?’

- 그편이 나아. 아브나바가 자기 차원에서부터 게이트 열어주면 되겠지만… 불확실하니까.

그때부터는 아브나바도 침공하는 놈들처럼 억지로 게이트를 열어야 한다. 그마저도 새로이 임명될 지구

관리자가 막아내면 전부 물거품.

아브나바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유선우는 관리자를 찾아내서 죽이지도 못하고 게이트만 처리해야 하

는 신세가 될 터였다.

‘망할.’

유선우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생각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확신을 얻고 싶었다.

충분히 명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을.

명계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지만 아직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도를 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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