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갔다
유선우는 소피아를 따라서 미국으로 향했다.
이동에는 소피아의 개인 항공기를 이용했다.
“호오. 안은 이렇게 생겼군요.”
“저 신발 신고 들어와도 괜찮나요?”
“저는 이미 벗었습니다.”
탑승하자 아이릴들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번만큼은 현대인인 유선우와 박아연도 마찬가
지였다.
“진짜 금수저네.”
유선우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도 개인 항공기를 타본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집도 나름 잘 살았었는데.’
막상 비교해보니 소피아와는 클라스가 달랐다. 유선우가 어릴 적에 부려본 사치라고는 택시비를 아끼지
않았던 것 정도였다.
“뭘 그렇게 오버해요? 선우도 하나 사면 되죠. 돈도 많으면서.”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없어요.”
유선우는 부정하면서도 긴가민가했다. 그는 요즘 들어 자신의 계좌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부족함은
없고 특별히 쓸 곳도 없으니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거 가질래요?”
“그냥 주겠다고요?”
“네. 혼수품으로.”
소피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발언에 날카로운 시선이 쏠렸다.
“선우 씨. 설마….”
박아연은 반쯤 질린 기색이었다. 자신과 아이릴, 차세정에 이어 소피아까지.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여성
편력이었다.
“대단하네요.”
“아니, 음.”
유선우는 변명할 말이 없어 입만 달싹거렸다. 초장부터 고생길이 눈에 선했다.
***
항공기는 긴 비행을 끝마쳐 미국에 도착했다.
아이릴들의 입국 심사에도 별문제는 없었다.
여권은커녕 국적도 없지마는 신비로운 아티팩트가 여럿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밀입국쯤은 누워서 떡 먹
기였다.
“소피아!”
미국 땅을 밟자 뾰족한 목소리가 일행을 반겼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눈을 부라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유선우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소피아에
게 무어라 쏘아붙였다.
“What…… fuck…….”
유선우에게는 이따위로만 들려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431-9 차원 출신자들 역시 영어에는 귀가 어두웠
다. 아브나바가 패치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님. 이 인간은 뭐라 그러는 겁니까?”
“나도 몰라.”
“그냥 쌍욕 하네요. 생각이 있긴 하냐면서.”
박아연만이 낯선 여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번역을 속행했다.
“바빠 죽겠는데 한 달이나 처놀고 잘하는 짓이다, 네가 남자 쫓아다닐 동안 자기는 던전 열 번도 갔다 왔
다. 들어보니까 일 동료 같은데요?”
“이야. 영어 잘하시네.”
“특기 겸 취미였거든요.”
“취미로 영어….”
유선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었다.
둘의 잡담을 들었는지 여성의 시선이 유선우에게로 옮겨갔다. ‘이 새낀 뭐야’ 하는 짜증 가득한 눈빛이었
다.
이내 여성의 동공이 커지더니 조잘거리던 입이 다물렸다. 뒤늦게나마 유선우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험악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제야 소피아가 한숨을 내쉬고는 여성을 소개했다.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해요. 얘는 에밀리라고, 제 후배 같은 앤데… 입이 좀 험해요.”
“그래 보이네요. 헌터예요?”
“역시 모르는구나. 얘도 S급이에요. 승급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오, 어쩐지 한 가닥 하는 거 같더라니.”
유선우가 탄성을 흘리며 에밀리를 훑어봤다. 서 있는 자세부터가 썩 나쁘지 않다. 중심이 확실하게 잡혀
있다고 할지. 아마도 근접전투를 특기로 삼는 헌터인 듯했다.
“에밀리?”
유선우가 확인하듯 물으며 악수를 청했다.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붙잡아 위아래로 붕붕 휘둘
러댔다.
실례되는 행동임에도 유선우는 흐뭇하기만 했다. 에밀리의 표정에서 들뜬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났기 때
문이다.
“되게 좋아하시네. 제 팬인가 봐요.”
“전에 선우랑 저랑 싸웠었잖아요. 그때 보고 반했대요. 버릇없는 것 같으니.”
유선우가 피식거리면서 손을 놓았다. 에밀리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소피아를 쳐다봤다.
“근데 지금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집까지만 데려다주고요. 여기서 미아 되면 어쩔 거야.”
“음…….”
유선우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거기 어디야. 능력자 관리부 가는 거죠?”
“일단은요. 어쩌면 갔다가 게이트까지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거면 그냥 같이 갑시다.”
말로만 듣던 능력자 관리부.
일하러 온 김에 구경이나 한번 해보고 싶었다.
차는 붐비는 도로를 달려 능력자 관리부에 도착했다. 유선우는 차에서 내리고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와. 되게 크네.”
목이 뻐근해질 만큼 아득한 높이의 빌딩. 주변을 둘러싼 빌딩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숲 자체가
한 건물만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스승님. 저런 건 얼마나 합니까?”
“글쎄다….”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정신 나간 가격이리라는 것은 알겠다마는.
그때 멍하니 빌딩을 쳐다보던 쉬발이 중얼거렸다.
“브레스 한번 쏴보고 싶군.”
쉬발은 저 거대한 곡선형 빌딩에 브레스를 쏘는 자신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봤다. 상상만 해도 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 파괴 욕구에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뻐억!
“악!”
유선우가 쉬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가 정신병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쉬발과 눈을 맞췄다.
“정신 차려. 미친놈아.”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봤나 봅니다.”
빠른 사과에도 시선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쉬발에겐 서울에서 날뛰었던 실적이 있는 만큼 도통 믿기
가 힘들었다.
“선우. 안 오고 뭐 해요?”
“아니에요. 갑니다.”
유선우는 소피아의 부름에 대답하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박아연에게 촌놈들을 맡
겼다. 어째 동행했다가는 성가신 일이 벌어질 듯했다.
능관부의 내부로 들어가는 데는 몇몇 절차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신분 확인이었다. 유선우는 최근에 발급받은 헌터증 덕분에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영화에서처럼 금속 소지 여부를 검사받았고, 마지막으로는 GPS 기능이 달린 팔찌의 착용을 지
시받았다.
“뭐 이렇게 깐깐해.”
“저번에 말했었잖아요. 한국 헌터 협회가 너무 허술한 거라고. 요즘은 여러모로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요.”
확실히 헌터 협회와는 천지 차이였다. 유선우의 기억 속에서 협회의 방비는 경비원 몇몇이 전부였다.
“엄청 복잡하네요.”
건물로 들어가자 인파로 복작거리는 로비가 보였다. 로비를 거의 휴식공간처럼 사용하는 청일과는 색다
른 분위기다.
유명인인 소피아와 에밀리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일은 없었다. 힐끗힐끗 쳐다보긴 할지라도 어지간해선
저들의 할 일만 했다.
“다들 바빠 보이네요. 원래 이런 분위기예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낀 유선우가 말했다. 어딜 봐도 일에 치여 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출근길 러시아
워보다 한두 단계쯤 덜한 수준이다.
“기본적으론 그런데… 오늘따라 유달리 부산스럽네요. 무슨 일 있었나?”
“일이라.”
소피아의 대답에 유선우는 작은 기대감을 품었다. 헌터 기관에서 일이 생긴다면 무엇이겠는가. 필연적으
로 몬스터나 게이트에 관련된 사건일 터다. 일을 찾아 미국까지 날아온 그에게는 바람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꼭대기로요. 우리 보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소피아가 스마트폰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차에서 전화를 한다 싶더니 그새 연락을 넣어둔 모양이다.
‘어째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느낌이네.’
오자마자 능관부의 수장과 대면이라. 유선우는 급변하는 상황에 어색해하면서 인파를 헤쳤다.
하지만 긴장감은 없었다. 오히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로는 갈수록 차분해졌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요. 보통은 다들 위축되던데.”
“긴장할 사람은 언제나 제가 아니라 상대 쪽이죠.”
“와. 자신감 봐.”
당당한 발언이 맘에 들었던 것일까. 소피아가 곱게 눈웃음치고는 손을 엮어왔다. 안 그래도 엘리베이터
가 붐비고 있어 전신이 밀착되다시피 했다.
“그런 태도 좋아. 딱 취향이에요.”
“언제는 귀여운 맛 없다더니.”
“귀여운 모습은 다음에 따로 보고 싶은데.”
은근하게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유선우의 손등을 살살 긁는다. 노골적인 태도에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말하는 게 무슨 아저씨 같네요.”
“싫어하는 것처럼은 안 보이는데요?”
“상대가 상대니까요. 욕 빼곤 다 들어줄 만해요.”
“오늘 뭐야. 혀에 기름칠했나 봐요.”
두 남녀가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을 피웠다. 바로 옆에 있던 에밀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찮네.’
당연하게도 언어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디 감정이란 뉘앙스만으로도 전해지는 법이다.
‘한국인 애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에밀리는 세간에 뿌려진 유선우의 염문을 떠올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머릿속에서 바람과 양다리 등의 단
어가 뒤섞였다.
최상층으로 이동할수록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
파가 다 빠져나가고 난 뒤였다.
복도에 도착한 유선우는 다시 한번 보안 절차를 거쳤다. 귀찮을 정도로 단단한 방비였다.
상대가 세계적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는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이해는 하지만 하품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리디에 아이릴이면 충분할 텐데.’
만일 깽판을 친다면 그 둘로도 차고 넘칠 터다. 헌터의 수가 많으니 혼자서는 어렵겠지마는.
유선우는 무의식적으로 견적을 짜면서 소피아의 뒤를 따랐다.
***
“반갑습니다. 마일러 클락슨입니다.”
능관부의 수장, 마일러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다행히도 시작부터 통역사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마일러가 통역에 관련된 각성자를 준비해뒀기 때문이
다.
정신에 모종의 링크를 걸음으로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능력. 숙련자라면 서로의 생각마저 공유할 수 있
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는 실제 발언만 전해지도록 조절한다.
“유선우입니다.”
유선우는 손을 붙잡고는 상대의 모습을 훑어봤다. 한창 노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나이. 힘이 빠질 시기인
데도 눈에서는 진중함이 배어 나왔다.
가볍게 대하기가 힘든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할지. 431-9 차원에서 봤었던 군주들 사이에서도 중간은
갈 듯하다.
첫인상일 뿐이지만 유선우는 자신의 눈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본래는 일대일로 뵙고 싶었는데… 자리가 자리인지라 여의치가 않습니다.”
“그럼요. 이해합니다.”
유선우의 시선이 마일러의 후방을 훑었다. 그곳에는 네 명의 경호 인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세를
보아하니 넷 모두 상당한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소피아에게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처가에 인사차 방문하셨다고요.”
“…처가요?”
“하하. 딜런이 호들갑 떨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말에 유선우가 옆에 앉은 소피아를 흘겨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화사한 미소였다. 뻔뻔한 태도가
‘무슨 문제 있나요?’ 하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유선우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토를 달지는 않았다. 물고 늘어지면 괜스레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아예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고.
“겸사겸사죠. 저 때문에 소피아 씨가 한 달이나 놀고먹었으니까요. 그만큼 도와줘야겠다 싶어서.”
“그건 솔직히… 뼈가 아팠습니다.”
마일러가 소피아에게 질책하는 눈길을 보냈다. 이번에는 소피아도 변명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올라오면서 보니 전체적으로 급한 분위기던데요. 제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어디 바쁘지 않은 나라가 있을까요. 최근 들어 한국은 안정된 듯합니다만, 그만큼 다른 일로 분주할 테
고요.”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희 일이나 하라는 소리. 공손한 말투치곤 태도가 단호하다. 상대가 유선우가 아
니었다면 말투도 더욱 노골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아, 이런 대화 별로 안 좋아해요.”
“동감입니다. 공적인 만남은 대부분 뒷맛이 씁쓸하죠. 차라리 식사 자리에 초대할 걸 그랬습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전 한국 헌터로서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버리거나 취할 수는 없는 게 바로 자리입니다. 유선우 씨는 여전히 한국의 대표 격 헌터이시
죠. 명성에는 그만한 무게가 따르는 법입니다.”
“수식어 한 번 거창하네요. 근데 별로 무겁게 느껴지진 않아요. 국적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물론 유선우는 국적을 바꿀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생색내기를 막기 위해 루머 정도야 흘려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행동으
로 남이 으스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으음….”
유선우의 말에 마일러가 고심에 잠겼다. 한참이 지나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한국 헌터로 오신 게 아니라면, 제가 어떤 식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아까 마일러 씨가 말씀하신 대로요.”
마일러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유선우는 소피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처가에 인사차 왔다고요. 그러다가 좀 도와줄 수도 있는 거지.”
돕는 김에 관리자도 잡고, 영향력도 키우고.
심심하다고 빽빽대는 식객들도 달래주고.
겸사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