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150화 (150/179)

미국 갔다

유선우는 소피아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선글라스까지 지참했기에 밀회 느낌이 물씬 났

다. 밀회치고는 차량이 원체 고급스러워 눈에 띄었지마는.

“따라오겠다고요?”

“네. 괜찮죠?”

“그야 저는 좋은데…….”

유선우는 소피아의 귀국길에 동행하겠다는 얘기를 꺼냈다. 소피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유선우를 흘겨봤

다. 환영한다기보다는 의도를 의심하는 낌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오라 할 때는 맨날 무시하더니.”

“무시한 건 아니죠.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요.”

“잘 생각해봐서 가겠다고 하는 건데요?”

능청스러운 말에 소피아가 끙끙 신음을 흘렸다. 옳은 소리여도 도통 믿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유선우에겐 여행 외의 목적이 있었다.

“겸사겸사 일도 하고요.”

“거봐. 나 때문 아니네. 근데 무슨 일이요?”

“헌터가 하는 일이 다 똑같죠.”

“음… 게이트 들어가겠다고요?”

“네. 한국은 씨가 말라버려서.”

소피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한국에서 게이트가 열리지 않으니 타국으로 향하겠다. 그녀

도 말뜻이야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라는 의문이 들었다.

“선우, 요즘 이상한 거 알아요? 왜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

“저 원래부터 성실했는데요.”

“으음….”

소피아가 따가운 눈총을 쐈다. 이내 그녀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뭔지 알겠다. 세력 불리려는 거죠?”

“세력이요?”

“에이, 맞잖아요. 요즘 한국에서 장난 아니던데. 그 선우회인가 하는.”

“갑자기 그게 왜 나와요?”

유선우가 인상을 확 구겼다. 그는 남에게 선우회 얘기를 들을 때마다 몸이 근질거렸다.

“미국에서도 회원 늘리려는 거 아니에요? 포교 활동처럼.”

“던전 몇 개 깬다고 늘진 않겠죠.”

“글쎄요. 선우가 도와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아요.”

선우회의 활동은 타국에도 여러모로 알려져 있다. 연예인부터 기업인까지 각종 유명인사를 회원으로 두

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에는 유선우의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이 상당수 존재한다. 소피아와의 연줄로부터 비롯된,

나름대로 근거 있는 기대감이다. 유선우의 행동에 따라 그들마저 선우회로 넘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이비보다 더한 것 같은데.’

유선우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선우회의 저력에 기가 질렸다. 예전에 자주 나왔었던 일루미나티 같은 느낌

이라고 할지. 이대로 성장한다면 훗날에는 어떤 집단이 될지 두려울 지경이다.

‘빨리 고삐를 잡아야겠어.’

유선우가 심각한 낯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모습에 소피아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말머리를 돌렸다.

“오면 우리 집에서 지낼 거죠?”

“가능하면요. 호텔 잡기는 귀찮아서.”

“잘 됐다. 아버지도 선우 보고 싶다고 맨날 투덜거리셨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인사도 안 드렸는데.”

유선우는 소피아의 부친인 딜런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나지 못한 지는 오래됐어도 나름대로 뚜렷했다.

인터넷에서 수차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님한테도 몇 번 들었었지.’

청일의 재건에 큰 도움이 되어줬다던가. 주로 재정적인 면에서 지원을 받았다고 들었다. 간접적으로 유

선우가 빚을 진 셈이었다.

“저희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언제 갈래요?”

“저는 뭐. 요즘 한가해서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이번 주 안으로 잡아서 연락 줄게요.”

이후로 소피아는 줄곧 높은 텐션을 유지했다. 연인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간다는 게 기대됐다.

반면에 유선우는 뒤늦은 걱정에 골머리를 앓았다.

‘부모님께 인사….’

상상만 해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 인사 자체는 괜찮아도 자신의 복잡한 이성 관계가 문제였다.

양다리도 아니라 네 다리.

두말할 것도 없는 쓰레기다.

한술 더 떠서 상대는 금수저 집안의 금지옥엽인 실정. 절대로 좋은 소리 못 들을 터였다.

‘망했네.’

***

유선우는 차세정에게도 미국행의 소식을 전했다.

뜻밖이게도 욕을 먹지는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초리가 쏘아졌을 뿐. 개인적으로는 그쪽이 욕보다도 대

미지가 컸다.

더해서 다음에 차세정의 가족과도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상상만 해도 몸

이 부르르 떨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느낌이다.

‘여긴가.’

다음날, 유선우는 여주의 룸식 식당을 찾았다. 선우회의 수장인 민설아와의 약속이 있었다.

미국으로 향하기에 앞서 만남을 요청하자 민설아는 흔쾌하게 수락했다. 찾아온 식당은 그녀가 지정한 장

소였다.

‘다들 이런 데는 어떻게 찾는 건지.’

유선우는 호화로운 실내를 둘러보면서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그냥저냥 평범한 레스토랑일 줄 알았건만. 막상 와보니 가격대가 꽤 있어 보인다. 갑부인 소피아라면 모

를까 상대가 사이비 교주였었던지라 예상외였다.

유선우는 구석의 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드러난 장소에는 검은 생머리의 청초한 여성이 앉아 있었

다. 옷도 하늘하늘한 게 힘을 팍 줬다는 티가 났다.

“민설아 씨?”

“힉!”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던 민설아가 숨을 삼켰다. 그녀가 열린 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 누구시죠?”

“접니다.”

유선우가 문을 닫고는 아티팩트의 효과를 해제했다. 외모뿐만 아니라 체형까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

신비한 모습에 민설아가 입을 떡 벌렸다.

“역시 선우 님…….”

“뭐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릎 꿇고 앉은 민설아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옷이 기본적으로 흰색 바탕이라 그런지 성직자처럼 느

껴지는 감이 있다. 한창 파계승의 길을 걷는 중인 아이릴보다도 독실해 보였다.

“고개 들어요. 창피하니까.”

유선우는 떨떠름하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민설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몇 살이에요?”

“스, 스물다섯입니다.”

“맞다. 9년 전에 중3이었댔지.”

그렇다면 활동을 시작한 건 21살이라는 얘기다. 남들 대학 다닐 나이에 사이비 창설. 새삼 어이가 없었

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이런대.’

실제로 본 결과 민설아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오히려 평균 이상으로 예뻤다. 순종적인 인상이라고 할지.

주로 상상하는 전통적인 미인상이다.

“일단 말투부터 좀 바꿔줘요. 너무 딱딱하네.”

“그래도 선우 님께 어떻게….”

“그 님 하는 것도 빼시고요. 오글거려 죽겠다.”

유선우가 꺼림칙하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민설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그럼 오빠라 불러도 되나요? 사석에서만.”

“맘대로 해요.”

허가가 떨어지자 민설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애써 표정을 다잡은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는지.”

“원래부터 만나볼 생각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렇게 됐네요. 그, 선우회 활동 상황 좀 들을 수 있

을까요?”

“굉장히 순조로워요.”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민설아의 태도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영향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는데도 대부분 순수한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아, 순수하게.”

“근거 없는 비방에 반박한다거나, 오빠의 은혜를 세상에 알린다거나. 부족하게나마 수뇌부에서 강연도

진행하고 있고요.”

언론 조작. 그리고 세뇌 교육. 돈 얘기만 빠졌을 뿐이지 사이비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혹시 강제적으로 하는 건 아니겠죠? 막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아서 가입시키고.”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가끔 도를 넘는 사람이 몇 있긴 한데….”

민설아가 말을 흐리고는 생긋 웃었다.

“저희 쪽에서 직접 처리하고 있어요.”

“…아, 아. 네. 그러시구나.”

“다들 돈과는 상관없이 마음으로 하는 활동이니까 더 열성적으로 되는 것 같아요. 빠졌던 원년 멤버도 돌

아와 줬고요. 다시는 안 빠지겠다고 싹싹 빌기까지 하면서.”

“빌어요?”

유선우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묘하게 과한 감이 있다. 물론 본인의 실수를 뉘우치는 행동이

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어째 느낌이 싸하다고 할지.

“저기,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아니, 아니에요. 멤버들은 다 어디서 구했었던 거예요?”

“단톡방에서요. 오빠 방송 시청자들끼리 연결이 좀 있었거든요. 열 명 정도.”

“…그렇구나.”

유선우가 어색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자신의 시청자가 열 명이나 사이비가 되었단다.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이쯤 되면 내가 문제인 거 아닌가?’

우연이라 보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유선우는 물컵을 들이켜 떫은 입맛을 씻어냈다.

이후로는 대화가 순조롭게 흘러갔다.

상대가 시종일관 사근사근하니 유선우도 갈수록 좋은 인상을 품었다. 민설아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참

한 처자였다.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헤어질 때가 되자 민설아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다음에도 뵐 수 있을까요?”

“시간 날 때면 괜찮아요. 며칠 동안은 힘들겠고.”

“그럼 다음엔 편하게 불러주세요. 제가 더 어리잖아요.”

“지금부터 그러지 뭐.”

말을 놓자 민설아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녀가 치켜뜬 눈으로 유선우를 보며 말했다.

“저, 저기. 이름 한 번만 불러주실래요?”

부탁이 소녀소녀하다. 유선우는 싱겁다며 픽 웃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한 번 불러줬다.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

민설아는 유선우가 떠나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사했던 룸으로 들어가자 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

은 테이블이 보였다. 그녀가 종업원에게 미리 부탁해둔 덕이었다.

“컵, 젓가락, 휴지….”

민설아는 홀로 중얼거리며 유선우가 썼던 물품을 지퍼백에 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음침한 욕망으로 반

들거렸다.

전리품을 회수한 다음으론 화장실로 이동했다. 식당에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이유인즉슨 사장도 선우회의 일원이기 때문. 민설아가 괜히 이 식당을 고른 것이 아니었다.

탁!

민설아는 화장실의 구석 칸으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옷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그녀의 손에 길쭉한 기계

가 잡혔다. 오늘을 위해 구매한 고성능 녹음기다.

녹음기를 재생하자 유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설아의 얼굴이 황홀감으로 젖어 들었다.

“하아아…….”

민설아의 손이 자연스레 핸드백으로 향했다. 그녀가 꺼낸 물건은 휴지 뭉치. 유선우가 입을 닦았던 휴지

였다.

“스읍, 하아. 스읍!”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때로는 지상의 보배처럼 느껴지는 법. 민설아에겐 지금 쥔 휴지가 그러했다.

“오빠…… 흐흐, 으헤헤헤.”

음흉한 웃음소리는 30여 분간이나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