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들의 우상
‘어떻게 된 거야.’
청일 소속의 A급 헌터, 진승찬은 우두커니 서서 게이트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게이트가 있었던 장소
를. 유례없이 거대하던 게이트는 진작에 닫혀버렸다.
진승찬을 포함한 토벌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단환각에라도 빠진 듯했다. 하지만 길가의 몬스
터 사체가 모든 일이 현실이었음을 알려줬다.
“끄, 끝인 건가?”
“유선우는?”
“…글쎄.”
주변의 분위기는 갈수록 어두워졌다.
진승찬의 낯빛도 마찬가지로 거무죽죽했다.
그는 유선우를 동경해 청일에 들어온 헌터였다. 그 존경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피해 없이 몬
스터를 막아냈다며 들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10분이 지나도록 변화는 없었다.
헌터들이 하나하나 정신을 차리고는 철수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서 있던 진승찬에게도 한
여성이 다가갔다.
“그만 봐요. 저희도 돌아가야죠.”
“아니, 조금만 더요.”
“당신이 그런다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 알잖아요.”
그 말에 진승찬이 핏발 선 눈으로 여성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여성에게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진승찬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눈앞의 그녀, 이지현은 유선우의 오랜 팬이었다.
사인을 받았던 일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을 열성적으로 떠들던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둘은 애써 미련을 덮어두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섯 걸음을 떼어내기도 전,
“게, 게이트다!”
“빌어먹을. 막을 준비해!”
갑작스레 소란이 일었다. 진승찬이 다시 몸을 돌리자 소리 없이 나타난 게이트가 보였다. 그는 그게 무엇
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아아…!”
뜨거운 눈물이 아스팔트를 적셨다. 한 방울뿐이 아니었다. 이지현도 진승찬처럼 주저앉아 눈물을 죽죽
흘렸다.
이내 둘의 흐릿한 시야에 커다란 형체가 들어왔다. 형체는 귀환 게이트를 넘고 나타난 흑룡이었다. 용의
등 위에는 유선우를 위시한 셋이 올라타 있었다.
유선우가 말했다.
“이곳의 던전은 소멸됐습니다. 앞으로, 이 게이트가 열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유선우가 창대로 용을 두드리자 날개가 펄럭였다.
용을 타고 떠나가는 유선우를 보며 진승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 전과 같은 몸짓이었지만 의미는
달랐다.
유선우가 진정으로 헌터들의 우상이 된 날이었다.
***
神酒진귀한 보석으로 코팅된 글라스에서 투명한 액체가 출렁였다. 신계에서 주조하는 특등의 신주( )였
다.
“…….”
잔을 쥔 남성은 극상의 맛을 즐기면서도 들뜬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불쾌함만이 가득했다. 결국에 그는
내용물을 비우지도 않고 잔을 내려놨다.
“셀라트리스는 나름 마음에 들었는데. 미리 불러들일 걸 그랬어.”
“다시 만드시면 되는 일입니다.”
“그 정도까진 아니고. 데리고 놀 만큼은 됐다는 얘기다.”
남성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옆을 쳐다봤다. 신계의 정원에 꿇어앉은 여성이 보였다. 그가 여러 가지 용도
로 곁에 두고 있는 하녀였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어도 괜찮다고 했던가?”
“죄송합니다.”
“또 열었군.”
“…….”
하녀가 침묵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고분고분한 태도에 남자가 피식거렸다.
“대답해봐라. 이번이 몇 개째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놈한테 부서진 관리자가 몇이나 되냔 말이다.”
남자는 관리자를 철저하게 물건으로 대했다. 모든 신이 그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신들 사
이에서도 그는 극단적인 축에 속했다.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았습니다.”
“어째 죄다 쓸모가 없군.”
남자가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탁자에서 잔을 치웠다. 신주가 쏟아지자 하녀가 맨손으로 바닥을 닦기 시작
했다. 일련의 과정이 삐걱거림 없이 자연스러웠다.
꾸욱.
남자가 드러난 하녀의 등을 짓밟았다. 그가 지나가듯이 툭 내뱉었다.
“회의를 소집해라.”
“안건은 무엇입니까?”
“네가 알 필요가 있나?”
“……죄송합니다.”
하녀는 무표정한 그대로 청소를 속행했다. 남자가 싱겁다는 양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다. 이유가 없으면 모일 사람도 없겠지.”
안건이라. 그리 중얼거리면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인간. 슬슬 그놈을 죽여야겠다.”
***
- 앞으로... 이 게이트가 열릴 일은 없을 겁니다.
- 응 또 열려~
- ㅋㅋㅋㅋㅋㅋㅋ그럼 개쪽인데
- 근데 이번은 상황이 다르지
- ㅇㅇ 게이트 하나밖에 없었자너 봐야 알 듯
유선우의 선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반신반의했다. 마냥 근거 없는 불신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비슷
한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결과는 실패였다.
2년 전, 한국에선 집단 발생 시에 나타난 게이트에 진입해 던전을 셋이나 공략했었다. 하지만 다음 달이
되어도 게이트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으리라고, 자연스럽게 단념하는 대중들이 많았다.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5월 1일이 되자 그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통계가 원인이었다.
- 헌터 협회, 4월의 게이트 발생 횟수 발표… 이례적인 급감!
- ‘어째서 한국만?’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다.
- A급 헌터 이지현, 유선우와의 관련성을 제시하다! “잊지 못할 한 달”
극적인 변화였다. 게이트 발생 횟수 그래프에서 한국만이 하향 곡선을 그렸다. 3월과 비교해 70% 이상
급감한 수치였다.
그 까닭은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인정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갈릴 뿐이었다.
뜻밖이게도 후자의 비율은 적었다. 민설아가 창설한 ‘선우회’의 언론플레이 덕분이었다.
“진짜 대단하네요. 이 사람들도 다 그건가 봐요.”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를 훑어보던 박아연이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대부분이 유선우에게 호의적인 기사뿐. 가끔 적대적인 기사가 나올 때면 곧바로 수백 개의 악플이 달리곤
했다. 초짜의 눈으로도 어떠한 세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선우 씨가 마음먹으면 대통령도 되겠어요.”
“그런 걸 왜 해요. 생각만 해도 머리 빠지겠네.”
“3월 선거는 폭탄 돌리기 식이었다던데. 이번 대통령은 계 탔네요.”
“본인 나름이죠. 여기까지 했는데 망치면 뭐….”
자칫하면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될 터. 박아연은 자신을 대입해 상상해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절대
로 맡기 싫은 중역이다.
“근데 설아 씨는 만나봤어요?”
“아니요. 아직.”
“슬슬 만나봐야죠. 선우회가 너무 커져서 관리하기도 힘들 텐데.”
“뭐라고요? 잘 못 들었어요.”
유선우가 리플레이를 요청했다. 박아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반복했다.
“너무 커져서 힘들겠다고요.”
“다시 한번만요.”
“너무 커졌… 지금 성희롱하는 거예요?”
“에이, 성희롱은 무슨. 그냥 요즘 귀가 어두워서요.”
“참나.”
씨알도 안 먹힐 변명에 박아연이 실없이 웃었다. 둘의 대화를 엿듣던 아이릴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좋아? 둘이 뭐가 그렇게 신났대.”
“시, 신나기는요.”
“서럽다, 서러워! 아아아아아아!”
아이릴이 소파에서 뒹굴며 소리를 빽 질러댔다. 하는 짓만 보면 영락없이 초등학생이었다.
“시끄러워.”
“심심하다고요! 너, 커피 타와.”
그녀는 누운 채로 김한영에게 지시했다. 지목된 김한영은 토 달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익숙한 동작
으로 커피를 타와 유선우와 아이릴에게 건넸다.
“아줌마도 드릴까요?”
“끝까지 그렇게 부르네. 넌 왜 여기 있어?”
“수업 끝나면 종종 와요.”
구출된 인질들은 연령대별로 분류되어 공공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김한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창 시설에서 지내며 교육과 정신적인 상담을 받는 중이었다. 이른바 국가의 보살핌이다.
“여기로 온다고 하면 허가도 잘 떨어져서 좋아요.”
“허가도 필요해?”
“당연하죠. 말이 복지지 반은 격리 같은 거니까.”
담담한 대답에 박아연이 떨떠름히 입을 다물었다. 애늙은이 같은 태도가 외견과 도무지 맞물리지 않았
다. 그녀는 반응이 곤란해 말머리를 돌렸다.
“근데 선우 씨. 요즘 일 잘 안 나가네요.”
“갈 데가 있어야 가죠. 게이트가 안 열리는데 뭘 어떡해.”
부산에서의 일 이후로 한국에서 게이트를 여는 간 큰 놈은 대부분 사라졌다. 나타난다 해도 유선우의 행
동반경과는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예를 들어 제주도라던가.
거기까지는 가기도 귀찮았다.
“…그러고 보면 이대로 안 열려도 문제네. 헌터들 다 실직자 되는 거잖아요.”
박아연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문제점이었다.
“실직자는 안 될걸요. 몬스터가 없어지면 그만큼 범죄자가 늘 테니까. 그 뭐야. 빌런이랑 히어로? 그런 구
도가 되겠죠.”
“음… 뭔가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어떻게 되든 전보단 낫다는 거예요. 서울 재건에도 각성자는 유용하게 쓰일 거고.”
유선우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커피를 홀짝였다. 잔을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등에 무게가 가해졌
다. 아이릴이 소파에서 굴러떨어지며 와락 안겨들었다.
“선우. 제 말 무시하는 거예요? 심심하다고요. 미칠 거 같아!”
“낮잠 자. 리디랑 쉬발처럼.”
“그 둘은 그냥 쉬는 거잖아요.”
리디와 쉬발은 근래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고 있었다. 리디는 용의 눈물을 복용해가며 무리하게 전투했던
탓. 그리고 쉬발은 마법의 종주인 만큼 마력이 흐트러진 후유증이 큰 탓이다.
아이릴만이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선우는 안 심심해요? 같이 나가요.”
“난 약속 있는데?”
“또? 누구랑요.”
“소피아라고, 전에 네가 저주 풀어줬던 사람.”
아이릴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금세 떠올리고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 똥냄새녀요?”
“이젠 안 나. 하여튼 슬슬 미국으로 돌아간대서.”
“미국….”
흥미가 돋았는지 아이릴이 깊게 숨을 흘렸다. 그녀가 유선우의 어깨 위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러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유선우를 확 끌어안았다.
“선우, 선우.”
“응?”
“우리도 미국 가요.”
“갑자기 뭔 소리….”
유선우는 퇴짜를 놓으려다가 말을 흐렸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이릴과 눈을 맞췄다.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