魔境여러 던전 대신에 하나의 마경( )을 열었다는 뜻이다. 골똘히 생각하던 유선우도 동의했다.
‘맞겠다. 그러면 안 봐도 뻔하겠네.’
게이트 너머에서는 다수의 관리자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을 터였다. 유선우는 곧 펼쳐질 광경을 상상했
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투쟁심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아스팔트 위로 드리워졌다. 그림자가 선명해질수록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콰아아아!
용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브레스를 토해냈다. 검은 불길이 지면의 몬스터들을 재로 만들어 여유 공간을 만
들었다.
“저, 저 미친…….”
“쏘지 마라, 아군이다!”
“저게 어딜 봐서요?”
“넌 인터넷도 안 하냐?”
헌터들은 차마 다가가지도 못하고 입만 움직였다. 이내 지면에 착지한 용이 인파를 쳐다봤다. 파충류의
눈빛이 쏘아지자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정적이 잠시간 이어진 뒤에야 시선이 거둬졌다. 마치 인간들을 조소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어, 어땠나? 임팩트 좋았나?”
“말만 안 했으면 굉장히요. 저 사람들 귀 좋으니까 조심해요.”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쉬발이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박아연은 대답 대신에 떨떠름한 표정만 지었다.
그녀는 쉬발의 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리디와 아이릴도 내려가 유선우에게 따라붙었다.
“이거 좀 심하지 않았어요?”
“쉬발이요? 어차피 유명하잖아요. 공식으로 데뷔했다 치면 되죠.”
“저는요? 저도 변장하고 다니는 거 싫은데.”
“넌 네가 한 짓이 있어서 안 돼.”
“으으…….”
아이릴의 불만 어린 모습에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그는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
했다.
“잡담은 됐으니까 가자.”
“형님. 저도 이대로 가도 괜찮습니까?”
“맘대로 해.”
게이트가 워낙에 거대해 쉬발의 본체도 여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다. 허가가 떨어지자 쉬발이 희희낙락하
며 유선우의 뒤를 따랐다.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도 그들의 발을 묶지 못했다. 나오는 족족 리디의 창에 꿰뚫려 피를 뿜어냈
다.
카메라와 헌터들의 눈은 그들의 뒷모습만을 담을 뿐이었다.
***
게이트 너머에는 드넓은 해안가가 펼쳐져 있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신비한 모래가 어둑한 밤을 밝혔
다.
신비하지만 그리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었다. 모래사장의 끝에는 물 대신에 불꽃이 파도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숨쉬기가 힘들군.”
리디와 쉬발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치워내며 불평했다. 둘은 게이트를 넘자마자 극심한 답답함을 느꼈다.
공기에 마력이 함유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을 쉴수록 마력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들에게는 썩
불리한 환경이었다.
“둘은?”
“저는 괜찮아요. 불쾌하긴 해도.”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령이 거의 없네요.”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을 사용하는 아이릴뿐. 뜻밖의 페널티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유선우는 내부를 관조해 누출되는 마력을 가늠해봤다. 다행히도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리디와 쉬발
이 헥헥대지는 않는다는 게 증거였다.
“얼마나 버티겠어?”
“전투까지 생각한다면 오래는 안 되겠습니다.”
“허접한 놈들뿐이면 모르겠습니다만….”
쉬발이 말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몬스터의 대군 사이에서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향에서도 몇 번이나 맛봤던 감각.
악마가 흘리는 존재감이 살갗을 찔러댔다.
“그럼 리디, 이거 받아둬.”
유선우가 아공간 주머니를 리디에게 던졌다. 받아 들은 리디는 의도를 알 수 없어 눈만 끔뻑거렸다.
“그 안에 뒤져보면 용 눈물 몇 병 있어. 필요할 때 써.”
용의 눈물은 간단히 말해 마력 포션이다. 이 환경에 노출된다면 효능이 떨어지겠지만 현재는 아공간 주머
니에 담겨있는 상태. 꺼내서 곧바로 복용한다면 문제는 없을 터다.
“…형님, 그거 설마.”
“이상한 오해 하지 말고. 펠리스한테 받아온 거야.”
쉬발의 합리적 의심에 유선우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뱉었다. 요즘 들어 충신이 된 쉬발이다. 자칫하면 향
후 관계가 삐걱거릴 우려가 있었다.
“하여튼 부탁할게.”
유선우는 급히 대화를 끝마치곤 창을 꼬나쥐었다. 관리자들을 상대하기에 앞서 주위를 정리할 셈이었다.
팟!
유선우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탐색하듯 눈알을 굴렸다. 불바다에 둘, 모래 위에 셋. 악마를 포착한 그가 창
에 간섭력을 밀어 넣었다.
창이 얼어붙고는 급속도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길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장창. 그것을 쥔 유선우가 하
늘에 멈춰선 채로 지면을 찔러냈다.
쩌저적!
창끝에서부터 냉기가 퍼져나간다. 모랫바닥이 가시 돋친 빙판으로 변해 몬스터들을 꿰뚫었다. 사납던 불
의 파도마저 움직임을 멈췄다.
하찮은 고블린부터 강대한 악마까지.
발해진 권능이 일순간에 몬스터들을 일소했다.
‘아무리 봐도 네 권능은 양학용이란 말이지.’
- 뭐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편해서 좋다고.’
유선우는 건성으로 넘기고는 창을 빼냈다. 그대로 일행에게 돌아가자 질렸다는 시선이 쏘아졌다.
“뭐. 왜?”
“스승님. 저희도 올 필요 있었습니까?”
“당연한 소리 하고 있어. 계속 몰려올 텐데.”
“…아, 그랬습니다.”
넋이 나간 리디가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유선우는 싱겁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 간다. 새끼들아.’
***
“뭐야.”
유선우는 눈을 뜨자마자 부유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낙하하고 있음을 알아챈 그는 허공을 발판으로 삼았
다.
‘더운데.’
유선우는 두리번거리기에 앞서 열기를 느꼈다. 아래를 내려보자 사방이 불 천지였다. 지옥을 연상케 하
는 장면이었다.
다음으로는 위를 올려다봤다. 화창한 하늘에는 거대한 섬이 떠올라 있었다. 낙원과는 달리 부유섬은 단
하나뿐이었다.
섬 위에는 웅장한 건축물이 보였다. 어지간한 성보다도 높은 백색의 신전. 신전은 화창한 햇살을 받아 찬
란한 빛을 뿜었다.
‘말 그대로 천지 차이네.’
유선우는 별 감흥도 없이 섬으로 다가갔다. 누구나가 신성하다고 여길 만한 신전도 그의 눈을 끌지 못했
다. 그저 졍신병자의 집으로만 보였다.
‘어디 보자.’
유선우는 사뿐하게 섬을 밟았다. 동시에 짙은 살의가 곳곳에서 전해져 왔다. 숫자는 총 여덟. 아무래도 초
장부터 포위당한 모양이었다.
“실컷 설치고 다녔더구나.”
돌연 신전의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하면서도 고운 미성이었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에메
랄드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보였다.
“직접 보니 알겠어. 도무지 인간으론 보이지 않아. 그리고…….”
여성이 가늘게 뜬 눈으로 유선우를 주시했다. 그녀가 표독스러운 낯으로 헛웃음을 쳤다.
“엔라. 네년이 기어코 미쳤구나. 부끄럽지도 않으냐.”
- 응, 않아. 너야말로 나한테 맞았던 거 기억 안 나?
“대, 대체 언제 적 일을…….”
엔라의 말에 여성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금세 표정을 다잡고는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와 같을지는 곧 알게 될 일이지.”
- 넌 곧 뒈질 거고. 선우, 뭐해?
엔라가 가만히 서 있는 유선우를 재촉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뜻밖이게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 않
았다.
- 선우?
“둘이 아는 사인가 보다.”
- 어? 응. 옛날에 좀.
“이름이 뭔데?”
- 셀라트리스라는 앤데… 뭐야, 왜 그래?
상태가 어째 이상했다.
묘한 태도에 엔라가 초조해하는 순간이었다.
유선우가 난데없는 개소리를 뱉어냈다.
“이쁘네. 쟤.”
- …응?
“뭐랄지. 콧대 높게 생겼잖아.”
유선우의 눈이 셀라트리스를 훑었다. 요사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와 상대를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 인
상에서부터 상당한 사디스트임이 드러났다.
- 잠깐만. 너 뭐라는 거야? 미쳤어?
“아니, 진짜로.”
“이 무례한….”
대화를 들은 셀라트리스가 인상을 확 구겼다. 자신이 조롱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유선우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셀라트리스는 유선우가 진심임을
알아챘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요염한 음성으로 말했다.
“생각보다 눈이 좋구나. 아니면 목숨이라도 구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만, 조
건이-”
“한 번쯤은 말이야.”
유선우가 셀라트리스의 말을 끊었다. 그는 창을 소환하고는 시커먼 욕망을 드러냈다.
“관리자를 데리고 놀아보고 싶었어.”
“……무어라?”
셀라트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결론이 그렇게 된단 말인가. 그녀가 혼란스러워할 때, 주위에서
고함이 빗발쳤다.
“불경하다, 네놈!”
“셀라트리스 님께 무슨 망발을!”
“저놈의 목을 잘라라!”
관리자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분노에 몸을 맡긴 기색.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들을 보며 유선우가 음흉하게 웃었다.
“병신들.”
싸아아.
유선우가 격을 발출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를 중심으로 수 미터의 공간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유
리창에 금이 갈라진 듯한 모양새였다.
눈치 빠른 넷은 황급히 몸을 멈췄다.
한편 멈추지 않은 셋은 처참한 꼴이 되었다. 유선우의 간격에 들어가자마자 온몸이 조각나고 터져갔다.
고작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형세가 뒤바뀌자 셀라트리스의 동공이 지진 난 듯이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돼.”
셀라트리스는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을 휘두르는 모습이 얼핏 보였을 뿐. 저것이 창술
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말 돼.”
유선우가 빙긋 웃고는 허공을 밟았다.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관리자들을 추격하며 창을 휘두른다.
천 줄기의 벼락을 잘라내고 빛의 파도를 찢어발긴다. 어떤 권능도 유선우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였다. 셀라트리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관리자는 이미 셋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비겁한 놈!”
셀라트리스가 일갈을 터뜨리며 유선우에게 쇄도했다. 그녀의 몸이 바람에 휘감기더니 거대한 소용돌이
로 변했다.
살아남은 두 관리자도 셀라트리스를 도와 권능을 펼쳤다. 칼날비를 뿌려대는 흑운과 물로 만들어진 수천
의 짐승들. 위협이 세 방향에서 유선우를 덮쳤다.
하지만 연계가 조잡했다. 서로가 저들끼리 물어뜯으며 난장판을 벌였다.
그 사이에서 자유로운 것은 유선우뿐이었다. 그는 보이는 족족 원 없이 찌르고 베어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구름의 형태가 흩어졌다. 짐승들도 점차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증발했다.
녹색의 소용돌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크기는 처음의 반절도 되지 않았고, 창이 지나간 곳마다 서리가 맺
혀 있었다.
“이 악물어라, 이년아.”
유선우가 전차처럼 달려들어 폭풍의 중심을 찔렀다. 창끝에서 얼음이 퍼져가자 바람이 순식간에 잠잠해
져 소멸했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주저앉은 셀라트리스가 나타났다. 위기감을 느껴 권능의 사용을 중지한 것이었다.
“하악, 하아악!”
셀라트리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온몸에 상처와 서리가 가득하고 옷은 죄다 찢어져 있었다. 한 번 찌르
면 곧바로 죽을 낌새였다.
- 꼴 좋다, 멍청한 년!
“닥쳐, 죽여버리겠어!”
- 해보든가. 아니면 얘한테 꼬리라도 쳐봐. 살려줄 줄 누가 알아?
“읏…….”
엔라의 말에 셀라트리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어린 관리자였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을 터. 하지만 그
녀는 생에 대한 집착이 상당했다. 엔라에게 수차례 죽을 뻔했었기 때문이다.
셀라트리스는 위기를 겪어왔기에 소멸에 대한 공포가 짙었다. 무심코 유선우에게 애원의 시선을 보낼 정
도로.
“하, 이러면 안 되는데.”
유선우가 창끝을 바닥으로 향했다. 그는 굴복한 셀라트리스를 보며 쓰게 웃었다. 자비심 가득한 미소였
다.
- 뭐야. 진짜로 살려주게? 오늘따라 왜 그래?
“아, 아아…! 고맙-”
푸욱!
셀라트리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칠 때였다. 그녀는 문득 복부에서 강렬한 고통을 느꼈다. 아래를
내려보자 자신의 배를 꿰뚫은 창이 보였다.
“어째, 서…? 나더러 아름답다고, 데리고, 놀겠다, 고…….”
셀라트리스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유선우를 쳐다봤다. 그의 쓴웃음은 어느새 함박웃음으로 돌
변해 있었다.
“구라지. 생각 좀 하고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