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우 파티
유선우와 세 식구는 박아연의 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다섯이 함께 행동할 요량이었다.
“근데 아이릴. 아브나바가 뭐라디?”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셨어요.”
“예. 신들의 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응? 아, 그렇지.”
유선우가 어색한 투로 긍정했다. 전혀 있는 그대로가 아니었다. 핀트가 아주 다르지는 않으니 문제는 없
겠지마는.
‘꼭 그렇게 숨겨야 하나?’
- 저쪽은 종교니까 어쩔 수 없지. 자기가 믿는 신이 따까리라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말투는 어쨌든 내용은 납득이 갔다.
물론 아이릴들이 진실을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을 터. 하지만 신앙심에 금이 가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참 느낌 이상해.’
자신만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본인의 위치를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었다고 할
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젠 고딩 때는 기억도 안 나네.’
평범했던 시절의 기억이 희미했다. 기억 속의 자신은 창을 쥐고 있던 경우가 더 많았다.
유선우는 묘한 감각을 안은 채로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아연 씨, 계약은 했어요?”
“무슨 계약이요?”
“헌터요.”
“아… 그거. 아직이에요. 지금은 때가 아니다 싶어서.”
돌아온 대답에 유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옳은 판단이었다.
“하긴. 몸값은 올려둬야죠.”
“근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저희가 게이트 막 들어가도 되나요?”
“대표님한테 허락받았어요. 토벌대랑 같이 가라 하시던데요.”
“토벌대… 저기 있네요.”
박아연이 차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야에 수십의 인파가 대기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게이트가
열릴 때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도 내립시다.”
***
유선우는 차에서 내려 야영지를 둘러봤다. 그러자 뜻밖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가가니 그쪽도 알
아본 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라, 형이 왜 여기 있어요?”
“내가 할 소린데. 여기서 뭐해?”
강창민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름대로 큼지막한 게이트
가 있었다.
“던전 털러 왔죠. 지원이지만.”
“저게 무슨 급이야?”
“B급이나 B+급쯤 될걸요?”
“저만한 게 자주 나오나요?”
둘의 대화에 박아연이 끼어들었다. 그녀를 쳐다본 강창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와, 누나도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약한 데다 노처녀라고 까인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에요.”
“에이, 만나자마자 살벌하시네.”
박아연과 강창민은 한 차례 악수를 나눴다. 악력을 겨룬다거나 하는 뻘짓은 없었다. 손을 놓은 강창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옛날 같지가 않아요. A급도 가끔 나오고, B급 정도는 널렸어요. 근데 헌터 숫자는 점점 줄어가니까 하루
하루 망해가고 있는 셈이죠.”
“그동안 고생했겠네요.”
“군대보단 힘들었을걸요. 가본 적은 없지만.”
너스레 떨듯이 말한 강창민이 눈알을 굴렸다.
“다른 분들은… 허.”
그의 눈이 리디의 얼굴에 꽂혔다.
일견 늠름해 보이면서도 단아한 얼굴. 색소 없이 하얀 피부와 선명한 적색의 머리카락. 들어갈 데 들어가
고 나올 데 나온 몸매까지 완벽했다.
“형, 저 사람 누구예요?”
“내 제자. 왜?”
“저 좀 관심 있는 것 같아요. 엄청 취향인데.”
“내 동생한테도 그러지 않았었나?”
유선혜의 화제에 강창민의 입이 비뚤어졌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한탄하듯 말했다.
“차였어요, 차였어. 남자 보는 눈이 없어가지고.”
유선혜도 거를 타선을 거를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한 유선우가 강창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쟤 건드리면 뒤져.”
“아 왜요. 형 여자친구도 아니잖아요.”
“내 애한테 집적대는 기분이라 X 같아.”
마지막 세 글자에 악센트가 담겼다. 강창민은 입을 다물고 침을 꼴깍 삼켰다. 맹수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
이었다.
“저, 제 얘기하시는 거 맞습니까?”
돌연 리디가 가까이 와서는 강창민을 훑어봤다. 강창민은 어째 긴장되고 설레어 바짝 굳었다. 이내 리디
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전 약한 사람에겐 흥미 없습니다.”
“뭐, 뭐요?”
“못 들으셨습니까?”
“아니, 제가 누군지 모르시나 본데….”
발끈하던 강창민은 애써 속을 다스렸다. 경험상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 못했다. 그는 유선우
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물었다.
“오늘 지원 나오신 거 맞죠?”
“응? 응.”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됐네요.”
강창민이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리디와 유선우, 박아연을 번갈아 보고는 선언했다.
“보고만 계세요. 제가 혼자 다 잡을 테니까.”
***
“……어라?”
강창민은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전방을 쳐다봤다. 그의 눈앞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우워어어어!”
광활한 초원의 풀밭 위. 거대한 사이클롭스가 외눈을 잃고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시야가 막히자 놈이 막
무가내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쿵, 쿵!
위험한 상황인데도 강창민을 비롯한 토벌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멍하니 관람만 할 뿐이었다.
콰직!
리디가 손가락을 퉁기자 두꺼운 몽둥이가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가 다시 한번 지탄을 쏘아내니 푸른색의
핏물이 뿜어졌다.
그것을 끝으로 사이클롭스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놈의 이마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나 있었다.
“실환가?”
사이클롭스는 던전의 중간 보스 격인 몬스터였다. 그런 강적을 벌레 쫓듯이 죽이다니. 눈을 의심하게 되
는 광경이었다.
‘나도 잡을 수는 있지만….’
강창민도 명색이 A+급 헌터. 사이클롭스라면 일대일이라도 홀로 꺾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최소 2~3분의 시간은 필요할 터였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생명력이 질기기 때문이다.
‘근데 저 한 방에 죽는다고? 왜?’
하나하나가 불가해했다. 강창민은 리디의 일격에 담긴 묘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보고만 있으라며?”
“…저 사람 누구예요?”
“내 제자라니까. 수제자지.”
“하, 어이가 없네. 그리고 저 누난 어떻게 된 거예요?”
강창민이 박아연을 눈짓해 가리켰다. 그녀는 한창 몰려오는 잡몹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웬 바람이 지나가나 싶더니 몬스터들의 사지가 잘려나간다. 단신으로 오십에 가까운 괴물들을 도륙하는
데도 여유가 넘쳐 보였다.
“저 누나가 저렇게 셌다고요? 애초에 능력도 저런 거 아니었잖아요.”
“2차 전직이라도 했나 보지.”
“게임도 아니고 2차가 어딨어.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요.”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그게 뭔….”
강창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시종일관 지루한 기색이던 아이릴과 쉬발이 끼
어들었다.
“아까부터 말 더럽게 많네요, 당신.”
“동감이다. 얌전히 그 뭐야, 버스나 탈 것이지. 조잘조잘 시끄럽군.”
“그렇다는데. 그냥 편하게 쉬어.”
일침에 강창민이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무시당하는 건 불쾌해도 대응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
다.
‘내가 설칠 데가 아니야.’
유선우의 일행들은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강자였다. 가장 약해 보이는 박아연마저 A+급은 떡을 칠 듯했
다. 강창민은 허망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이러려고 수련했나.’
3년간 피땀을 흘려가며 창을 휘둘러 왔건만.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명성은 얻었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돈만 많으면 뭐해.’
강창민은 25살 먹도록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었다. 다가오는 이성이야 수두룩하지만 그뿐. 정작
호감 가는 여성에게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아.”
한숨을 토해낸 강창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던전의 하늘은 유달리 새파랬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귀환 게이트가 열립니다.]
유선우의 눈앞에 짤막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는 문구를 보며 의아한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들어올 때도 생각했는데, 던전 정보 제대로 주네.’
- 그러게. 저번에 안 나오길래 놀고먹는 줄 알았는데.
엔라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아직도 아브나바의 통수에 꽁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전엔 던전도 아니었지.’
유선우는 나름대로 납득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토벌대를 훑어보자 넋이 나간 기색이 뚜렷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던전의 클리어에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산책하듯이 느긋하
게 걸은 탓에 늦어진 것이었다.
반응이 어떻든 말든 유선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한 차례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자, 자. 수고하셨고요. 다들 먼저 돌아가세요.”
“유선우 씨는 안 가세요?”
한 여성이 머뭇머뭇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뻔한 욕심이 일렁거렸다. 유선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릴이 나섰다.
“저흰 할 일이 있어서요. 날로 먹었으면 조용히 돌아가시죠?”
“저기, 말을 왜 그렇게 하세요?”
“뭐라고 말했나요? 잘못 들었는데.”
아이릴의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청색과 적색의 혈액이 섞인 핏물이 퍽 기괴했다. 그 모습을 본 여
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했다.
“그, 그럼 가볼게요. 감사했습니다!”
여성이 줄행랑치듯이 귀환 게이트로 향했다. 그다음으로는 강창민이 다가와 피식거렸다.
“저년은 맨날 저러더라고요. 어디 하나 잘난 구석도 없으면서.”
“의외로 마음이 맞네요.”
아이릴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진작 변장했기에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그녀를 보면서 강창민이 합
리적 의심을 품었다.
“둘이 무슨 사인지 물어봐도 돼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와. 누나는요?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던데.”
시선이 이번에는 박아연에게 닿았다. 강창민도 나름대로 눈치는 있었기에 묘한 기류를 알아챌 수 있었
다.
“글쎄요?”
“캬, 존경스럽습니다.”
강창민이 유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분명 세간에서는 쓰레기라 부를 터. 하지만 본디 영웅이라면 삼처사첩이다. 유선우는 여러 면에서 강창
민의 롤모델이었다.
“존경은 무슨. 됐으니까 너도 나가.”
“옙. 덕분에 꿀 잘 빨았어요. 뭐 하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다음에 밥이나 한번 사.”
“그거 좋죠. 가능하면 빨간 머리 분도 데리고….”
“그 밥이 육개장이 되는 수가 있어.”
제삿밥 얻어먹겠다는 소리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강창민이 리디를 곁눈질하던 눈을 멈췄다.
“추, 충성입니다.”
강창민도 토벌대를 따라 지구로 귀환했다. 그의 등을 쳐다보던 유선우가 싱겁다는 것처럼 웃음을 흘렸
다.
“하여간 새끼. 눈만 높아 가지곤.”
중얼거림을 들은 리디가 입가를 잠깐 씰룩였다. 그녀는 금세 표정을 다잡고 말을 건넸다.
“스승님.”
“알아.”
토벌대의 일은 끝났다.
이제는 유선우가 일할 차례였다.
“딱 10분만 기다려.”
유선우가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눌렀다. 이내 그의 몸이 축 쓰러지자 아이릴이 다가가 받쳤다. 그녀는
바닥에 앉고는 무릎에 유선우의 머리를 얹었다.
‘너무 짧은데.’
아이릴은 속으로 히죽거리면서 유선우의 얼굴을 매만졌다. 볼을 잡아당겼다가, 입술을 살살 꼬집다가.
리디와 쉬발이 뚫어지라 쳐다봐도 그녀는 그만두지 않았다.
시답잖은 장난이 3분 동안 계속되었다.
아이릴이 눈두덩이를 콕콕 찔러댈 때였다.
유선우가 눈을 번쩍 떴다.
“악!”
“어, 어머. 미안해요.”
졸지에 눈알을 찔린 유선우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릴은 화들짝 놀라 신성력을 들이부었다.
“스승님, 아직 5분도 안 지났습니다만.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게…….”
유선우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말했다.
“그냥 빨리 끝났네.”
야생의 관리자는 허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