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대로 됐다
식사를 마친 뒤에 유선우는 차세정의 차에 올라탔다. 이른바 밀회였다.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더라도 차분히 대화를 나누려면 숨을 수밖에 없었다. 유선우 자체가 심각한 논란거
리였기 때문이다.
“유선우.”
“응?”
“아까까진 가만히 있었는데… 이젠 못 참겠어.”
내용만 들어보면 음란마귀가 씔 듯했다. 하지만 유선우는 군침을 삼키는 대신 눈만 끔뻑거렸다. 워낙 어
조가 사나웠던 탓이다.
“…나도 화내기 싫어. 너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어리둥절한 반응에 차세정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녀도 재회한 지 얼마 안 된 마당에 쓴소리를 뱉고
싶지는 않았다. 또 싸우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도 유선우는 위험한 일에 몸을 던질 테니까.
“근데 넌 맨날 목숨이 서너 개 있는 것처럼 굴더라.”
유선우는 훈계받는 아이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확신이 있었을지라도 남들이 보기엔 무
모한 행동이었다.
“미안. 한두 마디는 해둘 걸 그랬네.”
“아니, 어차피 내가 납득 안 했을 거야.”
“그래도 나름 안심은 했겠지.”
“……하아.”
태연한 대꾸에 차세정이 한숨을 토해냈다. 위험에 달려드는 걸 지적했더니 말을 안 해서 미안하단다. 그
녀가 기대한 대답과는 핀트가 달랐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겠다고.”
“할 일이 아직 많아서.”
“왜 네가 하는데?”
“나밖에 못 하니까?”
정확히는 하고 싶어서였다. 유선우는 신계를 뒤엎고 싶었고 초월자들을 해방하고 싶었다.
지구는 그 과정에서 딸려 오는 덤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차세정은 침묵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개판 난 한국을 바꿀 수 있는 인
물은 유선우뿐이었다.
언제나 문제는 감정이었다.
“그럼 나는 어쩌라고?”
차세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네가 없어지면 또 기다려? 돌아오면 울고, 없어져도 울고. 그냥 등신처럼.”
“얼마 안 걸려. 약속할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가끔 보면 내가 너한테 중요하긴 한지 모르겠어.”
“아니, 말을 왜 그렇게 해.”
워커홀릭 직장인이 자주 듣는 잔소리였다. 유선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궁색한 말만 늘어놓았다.
“좀만 고생하면 다 끝이야!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이 편하게 살 수 있다니까?”
“난 나중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지금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당연히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세상 꼴을 봐.”
다투는 둘을 보며 엔라가 팝콘을 튀겼다.
- 와, 나 이런 거 드라마에서 봤어.
“넌 닥쳐.”
“나한테 닥치라 한 거야, 지금?”
“그게 아니라. 내 맘 알잖아.”
하필이면 혼잣말하던 버릇이 지금 튀어나왔다. 이게 다 엔라가 문제였다.
“모르겠다니까! 날 진지하게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자기 목숨이니까 막 쓰겠다 이거야?”
“세정아, 잠깐만. 너무 흥분했다. 진정하고….”
“더는 안 되겠어.”
차세정의 목소리가 사형선고처럼 무겁게 내리깔렸다. 혹시 차이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유선우가 가슴을
졸일 때였다.
차세정이 갑작스레 차를 몰기 시작했다.
“어, 어? 어디 가, 지금?”
“구청.”
“구청을 왜?”
“혼인신고 할 거야!”
“……응?”
***
차세정의 진심은 강했다. 그녀는 정말로 구청까지 차를 몰았다.
하지만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는 일은 없었다. 변심이 아니라 구청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야근 좀 해, 공무원!”
“너도 공무원 아닌가?”
“우리도 가끔은 야근해!”
“그래? 6시 칼퇴근인 줄 알았는데.”
“요즘 시대에 무슨. 아무리 복지가 좋아도 그렇게는 안 돼.”
차세정이 히스테릭하게 씩씩거렸다. 15분가량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흥분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녀가 고
개를 홱 돌려서 유선우를 노려봤다.
“월차 쓸 테니까 내일 또 와.”
“아니, 안 바빠? 내가 말하긴 뭣한데… 나 때문에 바쁘지 않나?”
“무슨 상관이야. 이게 더 중요해.”
하긴 맞는 말이다. 결혼하겠다는데 회사가 바쁘든 말든. 인생의 중대사를 회사 탓에 미룰 수는 없는 노릇
이다.
“제발 머리 식히자. 진짜 결혼하자고? 갑자기?”
“나랑은 싫어?”
“왜 또 말을 그렇게 하냐…. 그냥 너무 급하다는 거지.”
유선우는 변명하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따금 나오는 대사였다.
‘이런 소리 하는 배역은 다 쓰레기던데.’
손가락질하거나 혀를 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의 심정이 살짝 이해가 갔
다.
즉 자신이 쓰레기가 되고 있다는 의미. 유선우는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거는, 어? 양가 부모님도 다 뵙고 상의도 하면서, 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할 거 아니야.”
“현실적이지 못할 건 뭐야.”
결혼의 걸림돌은 항상 돈이다.
하지만 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였다.
굴지의 클랜에 근무하는 차세정의 연봉은 상당한 수준이다. 유선우는 말해봐야 입만 아픈 갑부. 문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결혼해서 네가 죽으면 난 과부가 되는 거야. 알아들어?”
“…….”
과부라는 단어에 유선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상상만 해도 입맛이 썼다. 몹쓸 짓을 하는 기분에 절로 고개
가 내려갔다.
“날 그렇게 만들고 싶어?”
차세정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유선우를 담았다. 유선우의 낯에 진지함이 어렸다.
“아니, 절대로.”
“그럼 앞으로 잘해. 개나쁜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시종일관 심각하던 차세정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따스한 기류가 몽글
몽글 피어올랐다.
그때 차세정이 말했다.
“하여튼 내일, 까먹지 마.”
“진짜요?”
“작성해서 가지고만 있을게. 그 정도는 괜찮지?”
“…그거야 뭐.”
싱거운 대답에 차세정이 쓰게 웃었다. 그녀의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쩌면 유선우도 달가워하지 않을까 싶었건만.
거기까진 욕심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은 돌아가자. 집까지 태워줄게.”
“나도 차 하나 사야 하는데.”
“차보다 좋은 거 있잖아.”
“응? 아, 다음에 한 번 타볼래?”
“으, 무서워.”
유선우는 잡담하면서 내심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잘
모를 감정이.
***
한국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달라졌다. 며칠 전까지의 칙칙한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에 대중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었던 기대감. 그 도화선은 예상보다도 빠르게 점화되었다.
불씨는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타올랐다. 유선우가 생환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나타난 변화였다. 그의
파급력을 의심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주목을 받은 것은 유선우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동행했다는 신원 미상의 헌터들. 그리고 시내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용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
다.
“혀, 형님! 제가 TV에 나옵니다!”
“알아.”
유선우는 턱을 괸 채 TV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쉬발의 반응을 이해하면서도 공감하지는 않았
다. 소란스레 호들갑 떨기에는 새삼스러웠다.
“하아. 부럽습니다…….”
“네 얘기도 나오잖아.”
“얼굴은 안 나오지 않습니까.”
리디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녀 역시 쉬발과 마찬가지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인질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쉬발과는 달리 화면에 찍히지는 않았다.
“흥. 뭐가 좋다고 그래요? 몬스터 소리 들으면서.”
“그건 확실히 짜증 난다만 이해는 하고 있다.”
“용족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흐흐. 질투라도 나나?”
이죽거리는 말에 아이릴의 뺨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변명은 추했다.
온갖 채널에서 쉬발의 영상이 송출되니 상대적으로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화려하게 할 걸 그랬어요.”
“유명해져서 뭐하겠다고?”
“뭐하기는요. 이 땅에 아브나바 님의 제국을 세우는 거죠! 그거예요. 문화 침략?”
종교 얘기가 나오자 유선우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을 신봉하는 신도들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
다.
‘한 번 알아봐야겠어.’
적어도 어떤 놈팡이들인지는 알고 싶었다. 쓸데없는 고생임은 알지만 아무래도 찜찜했다.
“근데 형님, 언제부턴지 그 인간 아이가 안 보이던데요. 어디 갔습니까?”
쉬발이 의아하다는 듯이 거실을 둘러봤다. 어딜 봐도 김한영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았다.
“빨리도 물어본다.”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김한영이 유선우의 품을 벗어난 건 서울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그는 현재 구출된 인질들 사이에 껴서 생
활하고 있었다. 유선우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내가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 내 애도 아닌데.”
“그렇습니까?”
쉬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보기에 유선우는 이미 셋을 부양하고 있는 가장이었다. 하나쯤은 늘어
나도 전혀 상관이 없을 듯했다.
한편 유선우는 대화를 멈추고 생각을 전환했다.
다름 아닌 근원석에 대해서. 관리자로부터 얻은 쪽이 아니라 서울에서 발견한 파편이 문제였다.
‘뭐라고 했었더라.’
유선우는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놈이 죽기 직전에 뱉었던 말. 내 주께서 친히, 까지 말하고 뒈졌었다.
심히 짧은 말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정보였다.
‘근데 좀 애매하단 말이지.’
신계가 개입했음은 확실했다. 문제는 태도가 몹시도 소극적이라는 것.
다만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이마저도 과감한 개입이었다. 그 정도로 신계의 행동은 미온적이
기 그지없었다.
‘왜?’
유선우는 의문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물론 적대하는 입장에선 놈들이 미적거릴수록 좋기는 하다. 하지
만 그 이유를 알기 전엔 마음을 놓기가 힘들었다.
‘직접적인 개입이 아예 불가능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되도록 전자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신이 상당히 무능하다는 전제를 깔아야 하겠지마는.
‘야. 아는 거 없어?’
- 우리도 그분들은 잘 몰라. 교류도 거의 일방적이고, 그냥 시키는 일만 하는 거라서.
엔라에게도 쓸 만한 정보는 없어 보였다.
유선우는 한숨을 내쉬며 아쉬움을 달랬다. 혹시나 신계에도 약점이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었건만. 이
이상 파고들 방도가 없었다.
‘그럼 됐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신계에서 관리자에게 접촉했다는 것. 그로 말미암아 어떠한 가능성을 떠올
릴 수 있었다.
‘만날지도 모르겠네.’
유선우는 관리자들을 사냥할 예정이었다.
놈들의 뒤에 신계가 있다면, 머지않아 개의 주인과 맞닥뜨릴 날이 올지도 몰랐다.
‘아주 뚝배기를 깨주마.’
그 상황을 대비해서 힘을 길러야 했다.
***
“…….”
김정수는 대표실의 문을 열려던 손을 우뚝 멈췄다. 내부에서 생소한 음성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요? 심심한데.
- 동감이다. 건방진 인간이군.
김정수의 감각은 자그마한 대화소리를 명확하게 잡아냈다. 그는 헌터로서의 역량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
다.
‘누구지?’
인간 운운은 둘째치고 기다린다니.
분명 누군가와 만날 스케줄은 없었다.
‘내가 일정을 착각했나.’
요즘은 원체 피곤해 이따금 생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들려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김정수의 경계심이 짙어지는 때,
- 이미 온 것 같습니다만. 바깥에 있습니다.
그 말에 김정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암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그가 황급히 뒤로 물러
나며 전투 태세를 다잡았다.
벌컥!
곧 문이 열리고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하세요?”
“…유선우 씨?”
네 명의 남녀가 김정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흐릿한 인상으로 변장한 아이릴이 말했다.
“저 사람 뭐하는 거예요? 체조라도 하나.”
“크흠!”
김정수가 헛기침하고는 내밀었던 주먹을 거뒀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귀가 살짝 벌겠다.
“대표님, 화장실 너무 오래 다녀오시는데요. 혹시.”
“그런 거 아닙니다.”
“예. 이해해요.”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강조하는 음성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러자 아이릴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변비가 어때서요? 그게 쪽팔린가?”
“변비가 아니고 그냥 오늘따라 좀 안 나올…. 아니, 그보다 누구십니까?”
“제 부하 중에도 변비나 치질 숨기는 사람이 좀 있었습니다.”
김정수의 포커페이스가 시시각각 무너져 갔다. 그는 유선우를 여러 명 상대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