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았다 요놈
유선우는 흡족하게 웃으며 게이트를 응시했다. 그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전부 이해했다.
“서비스 좋은데.”
대리자와 관리자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이어져 있기에 당연히 추적도 가능한 셈. 아브나바가
제작한 창이 추적기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관리자 빽이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한편 아이릴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뭐, 뭐예요? 갑자기 게이트가 왜….”
“얘네 본진인 것 같다. 아이릴, 기다리고 있어.”
“넘어가려고요? 혼자서?”
유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런 그를 엔라가 제지했다.
- 아니야. 데려가.
“응?”
- 관리자는 물질계에 직접 못 내려오는 거 알잖아.
“맞다. 그럼 나도 못 올라가겠구나. 어떻게 해?”
- 아브나바가 도와줄 거야.
관리자가 머무는 장소는 물질계가 아닌 정신계다. 그곳에는 육체가 드나들지 못하기에 향하려면 몸에서
떨어질 필요가 있다. 이른바 유체이탈이다.
“근데 혼이 멀어지면 몸도 위험해진다고 들었는데.”
- 그거야 안전장치 없이 떼어냈을 때지. 전에 아브나바가 어떻게 불렀겠어?
“그럼 그것도 걔가 해주나?”
- 해줄 생각이니까 게이트 연 거 아니야?
“하긴. 유능하네.”
유선우는 마음속으로 아브나바의 평가를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별 기대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쓸모가 넘
쳤다.
그가 아이릴을 쳐다봤다. 엔라의 말처럼 된다면 육체가 무방비해질 터. 곁에서 엄호해줄 사람이 필요했
다.
“선우?”
“미안. 생각 좀 하느라. 같이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
급격한 태도 변화에 아이릴이 눈매를 좁혔다. 그녀는 수상쩍어하면서도 선선히 수긍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부가 어떨지 모르니까.”
유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통신기를 꺼내 지원을 불렀다. 밖에서 대기하던 일행들은 곧바로 부름에 응했
다. 쉬발 또한 폴리모프해 얌전하게 합류했다.
유선우는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다음으론 아이릴에게 대리자의 응급처치를 부탁했다. 그러자 아이릴이 반송장이 된 사내를 흘겨봤다. 찜
찜하다는 눈빛이었다.
“생포하려고요? 나중에 말썽부리면 귀찮아질 텐데. 족쇄라도 있으면 모를까.”
“내가 또 가져온 게 있지.”
히죽거린 유선우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이번에 튀어나온 도구는 수갑이었다.
겉모습은 낡아 보여도 흉악한 성능을 지닌 놈. 그 진가를 알아본 아이릴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마법이 몇 개나 걸린 거예요? 노화에 정신 쇠약에 무게 증가… 발기부전이랑 성욕 증진? 잘도 섞어
놨네요.”
“그때그때 필요한 옵션만 골라서 쓰는 거야.”
“이것도 용왕한테서 받아온 건가요?”
아이릴은 질문하면서 사내를 치료했다. 저만한 구속구가 있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용마저도 가둘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오르시아한테서.”
유선우가 사내에게 수갑을 채우며 대답했다.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이릴의 낯이 굳었다. 스승의
과거사에 나름대로 빠삭한 리디도 마찬가지였다.
“스승님, 설마 그거.”
“더 말하지 마.”
유선우는 단호하게 자르고는 익숙한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낙원에서의 30년도 그 기억을 망각시키지 못
했다.
“으, 끄으으….”
수갑의 마법이 활성화되자 사내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졌다. 혹여나 잠에서 깨어나도 쉬이 움직일 수는 없
을 터였다. 유선우는 놈에게서 주의를 거두고 게이트를 쳐다봤다.
“가자.”
***
게이트를 넘자 풍경이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나타난 장소는 녹음이 푸르른 숲이었다. 몬스터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걱정과는 반대로 한없이 평화로운 휴양지였다.
“아브나바 진짜 일 잘하는데.”
적당한 곳을 골라서 연결해준 모양이었다. 유선우는 감탄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던전 정보가 없네.”
- 그건 내가 직접 던져줬었던 거야. 아브나바는 귀찮았나 보네.
“하기야 딱히 필요도 없고. 그러고 보니 던전 이름 같은 건 어떻게 알았어?”
- 당연히 대충대충 막 지었지. 하다 보니까 늘더라.
“괜히 물어봤다.”
곧이어 일행들도 전부 숲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지구보다 훨씬 나은데요?”
“여기만 그런 거겠죠. 아마도.”
박아연의 넋 나간 목소리에 유선우가 대꾸했다. 이미 인간은 멸종한 차원이다. 다른 지역에는 몬스터가
득실거릴 가능성이 컸다.
“형님, 일단 둘러봅니까?”
“아니. 내 옆에서 호위나 서줘.”
“호위 말입니까?”
“할 일이 좀 있어서.”
“일이 뭔데요?”
아이릴이 유선우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최소한 설명은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까부터 뭐가 뭔지 모르겠어. 우리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사람
은 아니잖아요.”
“이해해. 미안.”
유선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아이릴은 3년간 젊음을 허비해가며 자신을 간호해준 은인이
다. 신뢰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지.’
앞으로의 행동에도 동료는 필요했다. 숨기는 것보단 사정을 밝혀두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일이 너무 복잡하다는 건데.’
털어놓으려고 해도 막상 설명하기가 힘들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진 않았다. 세상만사의 대부분은 공통된 해결책을 가지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아브나바랑 일하고 있거든. 걔가 얘기해줄 거야.”
남한테 떠맡기면 된다.
“아브나바 님이요?”
“잠깐만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종교 얘기예요?”
“처음부터 말하려면 사정이 복잡해요. 아브나바한테 들으세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 몰라. 다 걔한테 들어요!”
추궁을 참지 못한 유선우가 책임을 모조리 전가했다. 그러자 본인으로부터 반응이 돌아왔다.
[색욕의 지배자가 이것도 빚이라고 말합니다.]
“빚이라니, 내가 그냥 귀찮아서 던지는 줄 알아?”
다른 이유도 3할쯤은 포함되어 있었다. 상황을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관리자의 화제를 꺼내야만 한다.
그러나 유선우는 걸러야 하는 정보를 잘 구별할 수 없었다. 혼란을 불러올 수 있으니 관리자 본인이 털어
놓는 편이 나았다.
깊은 생각을 거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걸 빚으로 여긴다면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됐다. 일단 하던 일부터 끝내자.”
유선우가 혀를 차곤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아브나바도 분위기를 파악해 행동을 재개했다.
[색욕의 지배자가 혼의 접근 권한을 얻고자 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Yes / No]
“별걸 다 하네.”
유선우는 곧바로 수락하려다가 손을 우뚝 멈췄다.
‘이거 굉장히 실수하는 거 아닌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던 여자에게 혼을 맡기는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던져주는 꼴이었다. 그럴 상
황이 아님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 걱정하지 마. 장난치면 내가 제대로 족쳐줄게.
“…네가 웬일로 듬직하냐.”
엔라의 당당한 말이 유선우의 불안을 잠재웠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메시지를 눌렀다.
이내 손에 쥔 창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색욕의 지배자가 그것 좀 치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번에도 저항한 모양이었다. 무기가 너무 사기여도 문제다.
‘이걸 엔라한테 써먹으려 했다 이건데.’
유선우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 창을 집어넣었다. 그가 다시 날아온 메시지를 수락했다. 그러고는 멀뚱멀
뚱 쳐다보는 일행들에게 다시금 부탁했다.
“혹시 모르니까 엄호 잘 해줘.”
수 초가 지나자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
유선우의 의식이 부상했다. 눈을 떠보자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불길한 붉은 달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정면에는 생소한 건물이 보였다. 눈처럼 깨끗한 순백의 성이었다.
“이건 좀 볼 만하네.”
달빛이 하얀 성벽을 적색으로 물들였다. 으스스할지라도 신비로운 경치였다. 피를 칠해놓은 빌딩과는 딴
판이었다.
유선우는 넣어뒀던 창을 꺼내 들었다. 그의 시선이 드높은 성의 꼭대기를 향했다. 그곳에선 검은 인영이
두 발로 선 채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끝끝내 여기까지 왔는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중한 듯하면서도 속은 흉포했다.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짐승 같은 인상이었
다.
“컨셉 지랄 맞네.”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그가 가볍게 땅을 박차 성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잡았다 요놈.”
“……잡았다고?”
관리자가 목소리를 떨어대며 분노를 드러냈다. 동시에 붉은 달이 휘황하게 번쩍였다. 공간의 주인인 그
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오만하군, 인간.”
“내가 할 소리지. 안 꿇고 뭐해?”
“무어라?”
“공들인 계획은 망했고, 이제 뒈지게 생겼는데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냐 이 말이야.”
“내가 네놈을 끌어들였다는 생각은 못 하는가.”
덥수룩한 흰색 머리카락 속에서 안광이 번뜩거렸다. 이빨을 드러낸 이리와도 흡사했다.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를 쬐면서도 유선우에게 공포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
었다.
“야, 너무 억지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 네가 뭘 해줬는데?”
전부 아브나바의 조력이었다. 그마저도 이 괴상한 이름의 창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 과정
에 눈앞의 관리자가 끼어들 구석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테러리스트의 소탕이 늦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뻔하다. 한국이 전복됐겠지.
그것이 관리자의 목표였음은 명백했다.
“허세도 적당히 부려야지. 말은 이제 됐어.”
듣고 싶은 정보야 여럿 있었다. 근원석에 대한 것부터 관리자들끼리의 커넥션까지. 낱낱이 털어놓게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순순히 협조할 놈은 아니었다.
“일단 맞자.”
어두운 갈색의 눈동자에 귀기가 서렸다. 유선우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강대한 격이 뿜
어지자 관리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뒤늦게 유선우의 무력을 파악한 관리자가 경악했다. 유선우가 힘을 숨겼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리자의
편협한 시야가 문제였다.
“인간이 어떻게 그만한-”
“옛날에도 자주 들었어.”
담담하게 말하는 한편으로 유선우의 창에는 흉흉한 살기가 맺혔다. 창끝이 소리 없이 관리자의 가슴을 노
렸다.
부웅!
관리자가 황급히 상체를 비틀었다. 창을 뒤따른 칼바람에 그의 살갗이 얕게 베였다. 그는 자세를 무너뜨
린 채로 용케도 거리를 벌렸다.
곧이어 유선우의 추격이 행해졌다. 그가 허공을 밟으며 창을 내질렀다. 뻗어지는 창대에 거대한 회오리
가 휘감겼다.
관리자가 공격에 맞서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관리자의 손이 녹아내리며 피로 변했다. 진득한 핏물이 짐
승의 아가리가 되어서는 회오리를 먹어치우려 했다.
콰드드득!
결과는 정반대였다. 창날이 짐승의 입을 간단히 찢어발겼다.
회전하는 강풍에 핏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평생 느껴본 적도 없는 강렬한 통증에 관리자가 이를 악물었
다.
‘최대한 떨어져야 한다.’
단 두 합 만에 내린 결론이었다.
근접전은 답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적어도 백 보의 거리는 유지해야…….
“끄으으윽!”
다시금 쏘아진 창이 관리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창을 뒤따른 칼바
람이 몸속을 난자했다.
관리자가 극심한 피해에 당황한 사이에도 맹공이 이어졌다. 초장부터 주도권을 빼앗겨버렸다, 위기감을
느낀 관리자가 높게 도약해 창격을 떨쳐냈다.
“크르르릉!”
달 아래에서 그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인체가 사자를 닮은 거구의 짐승으로 변형되었다.
살가죽이 벗겨진 양 검붉은 온몸, 기다랗게 뻗어 나온 두 송곳니. 외견만 보면 흉포한 포식자가 따로 없었
다.
“뭐야. 제정신인가?”
유선우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짐승을 쳐다봤다. 김이 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가 하는 짓이 허접해
빠졌기 때문이다.
전투 중인데도 행동의 결정은 느리고, 처맞고 나서야 본모습을 내보인다. 수준이 너무도 저급했다.
“왜 이렇게 약해?”
수 초간의 전투만으로 파악했다. 저놈은 싸움을 모른다. 지닌바 힘은 나름대로 봐줄 만해도 생각부터가
글러 먹었다. 차라리 낙원에서의 대련이 더욱 살벌했다.
- 뭘 기대했어? 어린 관리자가 잘 싸울 리가 없지. 요즘 애들은 다 맹탕이야.
“말투는 꼰대 같은데 반박을 못 하겠네.”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인간!”
관리자가 일갈했다. 그의 호통에 유선우의 언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 지랄할 시간에 때리라고!”
유선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창을 휘둘렀다. 관리자의 몸에서 여럿의 머리가 튀어나와 창을 까득까득 깨
물었다.
가까스로 일수를 막아낸 관리자가 시스템을 조작했다. 이 차원은 그의 본진이다.
망한 차원일지라도 관리자는 관리자. 권한이 박탈되지는 않았으니 유선우를 추방하는 것도 가능했다.
분명 가능해야만 했는데.
파지직!
여지없이 유선우의 창에서 백색 스파크가 번졌다. 시스템이 에러를 일으키며 명령이 거부되었다. 그러자
관리자의 낯이 허망함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유선우가 김빠진 기색으로 대답했다.
“뭐긴 뭐야, 사기템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