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쟤는 뭐 하는 거야.”
유선우의 시선이 잔해 위에 올라선 흑룡에게로 향했다.
“크릉, 그르르르….”
양옆으로 몸을 흔들다가 저 혼자 풀썩 자빠진다. 마치 만취한 취객을 보는 듯했다.
“상태가 왜 저래?”
- 어라. 간섭력이 좀 붙어 있는데.
“응?”
유선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쉬발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엔라의
말대로 간섭력이 침투한 흔적이었다.
“세뇌 같은 건가. 용이 정신 마법도 걸려?”
- 쟨 아브나바 차원에서 온 애라서 난 잘 몰라. 근데 마법이랑은 다르지. 세뇌까지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그냥 술 취한 것 같네.”
쉬발을 쳐다보는 유선우의 눈동자에 못마땅하다는 감정이 어렸다. 일 하나 시켰더니 간단히 농락당해 민
폐나 끼치고 있다. 여러모로 고생시키는 놈이었다.
따악!
난데없이 경쾌한 마찰음이 들려오더니 쉬발의 머리에서 폭발이 일었다. 증식하듯이 불꽃이 튀어나와 연
쇄적으로 터져 나갔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비늘이 상당 부분 녹아내리고, 살갗이 그
을렸을 뿐이었다.
“아으, 짜증 나!”
큼직한 잔해 속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선 박아연이 김한영을 감싸면서 쉬발에게 손을 겨
냥하고 있었다. 유선우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제지했다.
“그만 해요. 비늘 빠지면 쟤 삐져요.”
“뭐예요. 언제 왔어요? 연락한 지 5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열심히 뛰어왔죠. 그보다 왜 저래요?”
유선우가 눈짓으로 쉬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박아연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웬 이상한 놈이 건드리더니 갑자기 저래.”
“이상한 놈?”
“몸에다 몬스터 섞어놓은 것처럼 생긴 남잔데, 놓쳤어요. 미안해요.”
박아연이 풀 죽은 어조로 사과했다. 그녀는 줄곧 쉬발과 같이 있었는데도 돕지 못한 것에 자책감을 느끼
고 있었다.
“이놈이요?”
유선우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길쭉한 무언가를 꺼냈다. 핏줄이 울긋불긋한 푸른색의 팔이었다. 갑작스
레 튀어나온 팔을 쳐다보며 박아연이 눈을 끔뻑거렸다.
“네, 네. 맞는 거 같네요. 근데 그걸 왜 선우 씨가…….”
“오다 주웠어요. 신기해서 챙겨왔죠.”
오다가 만나서 죽였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박아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도 목청을 가다듬
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마 그놈이 여기 핵심이었을 거예요. 한영이가 몬스터 기르는 놈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
“네. 그냥 소문이었는데, 진짜였나 봐요.”
“잡길 잘했네.”
유선우는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팔을 집어넣었다. 박아연과 김한영의 질색하는 표정에도 그는 아랑곳하
지 않았다. 쓸데없는 수집욕이 피어올랐다.
“그럼 일단-”
“크아아아아!”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유선우가 귓구멍을 후비며 한숨을 쉬었다.
“쟤부터 해결해야겠네.”
“어쩌려고요?”
“취하면 다 때려 부수는 놈들이 가끔 있어요. 알죠?”
“…그런 주사가 있긴 한데. 왜요?”
의아한 물음에 유선우는 창을 집어넣고 손을 탈탈 털었다.
“신기한 게, 그놈들은 처맞으면 정신을 차려요.”
유선우가 주먹을 쥐었다. 살벌한 모습을 보며 박아연은 쉬발의 푸념을 떠올렸다.
어쩐지 쉬발이 조금 불쌍해졌다. 그의 빛나는 눈동자가 애처롭게 보였다.
***
“끄으응….”
쉬발은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깨어나자 전신이 비명을 질러댔다. 꼬리까지 얼얼한 감각에 어릴 적
아버지에게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 아버지….”
수백 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추억하자 가슴이 아려왔다. 감상에 젖은 쉬발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앉
았다.
“슬슬 정신 차리지?”
쉬발의 등짝에 올라탄 유선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쉬발은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몸을 꿈틀거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누가 널 세뇌하려 했던 것 같더라.”
“…제가 세뇌요? 인간에게?”
혼란스러운 음색이었다. 쉬발은 자신이 고작 인간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한 건 아니야.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 저항하다가 반쯤 정신 놨다고 보면 돼.”
쉬발의 몸속에선 간섭력이 실타래처럼 꼬여 있었다. 세뇌에 저항한 결과였다. 그러나 완벽히 막아내지는
못해 내부를 어지럽혔다.
이는 상성의 문제였다. 용의 육체가 강건할지라도 간섭력에 대한 저항력마저 뛰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단순한 전투였더라면 쉬발이 손쉽게 꺾었을 터. 빈틈을 찔린 게 패인이었다.
“한 가닥 하는 놈이었던 모양이다.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기색이 아니었다. 눈에 띄게 시무룩한 태도에 유선우가 등을 토닥여줬다.
“박아연 씨한테 들었어. 불만 많았다며? 내가 미안하다.”
“예, 예?”
“생각해보면 너무했지. 데려와 놓고 집안에만 묶어뒀으니. 계속 폴리모프한 상태로 있었으니 답답하기
도 했을 거고.”
쉬발이 침묵한 채로 목만 위아래로 기울였다. 유선우의 말대로 용이 인체로 지낸다는 건 불편한 일이었
다.
“일단은 이 상태로 있어도 돼.”
“괜찮습니까?”
쉬발도 요 며칠간 현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거리 한복판에 용이 돌아다니는 게 정상이 아님
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선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기도 많이 먹여줄게.”
“……제 입맛은 까다롭습니다.”
“여기 음식 익숙해지면 돌아가기 싫어질걸.”
유선우는 피식거리며 비늘이 빈 부분을 쓰다듬었다.
“비늘 상태도 엉망이네. 전에 오르시아 피 챙겨둔 것도 나눠줄게.”
“끄흑, 끄윽…. 끄흐으윽!”
온화한 음성에 쉬발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고통을 전부 덜어낼 수는 없었으나 보상받은 기분
은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큼직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유선우는 눈알만 굴려 바닥을 내려봤다. 시험관처럼 생긴 용기를 쥔 박아연이 보였다. 그가 그녀에게 눈
짓으로 지시했다.
‘담아요.’
그러자 박아연의 시선이 쓰레기를 보는 눈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무언으로 질책하면서도 유선우가 건네
준 용기에 용의 눈물을 담았다.
총 여섯 병.
좋은 수확이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지 않겠냐.’
유선우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억눌렀다. 그의 기준에선 이 정도가 등가교환이었다.
이동하기에 앞서 유선우는 박아연에게 용기를 돌려받았다. 채집할 때처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덕분에
쉬발에게 들키지 않고 용의 눈물을 얻어낼 수 있었다.
“슬슬 가자.”
안면몰수한 유선우는 쉬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쉬발은 요란하게 코를 들이마시면서 움츠린 몸을 폈
다.
“우선 내려와 주시죠. 다시 폴리모프를-”
“내 말 안 들었어?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니까.”
“아니, 문제 생기는 거 아닙니까?”
“뭐 어때. 네가 편한 게 중요한 거지.”
시원시원한 말에 쉬발의 가슴이 울컥거렸다. 그는 호의를 받아들여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마저 쓸어야지. 후딱후딱 끝내자.”
유선우는 박아연과 김한영에게 시선을 보냈다. 얼른 올라타라는 재촉이었다.
“저, 저기. 아저씨 괜찮은 거예요?”
김한영은 혼란스러워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그는 쉬발이 적에게 당해 몬스터화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
었다.
“괜찮아 보이네.”
박아연은 건성으로 넘기며 김한영을 이끌었다. 일일이 설명해주기가 귀찮았다. 그녀도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
유선우는 쉬발을 타고 소탕을 재개했다. 서부를 완전히 궤멸시켰고, 중부를 끝마칠 즈음에는 아이릴과
리디와도 합류했다. 북부를 처리하면 이번 일도 일단락되는 셈이었다.
“이상하다, 특이한 놈이 안 보이네.”
“하는 짓들은 하나같이 악마 같은데 말이에요.”
“실력자가 하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들었어. 그냥 아직 못 만난 건가.”
유선우가 가진 정보도 김정수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었다. 물론 확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김정수의
정보력을 믿었고, 확신할 만한 소재도 있었다.
‘확실히 비정상적이야.’
서울을 점거한 각성자의 수가 네자릿수를 가볍게 넘었다. 절대로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머
릿수 외에도 특이한 점은 있었다.
‘쓰는 능력들이 비슷하다고.’
일행들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전부 같지는 않으나 특정 능력을 사용하는 비율이 크다던가.
눈에 띄는 점인데도 불구하고 유선우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각성자들의 능력을 볼 새도 없이 죽였기
때문이었다.
“뭔가가 있는 건 분명한데.”
“성북구예요. 제가 있던 곳이랑은 멀어서 잘 모르지만… 그쪽 소문은 들었어요.”
“무슨 소문?”
“구청 근처에 귀신이 산대요. 저번에 헌터들이 왔을 때도 그놈이 다 죽였다고 그랬어요.”
김한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의연한 척해도 아직 어린 나이다. 고작 며칠 만에 두려움을 떨쳐낼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괜찮고?”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김한영은 어색하게 마주 웃을 따름이었다. 그의 눈에는 유선우들이 더욱 귀신처럼
보였다. 어째선지 두렵지는 않았지마는.
일행은 김한영의 안내대로 성북구로 향했다. 지도를 살피며 구청으로 이동하자 기괴한 건물이 있었다.
“선우, 저게 뭐죠?”
다 쓰러져가는 빌딩이었다. 그 자체는 전혀 새롭지도 않았지만 외견이 특이했다.
겉면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시뻘겠다. 붉은 물감으로 페인트칠한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특이한 것은 색깔뿐이 아니었다. 건물에 웬 줄이 무질서하게 칭칭 감겨 있었다.
“피랑… 내장이네. 가지가지 한다.”
피를 칠해두고 내장을 묶어 줄처럼 감아뒀다. 저 외관을 연출하는 데 낭비된 목숨만 수백을 헤아릴 터였
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미친놈임이 틀림없었다.
“으, 기분 나쁩니다.”
“동감이에요. 토할 것 같아.”
잔혹한 장면에 익숙한 아이릴과 리디도 낯빛이 어두웠다. 김한영과 박아연은 애써 헛구역질을 참아내고
있었다.
“형님, 어쩌시겠습니까?”
“박아연 씨. 미안한데 정령 보내서 정찰 좀 해줘요. 인질 있는지 없는지만.”
“아, 알았어요.”
박아연은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오른손을 휘적거렸다. 몇 줄기의 바람이 흘러가 건물 내부를 돌아다
녔다. 정령사는 이런저런 방면에 쓸모 넘치는 편리한 존재였다.
“확실하게는 모르겠는데, 산 사람은 한 명밖에 안 보여요. 인질은 아닌 것 같아요. 저 이제 토해도 되는,
우웁!”
“내 비늘에 묻히지 마라, 제발.”
“우우우웁!”
박아연이 쉬발의 등에 바짝 엎드린 채 바닥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벌린 입안에서 토사물이 튀어나왔
다. 질척한 위액이 햇볕에 반짝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쉬발, 너도 토해.”
“예? 전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니, 그게 아니라.”
유선우가 건물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지시했다.
“브레스 갈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