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가 아니다. 요 며칠간 줄곧 생각해온 일이야.”
불평은 금세 푸념으로 돌변했다. 시기가 좋지 않았으나 박아연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쉬발의 태도
가 심각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도 이곳저곳 넘어 다녔으니까. 이해해요.”
“아니, 달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인간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자괴감이 든단 말이다!”
쉬발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한이 서린 목소리가 적막한 병원에 울려 퍼졌다.
“난 긍지 높은 용족으로 태어나 성공 가도를 밟아온 엘리트란 말이다, 엘리트! 알겠나?”
“…네. 대단하시네요.”
“그래, 대단하고말고. 그런데 형님… 아니, 그 악마가 나타난 뒤로는 내 삶이 망가졌다!”
불끈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보통 원한이 아닌 모양이었다.
“요즘 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아나? 그 망할 빨갱이 년한테 협박당해 비늘을 빼앗기고 산다!”
“빠, 빨갱이… 리디 씨요? 뭐 어떤 식으로 협박하길래.”
“그냥 야한 영화 하나 봤다가 걸린 게 전부다! 인간들 짝짓기 좀 봤다고 왜 지랄인지.”
참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요즘 중고등학생도 잘 안 할 고민을 수백 살 먹은 용족이 하고 자빠졌다.
“그 정도야 배 째라 하면 되죠.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종족도 다른데.”
“나도 내가 왜 쪽팔린 건지 모르겠단 말이다!”
아무래도 뒤늦게 사춘기가 온 모양이었다. 박아연은 그러시구나, 하고 대충 대답했다.
“성녀한테는 야구 보면서 훈수 두는 틀, 뭐야. 하여튼 틀 뭐시기라고 멸시당한다.”
“……그래서요?”
들을수록 박아연의 표정에 떫음이 더해졌다. 슬슬 어울려주기도 힘들었다. 김한영은 무슨 개소린지 모르
겠다는 듯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런데도 형님… 아오!”
쉬발은 말하다 말고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는 절로 형님 소리가 튀어나오는 입이 원망스러웠다.
“그놈은 지 제자라고 챙기고, 지 여자라고 챙기고. 항상 나만 무시한다. 그런다고 내가 별수 있나?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래서 오늘도 따라온 것이다.”
“일단 억하심정은 알겠어요. 근데 지금이랑은 별 상관없지 않나요? 몬스터 잘 잡다가 뭐가 불만이에요?”
“다 짜증 난다! 인간들이 내 엉덩이에 총알인지 불알인지를 꽂질 않나, 만나는 새끼마다 쳐다보면서 처웃
질 않나. 이젠 X 같은 몬스터들까지!”
쉬발이 콧김을 푹푹 내뿜었다. 그가 화를 참다못해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더는 못 참겠다! 빌어먹을 새끼들!”
쿠우우웅!
쉬발의 몸이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낯익은 현상에 박아연이 경악해 소리질렀다.
“자, 잠깐만요! 정신 나갔어요!?”
“지금 뭐예요?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라 부르지 마라아아아아아!”
쉬발의 본체가 서서히 나타나며 벽과 천장을 붕괴시켰다. 건물 전체가 지진 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 박아연이 능력을 사용해 벽을 터뜨렸다.
“꽉 잡아!”
“으, 으아아아아악!”
박아연은 김한영을 끌어안은 채로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낙하하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
다. 그곳에선 위용 넘치는 흑룡의 거체가 병원을 죄다 날려버리고 있었다.
“저런 또라이가…….”
가볍게 착지한 박아연이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때 반파된 건물에서 웬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놈
이 허공을 날아 쉬발에게 다가갔다.
“저건 또 뭐야.”
괴인이 쉬발의 몸체에 올라탔다. 그러자 열이 뻗친 쉬발이 몸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병원이 무너지면서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거센 충격에도 괴인은 쉬발의 목에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꺼져, 꺼져라! 하찮은-”
츠즈즛!
돌연 괴인에게서 거친 스파크가 일었다. 전류가 쉬발에게 옮겨가 머리부터 꼬리까지 급속도로 왕복했다.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멀뚱멀뚱 쳐다보던 박아연은 정신이 번쩍 들어 허공으로 도약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괴인의 모습이 선명
하게 보였다.
‘…사람이 맞나?’
괴이한 생김새였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팔다리, 살구색에 녹색과 푸른색이 섞인 피부. 마치 자신의 신
체에 몬스터의 사지를 이식한 듯했다.
박아연은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먼저 근처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다. 김한영을 내려놓고 손을 뻗
어 놈을 조준했다.
‘좀 참아요.’
따악!
손가락을 퉁기자 쉬발의 목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괴인에게도 명중했으나 피해는 없는 낌새였다.
놈이 가소롭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지만 여유는 잠시뿐이었다. 연기에서 돌연히 불꽃이 피
어올라 놈의 전신을 뒤덮었다.
“끄으윽…!”
타격이 있었는지 몸이 휘청거린다. 다행히도 쉬발은 비늘 몇이 녹아내린 정도로 끝났다.
‘미안해요!’
박아연은 다시금 속으로 사과하면서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폭발이 터지기도 전에 놈이 뛰어올라 그대
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한영아, 잠깐만 여기 있어.”
“누나는요?”
“저거 잡고 금방 올게.”
박아연이 손을 휘적거렸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다리에 휘감겼다.
그녀는 날렵한 발놀림으로 지면을 차 놈을 추격했다. 쉬발을 지나치려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박아연을
향했다.
부우웅!
기다란 꼬리가 박아연에게 휘둘러졌다. 박아연은 당황하면서도 발밑에 상승기류를 만들어 급히 회피했
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공중에 붕 뜬 채로 쉬발을 응시했다. 입에서는 그르르,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흘러나왔다. 큼
직한 눈동자에선 지성이 엿보이지 않았다.
‘진짜 미쳐 돌아가네.’
박아연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
“아, 짜증 난다.”
유선우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폐공장에서 나왔다. 그의 뒤편에는 급소가 베이고 터져 나간 시체들
이 가득했다.
“아니, 대체 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 …그러게. 왜 이렇게 많지? 서울에 있는 애들 다 합치면 한국 전체 각성자 중 1/5은 되겠다.
엔라도 질린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유선우가 죽인 각성자만 이미 삼백이 족히 넘어갔다.
조직들이 서울 전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면 엔라의 말도 마냥 과장은 아닐 터였다.
“대표님이 분명 숫자는 적댔는데. 이게 어딜 봐서 적은 거야.”
- 좀 이상하네. 음….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 혹시 각성자 양산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엔라가 반신반의한 투로 의견을 냈다. 확실치는 않았으나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모두가 선민의식을 가져
서울로 흘러온 각성자라기에는 숫자가 부자연스럽게 많았다.
“그게 가능해? 아브나바도 못한다며.”
- 나처럼 각성시키지는 못한다는 뜻이지. 하려면 못할 것도 없어.
“또 뭔 소리야.”
- 나는 파장 맞는 사람들한테 무작위로 간섭력을 넣어줬던 건데… 그냥 욱여넣을 수도 있다는 거야.
유선우는 엔라의 설명을 제 나름대로 이해했다. 하지만 원체 추상적인 탓에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었
다.
“커피잔에 콩나물국 붓고 그런 건가?”
- 응, 아니야.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말을 얄밉게 하냐.”
멋쩍은 말에 엔라가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설명을 보충했다.
- 그런다고 잔이 깨지진 않잖아. 이거는 파장이 맞으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억지로 넣으면 그
릇이 망가져.
“대충 알겠다. 근데 지구 관리자도 아닌데 그런 권한이 있나?”
- 관리자가 직접 한다기보단 큰 간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그럴 수도 있어. 그 뭐야. 방사능처럼.
“큰 간섭력이라.”
유선우는 주변을 탐지하고자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들려오는 소리도 느껴지는 기운도.
걸리는 게 너무도 많았다.
‘일단 이쯤에서 연락이나 돌려둘까.’
유선우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던 구체를 꺼냈다. 마력을 흘리자 구체가 청명한 울음을 뱉었다. 은은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모습이 제법 신비로웠다.
‘남들 등쳐먹기 딱 좋겠는데.’
예지랍시고 몇 마디 떠들어주면 한 번에 5만 원씩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잡생각을 품으면서 유선우가
연락을 넣었다.
“아, 아. 들려?”
마이크 테스트하듯이 말하고는 조용히 기다렸다. 대기하기를 수 초가 지나자 대답이 돌아왔다.
- 그거 꼭 하더라고요. 들리는 거 알면서.
가장 먼저 답신한 이는 아이릴이었다.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음질이 깨끗했다. 괜히 고급품이 아닌 모
양이었다.
“확인 안 하면 기분이 안 살잖아. 상황 어때?”
- 굉장히 짜증 나요. 이 사람들 다 뭐예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얼마나 진행했어?”
- 우선 들었던 거점은 거의 끝냈어요.
아이릴은 남부의 일부와 동부지역을 맡았다. 아직 시작한 지 1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대단한 성과
였다.
“벌써? 빠르네. 특이한 건 없지?”
- 다 고만고만한 것들뿐이에요. 눈에 거슬리는 건 많지만.
아이릴이 혐오감이 뚝뚝 묻어나오는 음색으로 말했다. S급으로 판단된다던 놈은 그녀가 맡은 곳엔 없었
던 듯했다.
- 저도 대부분 정리했습니다.
다음으로 보고한 것은 리디였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의 사이사이에 특이한 소음이 끼어들었다.
- 허억, 허어어억!
남성의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정도가 심각해 5분만 지나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거 뭔 소리야? 누구랑 같이 있어?”
- 길잡이입니다.
- 웁, 우웨에엑!
- 아, 지금 제 발에다 토했습니다. 슬슬 처리하고 다른 놈으로 갈아타야겠습니다.
“……그러던가. 마무리하면서 내 쪽으로 와.”
유선우가 찝찝하다는 어조로 지시했다. 다음으로는 마지막 인원을 호출했다.
“박아연 씨?”
- …….
대답은 없었다. 두 번을 더 불러봐도 여전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선우의 인상이 구겨졌다.
‘어떻게 된 거지?’
지난번에 본 결과 박아연도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헌터 등급으로 따지자면 S급보다 약간 떨어지는 정
도일까.
이번 일에 동참하기에 부족한 실력은 절대 아니다. 확신이 있었기에 데려온 것이다.
더해서 쉬발까지 있으니 만약의 일은 생기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반응은 여전히 없다. 어떠한 문제가 생긴 것은 틀림없었다. 유선우의 걱정이 더해져 갈 즈음, 다
행히도 대답이 돌아왔다.
- 적당히 하라고요, 미친 새끼야!
구체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흘러나왔다. 유선우의 표정이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죄송합니다?”
- 선우 씨한테 한 소리 아니에요!
“근데 왜 짜증을 내요?”
- 지금 상황이 좀 여의치가 않, 아서!
콰아앙!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전해져 왔다. 듣기로는 한창 전투 중인 모양이었다.
- 크르르르!
- 아오, 열 받아. 미안한데 선우 씨가 좀 와줘야 할 것 같아요.
도움을 요청하는 어조가 퍽 히스테릭했다. 근래에는 박아연의 성깔이 잠잠해졌기에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알았어요. 정확히 무슨 상황인데요?”
- 쉬발 씨가 날뛰고 있어요.
***
유선우는 연락을 받자마자 박아연에게 향했다. 급한 마음에 속력을 내자 도착은 금방이었다. 통신기의
좌표 추적 기능을 이용한 덕에 헤맴 또한 없었다.
달리고 달려 나타난 장소는 난장판이었다. 주변에는 부서진 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본래 어떤
건물이었는지도 알기 힘들 지경이었다.
유선우는 건물의 잔해를 밟으며 걸었다. 그러면서 가장 개판인 장소를 쳐다봤다. 그곳에선 쉬발이 육중
한 몸을 이끌어 쿵쾅거리고 있었다.
“가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