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유선우와 소피아는 김한영을 데리고 서울을 벗어났다. 복귀하는 길도 귀찮은 일 하나 없이 순조로웠다.
전적으로 아티팩트 덕분이었다.
성가신 일은 앞으로 벌어질 예정이었다.
“혹시 도와줄 생각 있어요?”
차 안에서 유선우가 소피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알 것 같긴 한데 일단 물어나 볼게요. 뭐를요?”
“누나가 미국에서 하던 거요.”
“글쎄요….”
소피아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물론 방금 본 비인간적인 참극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싸그리 청소하
는 게 세상을 밝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맘 같아선 도와주고 싶어요. 근데 여기는 한국이잖아요.”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확률이 높았다. 더불어 소피아는 능력자 관리부에 소속된 헌터다. 그녀가 움직인
다면 미국에서 간섭한다는 인상을 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그렇죠.”
유선우는 실망도 없이 순순히 납득했다. 처음부터 별로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전력이 모자라다면 아
쉬웠겠다마는, 지금도 승산을 점치기엔 충분했다.
차는 다시 청일을 향해서 도로를 달렸다.
유선우는 바깥을 바라보며 고심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행동 자체는 이미 결심했다. 문제는 대대적으로 움직일지, 개인적으로 움직일지의 양자택일이다.
전자를 택하면 굉장히 귀찮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군대와 제휴해 계획을 수립하고, 헌터는 할당량을
부여받을 터. 그러는 와중에도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
행동일시는 자연스레 늦어지기 마련. 당연히 아이릴들을 활용하기에도 불편해질 것이다.
‘편하게 가자, 편하게.’
직접 처리하면 단숨에 끝난다.
과격한 수단이니만큼 후폭풍이 거세겠지마는.
‘근데 뭐 어쩌라고.’
문제라면 항상 끌고 다녔다.
***
유선우는 곧바로 서울을 치지는 않았다. 그밖에도 해야 할 일이 수두룩했다.
계좌 동결을 해제했고, 폰을 개통했다.
침대 등 필요한 가구도 새로 들였다.
인터넷도 가입해 431-9 차원 촌놈들에게 신문물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현대인의 삶을 되찾은 것이다.
“언제까지 드라마만 볼 거지? 야구는 안 하나?”
“용도 그런 걸 좋아합니까?”
“음. 축구라는 것도 볼 만하더군. 프로라는 것들이 좀 답답하긴 하지만.”
“그럼 직접 뛰시든가요. 대사 안 들리니까 조용히 해요.”
셋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보기에 퍽 우스운 모습이었다. 헌터 일만 시켜도 수억씩
벌어올 강자들이 TV 하나를 두고 다투니 말이다.
‘헌터 일이라. 계약도 해야 하는데.’
클랜과의 계약. 진작에 만료됐으니 재계약을 할 필요가 있다. 유선우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청일에서 일
할 셈이었다.
‘클랜 새로 만드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재미보다는 귀찮음과 쓸데없는 노고가 클 게 뻔했다. 대우 좋은 청일에서 자유롭게 다니는 편이 훨씬 나
았다.
‘일부터 끝내고 하는 게 좋겠지.’
경력에 한 줄이라도 추가하고 계약한다면 대우가 더 좋아질 터였다. 이 이상 올라갈 위치가 있겠냐마는.
어쨌든 천천히 마쳐도 되는 일이었다.
“형, 점심 뭐 먹어요?”
유선우의 옆에 앉은 김한영이 물었다. 서울에서 탈출한 그는 유선우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의지할
가족이 전부 서울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거 골라. 배달시키게.”
“비싼 거 먹어도 돼요?”
“뭐?”
“굽네요. 고추바사삭.”
김한영이 자못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전부터 흙수저였던 그에게 프랜차이즈 치킨은 편의점 아이스
크림만큼이나 비싸게 느껴졌다.
유선우가 피식거리며 스마트폰을 던져줬다.
“순살로 시켜.”
“수, 순살….”
군침을 삼킨 김한영이 허겁지겁 배달 앱을 켰다. 유선우는 그런 그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듣기로 김한영은 이제 12살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에 참혹한 일을 겪은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수한 면이 눈에 띄었다. 아침마다 눈이 부어 있기는 하더라도 겉으로나마 밝게 행동한
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근데 우리 집이 어쩌다가…….’
27살 나이에 4명을 부양하게 생겼다. 돈이야 썩어 넘치니 문제는 없다마는. 기분이 싱숭생숭한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우우웅.
문득 스마트폰의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 전화 왔어요.”
“누구?”
“박아연이라는 사람이요.”
“줘봐.”
치킨을 장바구니에 담던 김한영이 입맛을 다시며 폰을 건넸다. 유선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이제 곧 도착하니까 슬슬 나와요.
박아연도 서울행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딱히 유선우가 강제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것이라 말했을 뿐.
오히려 그는 끼지 않는 편이 낫다고 설득했었다. 투라우마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 본
인의 의사가 굳건했다.
“그냥 들어와요. 밥이나 먹고 천천히 갑시다.”
- 어라. 오늘은 안 바쁜가 봐요?
박아연의 질문에 유선우는 일정을 떠올렸다. 스케줄이 없지는 않았다. 저녁에 차세정과 만날 약속을 잡
아두었다.
“약속이 있긴 한데. 널널해요.”
6시간은 남아 있었다.
서울을 청소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점심을 먹은 뒤에 유선우는 대략적인 브리핑을 진행했다.
작전의 골자는 간단했다. 서울로 이동해 김정수와 김한영의 정보를 토대로 테러리스트들의 거점을 공략
한다.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단숨에 제압하면 끝.
맥 빠질 정도로 단순한 작전이었다.
“그게 다예요?”
“쉽죠? 동선만 외우면 돼요.”
“인원은 어쩌시겠습니까?”
경청하던 리디가 물었다. 유선우는 잠깐의 고민을 거쳐 대답했다.
“너랑 나, 아이릴은 단독으로 움직이고, 박아연 씨는 쉬발이랑 둘이 짜세요.”
“상관은 없는데… 왜요?”
“이 중에서 제일 약하니까요.”
직구에 박아연이 떨떠름한 낯을 지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한편 쉬발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었다.
“절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맞잖아, 왜.”
“맞잖아요. 이상한 트집 잡지 마세요.”
유선우의 말에 아이릴이 맞장구쳤다. 그럴수록 쉬발의 표정에 언짢음이 더해갔다.
“이거 서열 정리 한 번 해야겠습니다. 제가 펠리시르 님보단 못해도 2인자입니다, 2인자.”
“알아. 그래서 약하다는 거야.”
용족의 2인자는 절대 무시당할 위치가 아니다.
유선우를 제외하고, 순수 전투력만 따질 경우에 431-9 차원의 최강자는 바로 용왕이다. 그런 인물의 뒤
에 서는 쉬발이 어디 가서 약하다고 폄하될 사람은 아니었다.
“설칠 데가 따로 있지, 인마.”
하지만 비교 대상이 문제다. 431-9 차원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학계의 정설이 있다.
대륙은 용왕과 성자 혹은 성녀, 흡혈여왕과 요정여왕의 4강 체제라는 것.
이 자리에는 이번 대의 성녀가 있다.
또 리디는 어떠한가. 그녀는 오르시아를 꺾은 전적이 있는 생태계 파괴자다. 431-9 차원에서 한 손안에
꼽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고작 용족의 2인자에 불과한 쉬발이 설칠 상황이 아니었다.
“서열 정리는 동의합니다.”
리디가 몸을 일으키며 자못 진지하게 내뱉었다.
“치녀에게 리모컨을 빼앗기는 것도 슬슬 짜증나던 참이었습니다.”
“치, 치녀? 지금 말 다 했어요?”
아이릴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뾰족한 목소리에도 리디는 굴하지 않고 콧방귀만 뀌었다.
“당신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뭡니까, 찔립니까?”
“뭔 소리예요? 집안에 여자가 둘밖에 없는데!”
“쉬발도 암컷일지 모릅니다.”
“지랄하지 마라!”
또 싸우고 자빠졌다. 유선우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옅은 웃음을 흘렸다. 이 풍경에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따가 보면 알겠지.”
“안 봐도 알지 않습니까. 전 수컷입니다!”
“그거 말고. 서열 정리하겠다며?”
중요한 건 일신상의 무력이 아니다.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의 문제.
유가네는 성과제 사회다.
***
유선우는 식구를 전부 데리고 현관을 나섰다. 며칠 만에 외출하는 탓인지 면면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
다. 쉬발도 지구에 대한 두려움을 상당 부분 덜어낸 모양이었다.
여섯은 박아연이 끌고 온 차에 올라탔다.
든든하게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는 일할 때였다.
“저기, 선우 씨?”
“네?”
“새삼 묻는 건데, 이러면 안 되지 않나요?”
운전대를 맡은 박아연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이릴들을 가리켰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들은 적잖은 명성
을 얻게 될 터. 숨어 사는 데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분명 알려질 텐데. 숨기기 힘들지 않을까요?”
“저도 처음엔 걱정 좀 했었어요. 근데 생각할수록 쓸모없더라고요.”
“왜요?”
“걸리든 말든 뭐 어때요.”
3년간 세상은 큰 폭으로 변화했다. 범죄자와 몬스터가 판치고, 국가는 반쯤 무너졌다.
법의 망치는 낡았다.
펜보다는 주먹이 강한 시대다.
신분이 없을지라도 그들은 강자였다.
“막말로 지들이 뭐 어쩔 거야. 잡아간답니까?”
“…진짜 막말인데 반박은 못 하겠네. 알았어요.”
박아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도 유선우의 막무가내식 행동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예 헌터로 삼아도 괜찮을지도 모르죠. 대표님이 좀 고생하시겠지만.”
“조금 정도로는 안 끝날걸요.”
“그 대신 클랜에 도움도 많이 되잖아요.”
유선우는 대화하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이내 신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 번 만에 연결되고는
중후한 목소리가 차내에 흘렀다.
- 무슨 일이십니까?
“어, 지금 제가 서울로 가고 있거든요?”
- …예? 어디요?
“서울이요. 죄송한데 사람 좀 파견해주세요.”
- 잠시만요. 병력을 보내 달라는 겁니까? 치시겠다고요?
“병력보다는 인질 구출조요.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인솔하긴 귀찮아서.”
유선우는 산책이라도 나가듯 태평했다. 반면 김정수는 혼란스러운 기색이 뚜렷했다.
-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당장 멈춰주십시오. 이번만큼은 제 말 들으셔야-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피해 줄이려고 하는 짓이니까. 빚은 재계약으로 갚을게요.”
유선우는 그럼, 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제멋대로이기 그지없었다. 통화 내용을 유추한 박아연
이 한껏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을지는 모르겠는데, 말했잖아요. 피해 줄이려는 거라고.”
“피해가 아니라 귀찮음 줄이려고겠죠.”
박아연이 질린 듯이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유선우가 키득거렸다.
“잘 아시네. 근데 영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저희가 움직이는 게 훨씬 나아요.”
“어느 면에서요?”
“정부나 클랜들은 게이트 때문에 손을 돌릴 여유가 없어요. 병력을 투입한다 쳐도 피해가 클 게 뻔하고.
잘못하면 인질까지 다 죽을 수도 있죠.”
테러리스트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데도 아직도 진압하지 못한 이유. 그것은 나라 꼴이 시궁창이기 때문이
다.
안 그래도 개판인 상황인데 나라 한복판에 폭탄이 내려앉아 있다. 건드리기에는 부담될 수밖에 없다.
“능력만 있으면 어지간한 일은 소수로 진행하는 게 편하고 좋아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우린 지금 사람 잡으러 가는 거예요. 그것도 독단으로.”
“인질들이 잘 증언해주겠죠.”
더해서 헌터에게도 테러범들의 사살 지시가 떨어진 상태다. 유선우와 박아연은 현재 청일과의 계약이 해
지되었으나, 자유 헌터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소속은 없어도 어쨌든 헌터라는 뜻.
그들에게도 적용되는 지시임에는 틀림없었다.
“저도 아주 생각 없이 달려드는 건 아니에요. 논란이야 당연히 생기겠지만.”
유선우는 남들의 비난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불씨를 지피고 장작을 던질 뿐이다. 모닥불의 곁에서
열을 쬘 예정은 없다.
차는 도로를 달려 서울에 도착했다.
박아연은 봉쇄된 길을 엿보면서 물었다.
“어쩔 거예요?”
“어쩌기는요.”
유선우는 차 문을 열어젖히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쉽게도 투명 망토는 하나밖에 없다. 변장 반지도 모자
라니 별수 있나.
“월담 해야죠.”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다.
다소 막 나가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