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유선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쩔 거예요?”
고문인지 유희인지 잘 모를 장면을 지켜보던 소피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동요한 기색도 없이 담담
했다.
미국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이런 광경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흥분하기에는 새삼스러웠다.
“그러게요.”
유선우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거실을 둘러봤다. 감각을 곤두세워도 감지되는 것은 없었다.
바깥에 깔려 있던 눈도 건물 안까지는 살피지는 않는 듯했다. 여자들도 감시를 피해 이곳까지 들어온 것
이리라.
“음.”
유선우는 턱을 매만지며 처리를 고민했다.
죽이면 귀찮아질 우려가 있다.
반면 내버려 두기엔 그냥 짜증이 난다.
양자택일의 저울질은 금세 끝이 났다. 유선우가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채로 거리를 좁혔다. 그가 소년의
살갗을 벗기고 있는 여자에게 팔을 뻗었다.
콰악!
“꺄아악!”
허공에 나타난 손이 여자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가축을 다루듯이 난폭한 행동이었다. 칼을
놓친 여자가 빽빽 소리쳤다.
“어떤 새끼야! 놔, 이거 놔!”
“뭐, 뭐야!”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유선우가 팔을 휘둘렀다. 살찐 여자의 거구가 허공을 날았다. 머리가 벽에 처박히
고 바닥에 축 널브러졌다.
“이럴 줄 알았어. 적당히 하라니까!”
습격을 눈치챈 여성 하나가 줄행랑을 쳤다. 그녀는 다섯 걸음을 채 내딛지도 못했다. 목덜미에 서늘한 감
촉이 닿나 싶더니, 눈앞이 암전했다.
둘로 분리된 몸이 지저분한 유리조각 위를 뒹굴었다. 그 참혹한 모습을 지켜본 한 여자가 자리에 털썩 주
저앉았다.
“으, 으으……”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이 죽었다. 동료의식 따윈 애초부터 없었으나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 살려주세요!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여자가 물기 섞인 목소리로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손가락이 튀어나
왔다.
손가락은 느릿하게 움직여 한 방향을 가리켰다. 여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곳을 쳐다봤다.
빼돌린 인질이 보였다. 입을 틀어막은 테이프 사이로 거품이 새어 나왔다. 언뜻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
았다.
“저년이 했어요. 인질 빼돌린 것도, 저렇게 만든 것도 다 저년이라고요!”
여자가 벽에 처박힌 시체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변명을 듣는 유선우는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이런 새끼들은 꼭 있더라.”
뻐억!
유선우가 여자의 턱을 가볍게 걷어찼다. 힘 조절을 했기에 머리가 터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치아가 서너
개 날아간 채 기절했다.
마지막 하나까지 정신을 잃자 거실이 잠잠해졌다. 유선우는 망토를 벗곤 쓰러진 여자를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데리고 가기는 귀찮겠죠?”
“…….”
“누나?”
“네? 아, 네.”
재차 묻고 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당황해하는 소피아에게 유선우가 물었다.
“왜 그렇게 넋 나갔어요?”
“음… 글쎄요.”
소피아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그녀는 유선우의 잔혹한 행동에 적잖이 동요했다.
윤리를 들먹이며 탓할 생각은 없었다. 살면서 봐온 결과, 세상에 죽어야만 하는 사람은 썩어 넘쳤다. 윤리
의식도 사람을 가려서 적용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냥 되게 익숙해 보여서.”
단순히 벌레 잡듯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어색할 뿐이었다.
“실제로 익숙한데요, 뭘.”
유선우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가 여자의 머리를 발로 건드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떻게 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경력자잖아요.”
농담 같은 말에 소피아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녀는 땅바닥에 누운 여자와 묶여 있는 소년을 번갈아 봤다.
“데려가는 건 저 아이로 하죠.”
“이 여자는? 말 들어보니까 꼬리 달린 모양이던데.”
“잠시만요.”
소피아는 여자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녀가 마나를 끌어 올리자 손에서 백광이 피어올랐다.
휘황한 빛이 여자의 몸을 말끔하게 집어삼켰다. 흔적이라곤 뼛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피까지 치우기는 힘들겠고… 시체는 그냥 내버려 둬야겠어요. 내분한 것처럼 보이게.”
소피아의 의견에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슬슬 귀찮아져 다 부수고 싶었으나 지금은 참아야 했
다. 인질도 있으니 다음 기회에 일제히 소탕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얘도 상태가 안 좋네요.”
소피아가 소년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새 정신을 잃었는지 눈이 까뒤집혀 있다. 당장 치료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내버려 두면 1시간도 못 살 것 같은데.”
맞장구친 유선우가 아공간 주머니를 뒤졌다. 용기 하나가 그의 손에 잡혔다. 오르시아의 피였다.
“그건 또 뭐예요?”
용기를 꺼내자 소피아가 관심을 보였다. 유선우는 뚜껑을 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만통이요.”
“만통?”
“만병통치약.”
“뭘 그런 걸 줄여서 말해요?”
“메플 좀 해본 사람은 다 알아들어요.”
뚱딴지같은 말에 소피아가 눈을 찌푸렸다. 반신반의하게 용기를 쳐다보던 그녀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투
명 망토도 가지고 다니는데 못 믿을 것도 없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귀한 거 아니에요?”
“한 방울 정도는 괜찮아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한 방울로도 충분할 터였다. 용왕의 탈모는 한 병으로도 완치할 수 없었지만.
“회복되면 정보원으로 써먹을 수 있겠죠. 그리고 전 애들 좋아하거든요.”
“그래요? 의외네.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중딩부터는요.”
유선우는 잡담을 나누면서 소년의 입을 막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드러난 입을 벌려 오르시아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끄으으으으!”
소년이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유선우는 침착하게 소년에게 망토를 덮어씌웠다. 소리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선우, 얘 왜 이러는 거예요?”
“굉장히 쓴 약이라서요.”
약에는 무릇 부작용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 오르시아의 피도 마찬가지다. 연약한 인간이 복용할 시에는
몸이 터져 죽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에는 살든지 죽든지 제 팔자라는 뜻이다.
“그냥 기다려 봐요.”
유선우는 바닥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5분가량이 지나고 난 뒤에야 망토를 벗겨냈다.
나타난 소년의 외관은 방금과는 달리 말끔했다. 벗겨진 살가죽도 재생되어 앳된 얼굴이 보였다. 처참하
게 폭사로 끝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와. 혹시 그 약 팔 생각 없어요?”
“글쎄요. 아쉽게도 돈이 궁하지는 않아서.”
“만약 팔 거면 꼭 저한테 얘기해요. 값 제대로 쳐줄 테니까.”
“생각해보고요.”
유선우는 매끄러운 얼음을 만들어 소년의 목덜미에 문질렀다.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이 뜨였다. 휘둥그레 뜬 눈이 유선우와 소피아를 정신없이 오갔다.
“누, 누구세요?”
“뭐야. 내 얼굴 몰라?”
시선이 유선우의 얼굴에 집중됐다. 근 몇 년간 시들시들했으나 대통령 버금가는 유명인. 늙지도 않았으
니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선우?”
“한 번만 봐줄게. 앞으로 반말하면 맞는다.”
못마땅하게 말한 유선우가 소년의 구속을 풀어줬다.
“이름은?”
“기, 김한영이요.”
“그래. 대충 상황은 알겠지?”
질문하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수라장에서 아득바득 살아온 사람이다.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잘됐네.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잠깐만요. 더 들어가려고요?”
“네. 떨거지 말고 집단 한둘쯤은 보고 싶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괜히 기분만 나빠질걸요.”
“정찰하러 온 거니까요. 돌아가고 싶으면 어쩔 수 없고.”
“으음….”
소피아가 복잡한 낯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끝내 제 머리카락을 헝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이 아이는요?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다 방법이 있죠.”
유선우는 이번에도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
“어디로 가야 하나.”
단독주택에서 나온 유선우가 중얼거렸다. 다음 목적지를 고민할 때 누군가가 얼굴을 툭툭 두드렸다.
“찍찍!”
유선우의 어깨 위에 올라탄 햄스터였다. 햄스터가 짧은 앞발로 좌측을 가리키며 울어댔다.
“찍, 찍!”
“뭐라는 거야.”
“일단 저기로 가봐요.”
소피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햄스터와 떠드는 모습이 보기에 퍽 우스꽝스러웠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
그녀가 감탄 어린 눈빛으로 햄스터를 바라봤다. 김한영이 아티팩트를 사용해 변한 것이었다. 그 과정을
실제로 지켜봤음에도 믿기가 어려웠다.
“투명 망토에 만능약에 변신 반지에. 그 주머니도 그렇고,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무슨 보물던전이
라도 갔다 왔나 봐.”
“다음에 데려가 줄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못할 건 없죠.”
태연한 음성에 소피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탐욕을 드러내는 게 바람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욕심을 거
두기가 힘들었다.
“으. 이런 거 덥석 물면 꼴불견인데. 너무 속물 같나요?”
“그냥 달라고 했으면 좀 정떨어졌을지도요.”
“제가 그렇게 개념 없지는 않아요.”
“알아요. 근데 생각하는 거랑 굉장히 다를걸요.”
유선우는 대화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김한영의 안내를 따라 걷다 보니 드문드문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
다.
개인행동을 하는 이는 없었다. 어지간하면 서넛씩은 몰려다녔다.
드물게 두 명이 보일 때면 항상 하나는 질질 끌려다녔다. 여자를 태운 채 네발로 기어 다니는 남자도 보였
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애완동물을 산책시키는 듯한 인상이었다.
“저거 기분 더러운데.”
“어떻게 알아요? 경험 있는 것처럼 말하네.”
“그런 플레이였어요.”
유선우는 오르시아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힘든 것은 둘째치고서 죽도록 굴욕적이었다.
“저 사람들은 플레이 같지는 않네요.”
“대가리 이상한 사람 참 많아. 쟤는 왜 바닥에다 똥을 싸요?”
“시키니까 하는 거죠.”
“말세다, 말세야.”
미쳐 돌아가는 서울을 걷고 걸어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벽의 군데군데가 찌그러진 폐공장이었다. 핏자
국이 말라붙은 입구가 스릴러 영화를 연상케 했다.
- 하, 또 꼴았네.
- 으하하! 오늘 삘 좋다, 야.
- 흐으으으…….
내부에서 사람들의 말소리와 미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선우는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떠드
는 것을 듣기로는 도박장인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입구로 걸어가 내부를 살펴봤다. 공장 안은 어둑했다.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유일한 광
원이었다.
‘좀 많네.’
유선우는 어려움 없이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인원은 대략 스무 명이었다. 가구처럼 곳
곳에 널브러진 인질들을 제외한 숫자였다.
예상대로 놈들은 한창 도박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었는지 죄다 보드게임이었
다.
유선우가 면면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옷자락을 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선우.”
여태까지 멀쩡하던 소피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단련된 멘탈도 금이 가기는 하는 듯했다.
“왜요?”
“저, 저게 뭐죠?”
소피아가 공장의 한가운데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유선우는 시선으로 그 방향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열
댓의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마치 상품을 진열해놓은 듯했다.
“판돈이겠죠.”
“…판돈이요?”
“쟤네가 뭘 걸고 저 지랄을 하겠어요. 돈도 안 쓸 텐데.”
유선우가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아마 식인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공장을 한 차례 훑어보고
는 등을 돌렸다.
“슬슬 돌아갑시다. 더 안 봐도 되겠다.”
판단은 섰다.
전부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