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다
유선우는 깊은 새벽에 눈을 떴다. 새 우는 소리도 없이 고요한 밤이었다.
‘뭐야.’
가슴팍에는 작은 머리가 기대어져 있었다. 샴푸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긴 머리카락. 볼 것도 없이 아이릴
이었다.
“헤, 으흐흐…….”
자면서 실실 웃는다. 웃음소리가 음흉하다. 그런데도 유선우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자신의 옷을 쥔 채로
달라붙는 아이릴의 모습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는 옆으로 누운 아이릴의 등을 팔로 감쌌다.
그대로 다시 눈을 감으려는 때였다.
- 선우.
“응?”
- 새삼스럽긴 한데, 꼭 해야겠어?
“뭐가 또.”
유선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이릴이 일어나면 또 정신병자 취급할 게 뻔했다.
- 아브나바한텐 다르게 말했지만… 아까 보니까 알겠더라. 여기는 버리는 게 맞아.
“지구? 관리자가 할 소리가 아닌데.”
- 이젠 박탈됐는데 뭐 어때. 하여튼 네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신계에서 유선우를 주목하는 이유는 위협적이고, 방해되기 때문이다. 물러나 조용히 지낸다면 당장은 건
드리지 않을 터. 적지로 들어갈 바에야 431-9 차원에서 살아가는 편이 낫다.
엔라는 그렇게 판단했다.
- 아브나바한테 부탁하면 네 지인 정도는 같이 옮겨줄 거야. 정착하기도 어렵지 않을 거고.
“별로 그러고 싶진 않네. 차선책으론 괜찮겠다.”
- 굳이 지구를 고집할 필요가 없잖아. 이젠 쑥대밭인데 고향은 무슨.
설득하는 엔라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속에는 침울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음, 딱히 고집하는 건 아니야.”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엔라를 배려한 말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돌아오고 나니까 알겠더라.”
- 뭘?
“난 의외로 지구 자체엔 관심이 없더라고.”
431-9 차원이나 낙원에 있을 때는 진심으로 귀환을 바랐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시큰둥할 따름이었
다.
“아는 사람들 만난 건 좋아. 근데 그게 다야. 그 외에는 그냥 덤덤해.”
- 당연한 거 아니야? 꼴이 이 모양인데 기쁠 리가 없지.
“좀 다른데… 뭐라 할지, 거의 망했으니 슬프던가 화라도 나야 할 거 아니야. 난 전혀 안 그래.”
한강의 차에서 무너진 서울을 둘러봤을 때.
유선우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잔잔했었다. 그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잘 모르겠어. 그렇다고 방관하겠다는 소린 아니야. 어떻게든 바꿀 생각이긴 한데, 성공적으로 재건하든
망해서 저쪽으로 넘어가든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싶어.”
- 그럼 명계로 갈 필요도 없잖아.
“아니, 그거랑은 얘기가 다르지.”
구구절절 말해놓고서 뜻을 꺾지는 않겠단다. 불가해한 태도에 엔라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 이해가 안 돼. 왜 사서 고생을 해?”
“설레발 치지 마. 너 때문 아니니까.”
- 서, 설레발 안 쳤어.
“따져보면 이유야 많지. 우선 신계 새끼들이 띠꺼워. 게다가 내가 숨어 산다고 평생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고.”
지구에 대한 애착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쪽팔리잖아.”
유선우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 백명의 얼굴이 그려졌다.
“조용히 잘 먹고 잘 산다 쳐도 결국엔 죽을 텐데, 그때 가서 스승님 얼굴을 어떻게 봐? 창피해서 또 죽겠
다.”
- 그게 다야?
“더 필요해? 난 쪽팔리기 싫어.”
딱 잘라 뱉는 말에 엔라가 침묵했다. 그러다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 너, 조금 변했네.
“그래?”
성격적인 변화는 본인이 가장 눈치채기 힘든 법이다. 하지만 엔라는 현재 유선우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
다. 뚜렷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 응.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해.
“어떤 거?”
- 네가 절대 곱게는 못 죽는다는 거. 네 여자친구한테 찔려 죽을걸.
“솔직히 그래도 싸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렀다. 안겨 있던 아이릴이 눈을 찌푸리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선우, 또 혼잣말하는 거예요? 정신병 증세가….”
“잘못 들었나 보네. 더 자.”
“이따가 저랑 병원 가봐요. 이런 건 같이 이겨내는 거예요.”
“드라마 너무 봤다.”
유선우가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아이릴은 손길을 만끽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드라마… 보고 싶다….”
유언이라도 남기듯 말하고는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유선우가 피식 웃었
다.
***
귀환 후 첫 아침이 밝았다.
유선우는 식충이들에게 외출 금지를 신신당부했다. 다행히도 경력자인 아이릴 덕분에 그나마 걱정이 덜
했다. 리디와 쉬발뿐이었으면 불안감에 항상 데리고 다녀야만 했으리라.
집을 나선 뒤로는 곧장 청일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유선우는 기가 질렸다.
‘사람 개많아.’
기자인지 뭔지 인파가 바글바글했다. 이전 같았다면 그냥 창문으로 통행했을 상황. 하지만 한 번쯤은 얼
굴을 비쳐두는 게 나을 듯했다.
‘성가시네.’
한숨을 내쉰 유선우가 인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SNS에 업로드한 사진 속 귀찮다는 얼굴과 똑같
은 표정이었다. 정문으로 다가가자 그에게 시선이 하나둘 쏠렸다.
“유, 유선우 씨!”
“한 말씀만 묻겠습니다!”
“진짜 유선우네. 실물이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다. 어떤 이는 반신반의한 태도로 눈을 의심했다. 특종을 따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직업정신 투철한 이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유선우에게 몰려들었다. 하는 짓들은 기자다웠다.
“어째서 모습을 감추셨던 겁니까? 바람 상대와 도피했다는 말이 있던데요.”
“이제는 완전히 복귀하신 겁니까?”
“활동은 어디에서 하실 계획이시죠?”
이곳저곳에서 정신 사납게 떠들어댄다. 유선우의 표정이 점차 뚱하게 변했다.
“하나씩 해요, 하나씩. 복귀한 거 맞고요. 활동은 그대로 청일에서 할 겁니다.”
“바람은-”
“지랄하지 마시고요. 제대로 된 거 물을 생각 없으면 그냥 돌아가시죠?”
마냥 틀린 말도 아니라서 문제다. 유선우는 낯에 철판을 깔고 몇몇 기자에게 시선을 줬다. 눈이 마주친 이
들이 더욱 열정적으로 달라붙었다.
“등급 외 헌터로서 첫걸음이 중요하실 텐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등급 외는 뭐예요? 처음 듣는데요. 그리고 첫걸음은 벌써 뗐죠. 앞으로도 비슷할 거예요.”
“비슷하다고 하시면?”
“꼴리는 대로 하겠다고요.”
알면서도 묻는 게 우스웠다. 하기야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뉘앙스만 흘리는 것과 실제 발언은 파
급력이 다르니까.
“서울을 점거한 집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젊은 기자가 물었다.
유선우는 별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망할 놈들이죠. 제멋대로 잘 산다면서요? 그럼 이제 뒈질 때도 됐지.”
“그 말씀은….”
거친 발언에 소란이 한층 격화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유선우가 손을 휘적거렸다.
“슬슬 끝냅시다. 비켜요, 비켜.”
우우우웅.
흩뿌려진 마력이 기자들을 양쪽으로 밀어냈다. 들끓는 인파가 천천히 갈라졌다. 신비로운 현상에 그들의
입에선 질문 대신 감탄사만 튀어나왔다.
‘되게 편한데.’
유선우는 갈라진 인파 사이를 걸으며 만족감을 느꼈다. 이전 같았더라면 이만큼 깔끔하게는 못 했을 터.
마력이 날카로워 참극이 벌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뜬했다. 내공의 활용법을 익히다 보니 잡다한 기술에도 능해졌다.
‘처음부터 무림 차원으로 갔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소환됐었던 곳이 무림이었었더라면.
조금 욕심을 더해 백명의 출신지였었더라면.
상상은 잘 가지 않아도 은근히 재밌었을 듯했다. 마법사 부럽지 않게 편리한 기술도 숱하게 익혔었을 테
고.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로비로 들어갔다. 밖이나 안이나 수선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수많은 시선에도 유선우는 태연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폰을 꺼내 와이파이를 켜자 카톡이 쏟아졌다.
소피아의 메시지는 37건.
대답이 없어서인지 열 받은 기색이었다.
유선우는 실실거리면서 보이스톡을 걸었다. 신호음은 세 번 만에 끊어졌다. 대신에 귀에 익은 음성이 들
려왔다.
- 어디예요?
***
유선우는 청일의 사무실에서 소피아를 기다렸다. 믹스커피 한 잔을 비우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기다릴 때 시간을 죽일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의 장점이었다.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소피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확인한 유선우는 창밖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화려한 거 봐라.’
정문 근처에 웬 시꺼멓고 기다란 차량이 한 대 정차해 있었다. 유선우는 창문을 활짝 열어 밖으로 몸을 던
졌다.
사뿐하게 착지하고는 차를 향해 다가갔다. 차 문을 여니 뒷좌석에 여성 하나가 보였다.
멋들어진 선글라스와 웨이브 진 금발.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소피아 씨.”
“제 이름은 어떻게 기억해요? 연락도 없길래 까먹은 줄 알았는데.”
“연락한다는 걸 까먹었네. 미안해요.”
유선우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솔직한 발언에 소피아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
“차라리 변명이라도 하지.”
“변명하고 뭐고 할 사이는 아니죠. 저희가.”
“그럼 무슨 사인데요?”
소피아가 의미심장한 투로 물었다. 유선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누나가 정하세요. 전 친구든 다른 쪽이든 다 좋아서.”
“…정말 상관없다고요?”
“저번이랑 같으면 많이 좋을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서로 못 본 시간이 3년이나 되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땐 입맞춤을 나눴었다마는, 지금이라고 마
음이 같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달려온 걸 보면 뻔하긴 했다.
“제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요. 괜히 흔들지 말고.”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소피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곧이어 그녀는
유선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유선우는 작은 머리를 감싸고는 살살 토닥거렸다. 소피아가 생각보다도 안달이 나 있던 모양이었다. 돌
아왔는데도 연락조차 없어 불안감을 안았을 터였다.
미안한 짓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 유선우는 따스한 손길로 소피아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하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피아가 떨어졌다. 어느새 흐트러진 표정을 다잡은 그녀가 히죽히죽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저희 아버지가 얼른 결혼하라고 성화거든요.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렇죠?”
“천천히 합시다, 천천히.”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뭔 소린지. 떨떠름하게 반응하자 소피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슬슬 급할 나이라서요.”
“주름도 안 생겼으면서 뭘.”
“선우는 아예 나이 안 먹은 거 같아. 신기하네.”
“그래요?”
차세정에게도 들은 말이었다. 하긴 냉동인간 신세였으니 당연했다.
혹은 높은 경지로 인해 노화가 느려진 것일 수도 있겠고. 만일 후자라면 앞으로 고생 좀 할 듯싶다.
“그것보다 잘 지냈어요? 한국은 개판이던데, 미국은 어때요?”
“다를 게 있나요. 똑같지.”
소피아의 싱글벙글하던 낯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각하기도 싫은 기색이었다.
“게이트에 무정부주의자에… 열 받아 죽겠어. 굳이 따지면 한국보단 괜찮지만요.”
“근데 여기 와있어도 돼요?”
“원래는 안 되는데, 뭐 어때요. 저 빼도 S급이 셋이니 알아서들 하겠죠.”
미국에는 S급이 4명이나 된다는 소리다. 본래는 3명이었는데 그동안 하나가 생겨난 모양. 한국이 초라해
지는 차이였다.
“일 얘기는 됐고, 데이트해요. 기분전환이나 할 겸.”
“데이트요? 음.”
유선우는 계획해둔 일정을 떠올렸다. 우선 김정수를 만날 셈이었다. 어제 부탁했던 정보를 전달받고 정
찰 삼아서…….
“알았어요. 하지 뭐.”
잠깐 고심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한답시고 일정까지 바꿀 필요는 없었다. 그냥 같이 다니
면 되는 일이다.
“잘됐네요. 마침 혼자 가기 심심했는데.”
“어디를요?”
“서울이요.”
데이트하면 서울이다.
요즘은 벌레가 많은 모양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