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다
- 눈 깔으라고. 안 들려?
“선배? 갑자기 왜….”
고압적인 지시에 아브나바의 낯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얘 왜 이래.’
유선우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브나바는 여태 지구를 관리해준 은인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개판이 나긴 했으나 그녀가 원망을 받을 일
은 아니었다. 꿇으라며 쌍소리를 뱉기엔 번지수가 달랐다.
하지만 그는 엔라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아브나바를 변호하기에는 심기에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넌 왜 오자마자 장난질이야.”
“응?”
아브나바의 얼굴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온몸에 입을 맞추고 살결을 탐하고 싶어진다.
틀림없는 매혹의 증상이다. 아브나바는 초장부터 매혹의 권능을 흩뿌려댔다.
“내가 눈치 못 챘을까 봐? 알 만한 사람끼리 이러면 안 되지.”
“드, 들켰어?”
“날 너무 허접으로 봤는데.”
유선우는 권능에 노출되고도 제정신을 유지했다. 그는 431-9 차원에서도 한 차례의 성장을 이뤄냈다.
비로소 격을 완성한 지금이라면 토노토마저 쌈 싸 먹을 자신이 있었다. 이런 저급한 수작에 걸려들 리가
없었다.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어디까지 하나 보고 싶어서.
선을 넘으면 머리채 붙잡고 무릎 꿇릴 셈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엔라가 끼어들었다.
- 그것보다 아브나바. 내가 너희 차원에서 좀 재밌는 걸 봤거든?
“일단 이거부터 풀어요. 다짜고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선배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 알아. 나도 솔직히 미안했어. 근데 그거 보니까 싹 사라지더라.
엔라의 음성은 여전히 험악했다. 이만큼 열이 뻗친 모습은 유선우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욕
하는 게 아니라 욕먹는 쪽이었다.
“야, 왜 그래?”
- 선우. 그거 꺼내봐.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 그거 있잖아! 네가 뺏어온 칼인지 창인지 그거!
“뺏어오다니. 말이 심하네.”
뺏어온 적 없다. 정당한 절차로 받아왔다. 사람을 강도처럼 말하면 서운하지.
- 하여튼. 나 지금 심각해.
“근데 여기서 어떻게 꺼내?”
- 낙원에서 하던 거랑 똑같을 거야.
강하게 떠올리라는 말이다. 유선우는 헛수고다 싶으면서도 엔라의 지시에 따랐다.
“잠깐만요. 지금 이게 무슨-”
둘의 대화를 듣던 아브나바가 물으려 했다.
그때 유선우의 손에 휘황한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길쭉한 형태를 이룬 빛이 순백의 창을 빚어냈다.
“오, 되네?”
유선우가 탄성을 흘리며 창을 살펴봤다. 그는 혹시나 해 다른 사물도 떠올려 봤다. 커피잔과 의자, 테이블
에 콘X. 하지만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유선우가 삽질하는 와중에 아브나바는 경악으로 휩싸였다. 창을 주시하는 그녀의 동공이 확장됐다. 명백
하게 찔리는 게 있다는 태도였다.
- 하. 설마 했는데 진짜였구나.
“아니요, 선배. 그게 아니라. 무슨 오해가 있는 거 같아요. 설명할 수 있어요!”
- 해봐. 설명.
엔라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서늘해졌다. 설명한다던 아브나바는 입만 한참이나 달싹거렸다. 변명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게 뭔데 그래?”
유선우가 손에 쥔 창을 보며 물었다.
- 관리자용 무기야. 우리끼리 싸울 때나 쓰던 건데, 요즘은 아무도 안 써. 시스템으로도 만드는 거 더럽게
오래 걸리는 데다가 애초에 지금은 불법이거든.
“근데 쟨 만들었네.”
- 나도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그래도 그냥 넘어갔었지.
칼 한두 자루 만드는 것쯤이야 심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황이 상당히 묘했다.
- 저년이 9년 전에 숨겼다며? 내가 너 보낸 다음에 바로, 허둥지둥거리면서.
“…음. 듣고 보니 또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유선우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에 아브나바가 거세게 도리질했다.
“정말 아니에요! 그냥 호신용이에요, 호신용!”
- 지랄하지 마. 호신용으로 칼 들고 다니는 관리자가 어딨어? 아니, 들고 다니지도 않았지. 걸릴까 봐 무서
웠나 봐?
“잠깐만요.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근데 그거 다 피해의식이에요. 망상이라고요.”
- 서운했던 건 이해해. 이해하는데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엔라는 아브나바의 호소를 무시했다. 변명이랍시고 뱉는 말이 죄다 허접했다.
“아니, 제 말 좀-”
- 내 뒤통수에 꽂으려고 했던 거잖아!
엔라가 아침드라마 배우처럼 일갈했다. 그녀의 호통에 무거운 침묵이 앉았다.
“아.”
유선우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복잡한 일도 아니었다.
9년 전까지만 해도 아브나바는 엔라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현재 지구를 건드리는 다른 관리자들처럼.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수단을 선택했다.
엔라를 직접 담가버리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힘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무기까지 직접 제작했다. 끝에는 실행만이 남아 있던 상황.
통수를 치려할 때 엔라가 지원을 보내왔다.
그래서 부랴부랴 무기를 숨겨뒀다.
폐기하지 않은 이유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함이었다. 지원이 달랑 유선우 1명뿐이었기에 기대감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유선우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그로 인해 아브나바의 앙심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엔라를
죽일 필요가 없어졌으니 무기도 묻혀야만 했다.
그래, 묻혀야만 했다.
“숨길 거면 잘 좀 숨기지 그랬냐.”
유선우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는 어이없어했으나 아브나바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용왕의 창고만큼 안
전한 곳은 찾기도 힘들었다.
- 쒸익, 쒸익!
화를 참기 힘든지 엔라의 간섭력이 날뛰었다. 유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힘을 가라앉혔다.
“적당히 해. 지금이 이럴 때야?”
- 아니. 저년이!
“도움 많이 받았으면 됐지, 뭘. 이것도 이젠 나한테 있고.”
그가 창대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착착 감기는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잘은 몰라도 쓸 만한 놈이라
는 건 틀림없었다.
“서, 선우야….”
실드를 쳐주니 아브나바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물기 젖은 음색이 요염하기 그지없다. 또 꼬리를 치고
자빠졌다.
“우선 다른 얘기부터 좀 하자.”
“그럼 이것부터 풀어줄래?”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얼어붙은 아브나바가 몸부림쳤다. 유선우는 무심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냥 그대로 있어.”
- 그래, 이 년아!
“너도 닥치고.”
유선우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어떻게 된 게 잘 때마저도 더럽게 시끄럽다. 마음의 평화가 간절했다.
“일단 지금 관리자는 너라고 봐도 되나?”
“응. 선배가 잡혀가고 내가 임명됐어. 겸직으로.”
“근데 지구 꼴이 개판이네.”
“그게… 이젠 아예 자기들끼리 단합하더라. 저번 일로 위기감을 느낀 거겠지.”
유선우와 엔라에 의해 한 관리자가 소멸했던 사건. 그에 경각심을 품은 관리자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
했다.
그들은 높은 자존심마저 내려두고 서로 합심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게이트 집단 발생이
다.
“그나마 확장되는 건 막고 있긴 한데, 차원에 구멍이 너무 많아. 인간한테 손대는 놈들도 수두룩하고.”
“그 테러범들 말이지.”
서울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다는 불법 각성자 조직. 김정수는 그들 중에 특출나게 강한 이들이 존재한다
고 했다.
들었을 때부터 유선우는 짐작하고 있었다. 강자라는 것들은 대부분이 대리자일 터였다. 특히 S급으로 판
단된다는 놈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난 각성자를 못 만들어.”
유선우가 시선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아브나바 대신 엔라가 대답했다.
- 전에 말했잖아. 내가 이곳저곳에서 간섭력을 가져와서 인간한테 뿌린다고. 운 좋게 파장이 맞으면 받아
들여서 각성하는 거야.
“가물가물하네. 그래서?”
- 쟤는 못 해. 이름값이 딸려서.
엔라가 다른 관리자들에게서 간섭력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힘에 있었다.
양아치가 중고생 코 묻은 돈을 뺏는 것과 마찬가지. 반면에 아브나바에겐 그럴 힘도, 명성도 없었다.
‘엔라가 나름대로 일 잘했던 거구나.’
의외의 재평가였다. 아브나바가 무능하니 엔라가 상대적으로 빛나 보였다. 졸지에 지구를 맡게 된 입장
에선 억울하겠지마는.
“그게 끝이지?”
“지금까지는.”
“그래. 일단 알았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아브나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선배가 다시 맡으시는 거겠죠?”
-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석방되신 거 아닌가요?”
- 전혀 아닌데. 못 들었어?
“아무것도요. 하도 바빠서 돌아다닐 시간이….”
아브나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럼 어떻게 나와계신 거죠?”
- 탈옥했어. 지금 걸리면 망해.
“……탈옥? 자세히 말해봐요.”
- 말하려면 긴데….
엔라는 그간의 일을 간추려 설명했다. 상세를 들은 아브나바는 눈을 내리깐 채로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랬군요.”
“의외로 담담하네.”
“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아브나바가 가라앉은 눈으로 유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명계로 가겠다는 말이지. 꼭 그래야겠어?”
“가야지 어째. 먼저 시비 거는데 내가 별수 있나.”
“……그래도 지금은 힘들 텐데.”
“나도 알아.”
유선우는 분명히 강해졌다. 관리자를 기준으로 봐도 중상위권에는 속했다. 이는 엔라의 힘을 제외하고
본신의 무력만 따졌을 때다.
갓 태어난 초월자임을 감안하면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백명 같은 규격 외의 무력에는 닿지 못
했다.
엔라의 탈옥 이후로 경계도 삼엄해져 있을 터. 명계를 뒤집는 데는 힘이 모자랐다.
“우선 관리자들부터 치워야지.”
유선우의 말에 아브나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일이 왜 이렇게 복잡해.”
탄식한 그녀가 유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안에 있는 엔라를 주시했다.
“누군 고생시켜놓고 자긴 선우랑 이것저것…. 좋았나요? 재밌었나요?”
- 네가 나한테 쓴소리할 입장이야?
“입장이요? 과거 말고 지금을 보세요. 저는 선배 대신해서 일하고 있는데, 솔직히 지구에는 아무런 애착
도 없거든요. 무슨 소린지 아시죠?”
자신은 지구를 버리고 튀어도 상관없다는 의미. 굴할 수밖에 없는 협박이다. 알아들은 엔라가 간섭력을
흘리며 부들거렸다.
- 나, 나쁜 년!
“제가 선배를 해치려 했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심증이잖아요, 심증.”
- 그건 그렇지만… 선우,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나한테 그래? 쟤 말도 맞구만.”
유선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도 엔라의 의견이 킹리적 갓심임을 알았다. 그러나 보복에는 별 관심
이 없었다.
‘내 일도 아닌데 뭘.’
매정하지만 자기 일은 자기가 챙겨야지. 관리자면 나이도 지긋지긋할 텐데 말이다.
“선배. 서로 싹 잊기로 해요. 어떠신가요?”
여전히 묶인 채로 생긋 웃는다. 엔라는 대답 없이 씩씩거리기만 했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힘을 거뒀다.
- 알았어. 그 대신 일 똑바로 해. 앞으로 바쁠 테니까.
“네?”
- 선우가 게이트 넘으면 그쪽 관리자한테 보내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다 네 일이야.
유선우는 홀로 관리자가 머무르는 정신계에 다가가지 못한다. 육체는 둘째치고 애초에 방법도 모르기 때
문이다. 차원을 넘고 나서 적에게 안내해줄 조력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 그리고 별일 없으면 부르지 마. 위에서 끼어들면 큰일 나니까.
“그, 그렇죠.”
아브나바가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그녀는 어째선지 호구 잡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고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어요. 선우한텐 빚도 있고.”
“그럼 얘기 끝났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진짜….”
한껏 침울해져 투덜거린 아브나바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별수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은혜는 꼭 갚아.”
“나한테 빚 갚는 거라며?”
“그럼 모자란 값으론 내가 이것저것 해줄게.”
“참나. 누구 좋으라고?”
“글쎄?”
아브나바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는 다음에 봐, 하고 말하며 유선우를 내보내려 시도했다.
파지직!
돌연히 순백의 창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난데없는 현상에 시선이 창으로 집중됐다.
“응?”
“…아, 참.”
의아해하는 유선우와는 달리 아브나바는 아는 바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손가락으
로 창을 가리켰다.
“그거 좀 치워줄래? 들고 있으면 시스템이 잘 안 먹혀.”
“어떤 원린데?”
“에러 발생시키는 거라고 보면 돼.”
“오, 신기하네.”
비유하자면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놈일까. 유선우가 새삼스레 감탄하며 창을 놓았다. 낙원에서처럼 상상
하니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좀 사기 아닌가?”
“그… 공들여서 만들었거든. 이곳저곳에서 도움도 받았고. 어딜 뒤져봐도 그만한 건 몇 없을걸.”
- 이, 이 씹어 죽일 년!
그만큼 엔라를 죽이고 싶었다는 뜻이다.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여튼 다음에 봐!”
아브나바가 과장되게 손을 흔들면서 시스템을 조작했다. 곧이어 유선우의 의식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