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유선우는 긴 여정을 마치고 제국으로 귀환했다.
아브나바의 연락이 없었기에 복귀 중에도 중간중간 샛길로 빠졌다. 기억을 되짚으며 도시를 돌아다녔지
만 아쉽게도 더 이상의 격을 얻어내진 못했다.
‘어쩔 수 없나.’
잡다한 것들은 이미 낙원에서 흡수를 끝마쳤다. 그중에는 지구에서의 일도 몇몇이 끼어 있었다. 벤츠 타
고 던전 공략이라던가, 아이릴을 빼돌린 일이라던가. 협회장을 잡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알면 알수록 이상하네.’
밤의 왕국의 건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그게 얼마나 큰 업적이길래 흡수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그야 이성적으론 이해가 가능하다. 고귀한 밤의 일족이 한낱 인간의 앞에서 무릎 꿇었으니 업적은 업적이
지. 하지만 느낌이 개 같은 건 당연했다.
아니지. 이건 짜증 나니까 제쳐두고.
“그나저나 이 새끼, 진짜 언제 오는데?”
유선우는 꼬치구이를 씹으며 투덜거렸다. 들뜬 채로 그의 옆을 걷던 리디가 초롱초롱한 눈을 향해왔다.
“누구 기다리십니까?”
“이쪽 얘기야. 슬슬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 없네.”
“…그러십니까. 이제 가시는군요.”
리디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환하던 낯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도 이해는 하지만 침울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고 싶다는 거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 글쎄. 슬슬 오지 않을까?
그의 말을 엔라가 받았다.
“이대로 말 없으면 어쩌냐. 네가 게이트 뚫을 수 있어?”
- 으응… 잘 모르겠네. 지금 상태론 시스템에 접근하기가 좀.
“내 몸에서 나오면?”
- 관리자 권한이 남아 있으면 될 거야. 근데 솔직히 가능성은 적지.
“결국은 기다려야 된다는 거네.”
엔라의 처벌이 결정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신계가 아무리 어물쩍거린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조치는
취해뒀을 터였다.
- 걔, 아브나바 애한테 말해봐.
“아이릴?”
- 응. 성유물이라도 몇 개 있으면 통신은 될 수도 있어.
“그런 건 퍼뜩퍼뜩 말하자.”
-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서 조용히 있었지. 난 성유물 같은 건 안 뿌리거든.
“왜?”
- 만들기 진짜 귀찮아.
“그러시겠지.”
유선우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시원찮은 반응에 엔라가 변명하듯 언성을 높였다.
- 수작업이야, 수작업! 그런 걸 누가 해!
“시스템으로 못 만들어?”
- 만들 수는 있지. 근데 오래 걸리는 건 똑같아. 게다가 사용제한도 걸려서 인간들은 못 쓰고.
“제한?”
유선우는 엔라의 말을 곱씹었다.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그가 아공간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전에 내가 가져온 칼… 창? 하여튼 그게 시스템으로 만든 거 아닌가?”
- ……글쎄?
“아니, 아는 게 뭐야?”
- 우리는 무기 잘 안 만들어. 만들기는 더럽게 힘들고, 치고받을 일도 원체 적어서.
지금과는 달리 옛적에는 여러모로 일이 많았었다. 관리자들끼리의 파벌 싸움도 잦았었고, 하극상도 종종
있었다. 엔라도 그 시절에 명성을 쌓았다. 친구가 없어서 파벌은 못 들어갔었지만.
어쨌건 보다 못한 신계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직접적인 다툼을 자제하게 되었다. 그 후에 태어난 아브나바
가 무기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럼 걔는 왜 만들었대. 펠리스 말 들어보니 숨겨놓은 거 같던데.”
- 몰라. 뭐 맘에 안 드는 놈 쓱싹하려고 쟁여뒀나 보지. 아니면 하극상이라도 하려고…….
엔라가 말을 뚝 멈췄다.
“왜 그래?”
- 그 칼, 언제 줬댔지?
“9년 전이었지 아마. 내가 여기 온 다음이랬으니까.”
- 이 미친년…….
엔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돌변한 태도가 의아해진 유선우가 눈매를 좁혔다. 그때 그의
시야에 리디의 얼굴이 들어왔다.
“스승님. 아까부터 혼자 뭐라뭐라… 어디 아프십니까?”
“응? 아니, 생각 좀 하느라.”
“어디 편찮으시면 말해주세요. 숨기시면 안 됩니다.”
“그런 거 아니야.”
3년간 잠들어 있었더니 하나같이 과보호다. 유선우는 피식거리며 리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가 그녀
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어라.”
유선우가 돌연 손을 멈췄다.
“스승님?”
리디의 부름에도 유선우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리디가 아닌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눈앞에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색욕의 지배자가 펑펑 웁니다.]
[색욕의 지배자가 왜 이제 왔냐고 불평합니다.]
[색욕의 지배자가 당신을….]
읽을 새도 없이 메시지가 겹쳐서 쌓인다. 복잡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유선우는 일말의 짜증도 없이 히죽
웃었다.
“슬슬 가야겠다.”
지구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
주위가 탁 트인 밭에서 쉬발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두 눈은 허공에 꽂혀서는 미친 듯이 흔들려댔다.
“……저 진짜 갑니까?”
“진짜지, 인마.”
유선우가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그의 앞에는 큼지막한 게이트가 출몰해 있었다. 건너편에선 소란이 이
만저만이 아니리라.
‘어떠려나.’
유선우는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게이트를 응시했다. 지구 꼴이 어떻게 되어있을지 걱정이 됐다.
기대는 전혀 없었다.
한국 한정이지만 한국의 헌터 사회를 지탱하던 협회장이 죽었고 청일의 본사가 무너졌다. 낙원에서의 일
로 신계에서도 본색을 드러냈다.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그의 심정은 지극히 싱숭생숭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는 리디의 표정도 복잡하긴 매한가지였다.
“스승님. 언제 오실 겁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쪽에 문제가 여러모로 많아서.”
“…올해 안에는 오십니까?”
“와도 이번만큼 오래는 못 있을걸.”
리디가 입을 다물었다. 둘의 오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박아연이 쓴웃음을 짓고 앞으로 나섰다.
“선우 씨, 먼저 갈게요?”
“같이 가요, 언니. 이 아저씨도 데리고.”
“지, 집으로 보내주십쇼. 제겐 반쪽 같은 딸이…!”
변장한 아이릴이 쉬발의 목덜미를 잡고는 질질 끌었다. 그녀는 용왕에겐 지더라도 쉬발쯤은 간단히 이겨
먹었다.
이내 셋의 몸이 게이트에 삼켜졌다.
“다음에 보자.”
유선우는 리디에게 눈길을 줬다가 발을 떼었다. 기껏 배려해준 박아연과 아이릴에겐 미안하지만 인사가
길수록 아쉬움이 깊어지는 법이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게이트로 향했다.
“아…….”
리디가 멀어지는 스승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스승은 돌아보지 않는다. 저번과 마찬가지다. 그는 타인보
다 자신의 삶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아니, 아니야.’
가치가 다를 뿐이다. 그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이 이곳의 모든 인연, 명성과 재화보다 값진 것이다.
리디는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그녀가 431-9 차원에 남으려는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도시의 활기가 좋아서. 스승이 이룩해낸 평화가 자랑스러워서. 그저 그뿐.
‘그게 스승님한텐 별 의미가 없는 걸까.’
유선우는 자신이 원해서 이곳을 구해낸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었다.
언제든 이곳을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었지만, 만약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그는 크게 상심하지는 않을 것이
다. 씁쓸하게 웃고 지나가고 말겠지.
그리고 훗날 제자를 떠올릴 때면 ‘잘 지낼까’하고 걱정할 테고, 더 시간이 흐른다면 ‘그런 아이도 있었
지’하고 추억하게 될 것이다.
리디는 그게 싫었다. 스승의 인생에서, 그녀는 단지 지나갈 뿐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방금보다, 저번보다 더 멀리.
이번에는 손가락이 유선우의 옷깃에 닿았다.
“스, 스승님.”
“할 말 있어?”
“그, 저도…….”
리디는 차마 말을 자아내지 못하고 크게 갈등했다. 결심이라면 섰다. 하지만 유선우에겐 무겁게 느껴지
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세간에선 리디를 유선우의 유일한 제자니 뭐니 떠들지만, 당시의 유선우에게는 심심풀이 대상이 필요했
을 뿐이었다. 서로의 마음의 크기가 같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유선우가 반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주춤하는 리디를 내려보며 싱겁게 웃었다.
“왜 이렇게 소심해졌어? 오고 싶으면 오든가.”
“괘, 괜찮습니까?”
“쉬발도 데리고 가는데 뭘. 꽤 맘에 들걸.”
유선우가 리디의 손을 붙잡았다. 이끌어주며 걷는다. 그제야 리디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민들레를 닮
은 웃음이었다.
***
“캬아아악!”
게이트를 넘자마자 웬 날카로운 이빨이 유선우에게 다가왔다. 타액을 질질 흘려대는 아가리에서 악취가
풍겼다.
“어우, 뭐야!”
퍽!
유선우가 휘두른 주먹이 랩터의 머리를 터뜨렸다. 힘 조절을 삐끗해 피와 살점이 온몸에 튀었다. 졸지에
뜨뜻한 핏물로 샤워한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어?”
게이트 너머의 대로는 쑥대밭이었다. 비행 몬스터는 없었지만, 금이 갈라진 아스팔트 위엔 짐승이 들끓
었다. 천여 마리는 될 법한 몬스터의 군세가 대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어딜 봐도 성한 곳이 없었다. 하루 이틀 만에 벌어진 변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으워어어어!”
거대한 체구의 미노타우로스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덮쳐들었다. 유선우는 짜증스레 주먹을 들었다가, 손
을 거뒀다.
푸욱!
유선우의 목덜미 옆으로 창이 지나갔다. 은은한 적색으로 빛나는 마력창이 미노타우로스의 입을 꿰뚫었
다. 랩터의 피가 묻어 있던 유선우의 얼굴에 소 피마저 끼얹어졌다.
“아, 냄새.”
불쾌한 목소리에도 리디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었다.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빙그르르 굴렀다.
“흉흉한 곳이군요.”
“그러게 말이야.”
“원래 이렇습니까?”
“아니, 아무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돌아오니 또 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