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흘렀다.
끊어진 선을 잇듯이 유선우의 의식이 부상했다.
유선우는 또렷해진 정신으로 문을 쳐다봤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불청객이 있었다.
“선우 씨, 자요?”
“박아연 씨?”
주변은 여전히 어둡다. 벌레 울음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르는 적막한 새벽이었다. 살짝 눈썹을 찌푸린 유
선우가 박아연과 시선을 맞췄다.
“이 시간에 무슨….”
“있잖아요.”
박아연이 말했다.
“애, 좋아한댔죠.”
“……네?”
유선우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짜고짜 새벽에 문을 열고 와서 애를 좋아하냐니.
의미를 알 수가…….
‘아니, 좀 알겠는데.’
유선우는 설마 싶어 박아연의 상태를 살폈다. 바삐 돌아다니는 눈알, 혈색이 짙은 볼. 옷자락을 잡은 손가
락은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린다.
박아연은 명백하게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광원은 창밖에 떠오른 달뿐이었지만, 유선우의 시야에 흐림은
없었다.
“조,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애들.”
박아연이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꼬았다. 머리카락이 그녀의 머릿속처럼 빙빙 돌아간다.
“그랬죠.”
“사실 저도, 음. 나쁘게 생각하진 않거든요. 귀엽잖아요. 손은 많이 가지만 그것도 애들 매력인 거
고…….”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 문에서 그러지 말고.”
“아, 아. 네. 실례할게요.”
녹슨 경첩이 다시 한번 울었다. 문을 닫은 박아연이 머뭇머뭇 다가왔다.
“…앉아도 될까요?”
“맘대로요.”
“시, 실례할게요.”
박아연은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유선우가 키득거
렸다.
“그러다 실례만 열 번쯤 하고 가시겠네.”
“이 시간에 제멋대로 들어왔는데 실례 맞죠.”
“그냥 한 소리예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선우 씨는 그…….”
“편하게 말하세요.”
그녀가 머리를 주억거리곤 심호흡했다. 나름 차분해졌는지 눈빛의 흔들림이 멎었다.
“혹시 뭔지 아세요? 제가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
“제 방에요? 아니면 지구에서 넘어온 거?”
“후자요. 저희가 그럴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아니, 지금도 아니죠, 솔직히.”
박아연이 쓰게 웃었다. 그녀와 유선우의 관계는 직장동료, 혹은 나름대로 사이좋은 친구였다. 고향을 떠
나 게이트를 넘기에는 얕은 관계였다.
“글쎄요. 아는 척하기엔 사실 전 그때 상황도 잘 모르거든요.”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박아연은 유선우의 소매를 살짝 잡고는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선우 씨는 이유가 뭐였으면 좋겠어요?”
“이걸 이렇게 물어보시네. 음. 박아연 씨랑 똑같지 않을까요.”
“전 선우 씨가 좋아요. 좋아해요.”
처음에는 그저 능력이 뛰어나고 손이 많이 가는 동생 정도였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달라졌다.
“미친놈이다 뭐다 욕하실 땐 언제고.”
“…솔직히 미친놈 같았잖아요.”
“하긴. 인정해요.”
“저는 선우 씨의 여러 면을 알아요. 미친놈 같은 면도 알고, 의외로 겁이 많다는 것도 알죠.”
“제가 겁이 많아요?”
“가까운 사람 대할 때만요. 가족분이랑 세정 씨한테 특히. 외강내유라고 하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선우는 실없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피처럼 여자를 쌓았던 걸 보면 은근히 외로움도 타는 거 같고요.”
“그건 그냥 혈기죠, 혈기.”
“안 믿어요. 혈기였으면 애가 다섯쯤은 있었겠죠. 결혼도 두어 번은 하지 않았을까요?”
그 물음에는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졌다는 듯이 양손을 반쯤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그것도 인정해요. 무서웠었거든요. 혹시라도 돌아가기 싫어질까 봐. 그런 주제에 외롭기
는 해서 가벼운 관계만 쌓았고.”
“솔직히 저는 잘 이해 못 하겠어요. 저 같으면 그냥 여기 눌러서 살았을 테니까.”
박아연이 그래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손바닥이 유선우의 뺨에 닿았다.
“그런 면도 포함해서 다 좋아해요. 이해하는 거랑은 상관없이. 저, 연하 취향이거든요.”
“어라. 그랬어요?”
“원래는 동갑이 낫겠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 달라졌네요. 선우 씨는요?”
“전 다 괜찮은데요. 미성년자 빼고.”
“다행이네요. 지킬 건 지켜서.”
침대 위에서 잔잔한 웃음이 오갔다. 웃음소리를 흘리는 두 입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저는 트로피가 아니에요.”
“알아요.”
“제가 선우 씨한테 아이릴 씨나 세정 씨 같은 사람인가요?”
“똑같을 수가 없죠. 다 다른 사람인데.”
뻔한 대답이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박아연이 속삭였다.
“그 둘만큼… 아니, 그 둘보다 좋아해 줄 수 있어요?”
“모르는 거죠. 그게 생각대로 되나.”
“하긴. 저한테 달린 거겠죠.”
마른 입술과 촉촉한 입술이 맞닿았다. 한 번 떼어낸 후에, 유선우가 물었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왜 훔쳐봤어요?”
“……네?”
“시치미떼지 말고요. 새벽마다 따라와서 훔쳐봤잖아요. 나 좋다면서 그럴 수가 있나? 한 번이면 모를까
맨날 오길래 걱정도 되더라고요.”
“아, 아니. 잠깐만요. 그걸 어떻게….”
진심으로 안 들켰다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아연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한참이나 허둥지
둥거리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배, 배덕감이 든다고 할지, 음…. 안 되는 건 아는데 자꾸 생각나서. 잠도 못 자겠고….”
시선을 내리깔고 횡설수설한다. 정돈되지 않아서인지 더 진솔하게 느껴지는 발언. 유선우는 하나도 빠짐
없이 새겨듣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와. 진성 변태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
다음날 박아연과 유선우는 늦잠을 잤다. 둘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이미 쉬발과 아이릴이 마주 앉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색어색한 한 쌍이었다.
“재밌었나 봐요?”
말없이 빵을 베어물던 아이릴이 가늘게 뜬 눈으로 둘을 번갈아 봤다. 그녀는 간밤의 일을 진작 알고 있었
다. 어렴풋하게 소리가 들렸다.
“뭐, 음….”
유선우가 멋쩍게 볼을 긁었다. 그는 예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온 경험자였다.
하지만 그때는 항상 배 째라는 식으로 일관했었다. 전부 깊은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지금은 둘 모두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쓰레기 같긴 하나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굉장히요.”
유선우가 머뭇거리자 박아연이 대답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웃으며 아이릴과 시선을 맞췄다. 얌전히 쭈그
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잘됐네요, 언니.”
먼저 눈을 피한 아이릴이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냥 빈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박아연의 마음이 가볍
지 않음을 알았다.
박아연은 고맙다며 생긋거리곤 유선우의 팔을 끌었다.
‘분위기 봐라.’
미묘한 공기에 유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부 자업자득이었다.
***
유선우의 여행은 며칠간 더 이어졌다.
포스바에서 휴식을 취한 뒤로는 다 무너진 협곡으로 향해 격을 흡수했다.
재생된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참혹했다. 인간의 시체가 가득한 장소에서 소수의 강자만이 날뛰었다.
과거의 유선우는 안광을 흩뿌리며 악마들을 도살했다. 피칠갑을 한 그의 모습은 인간들의 눈에도 악귀로
비쳤다.
유선우는 그들의 감정마저 전부 받아들였다. 묘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안고서 전장을 눈에 새겼다. 죽
은 전우의 얼굴을 보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다음으로는 북쪽의 끝으로 이동해 광활한 평원에 도착했다. 마지막 전투가 있던 그곳의 경치는 여전했
다.
“기분 나쁘네요, 여기.”
아이릴이 인상을 찌푸리며 평원을 둘러봤다. 악마의 피와 살점이 녹아내린 땅은 사방이 시커멨다. 마치
벌레가 우글거리는 듯했다. 이 토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저도 전에 몇 번 왔었는데, 정화는 도저히….”
“또 안 듣고 있다.”
쉬발이 말꼬리를 잘랐다. 아이릴은 떨떠름한 낯으로 유선우를 쳐다봤다.
그는 이번에도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없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진짜 맨날 뭐 하는 거래.”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릴의 눈빛엔 걱정이 어렸다. 근래 유선우는 눈에 띄게 건강을 되찾아 여러 방면에서
팔팔해졌다. 하지만 이 기행만큼은 그만두질 않았다.
안 그래도 정신병 증세가 의심되는 상황에 묘한 짓거리까지 더해졌다. 아이릴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시선을 모르는 유선우는 어김없이 재생되는 영상을 관람했다.
현재와 기억의 경치는 일치했다. 평원을 적신 검은 피가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뭐지?’
그런데 상황이 달랐다. 23살의 유선우와 마주하는 바알의 생김새가 달랐다. 본래보다 흉악해 보는 것만
으로도 혐오감이 들었다.
그 이상으로 특이한 점은 병력이었다. 과거의 유선우는 기억하는 대로 단신이었지만, 악마가 반백이고
몬스터는 벌레 떼처럼 무수했다.
사실과는 판이했다. 당시에 그는 놈들을 천천히 죽여나갔었기에 끝에는 악마가 몇 없었다. 말로만 결전
이지 그냥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지금 초점에 맺힌 것은 대군이었다. 실재와 허구가 뒤섞였다.
‘알 수가 없네. 나 설마 지냐?’
유선우는 어처구니없어하며 과거의 자신을 지켜봤다.
23살의 유선우가 창을 휘둘렀다. 일격에 악마의 목이 잘려나갔다. 단 한 번의 찌르기로 천 단위의 몬스터
가 터져 나갔다.
말 그대로 일인군단이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기합성을 내지르며 천지를 누빈다. 보면 볼수록 유선우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렸다.
‘내가 저렇게 셌었다고?’
기억하기로는 아니었다. 고작 창질 몇 번에 만 마리의 몬스터를 잡지는 못했었다.
바알을 쌈 싸 먹기는 했었어도 만일 병력이 온전했었더라면 홀로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눈앞의 자신은 해내고 있었다. 전차처럼 군세를 밀고 나가 바알의 눈알을 도려냈다.
‘사람이 아닌데.’
유선우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초월자라기엔 턱없이 부족해도 인간이라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괴물이었다. 과거의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바알의 심장을 꿰뚫었다.
‘어떻게 된 거지?’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장면이 그대로 반영된다면 터무니없는 격을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최소 원인은 알고 싶었다. 유선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
고민에 잠겨 있던 유선우가 탄성을 흘렸다. 생각해보니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목격자가 없구나.’
본 놈들은 전부 죽어 평원에 흩뿌려졌다. 그런데도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선우가 바알을 죽였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상상하고, 살을 덧붙인다. 업적이란 그런 것이다. 유선우는 격을 받아들이며 몇 번이
나 타인의 감정을 느꼈었다.
우러름과 두려움.
이 경우엔 그것들이 큰 영향을 미쳤을 터였다.
‘스승님이 그러셨지.’
타인의 눈으로 어떻게 보였는지가 중요하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남들의 감정이 영향력으로 치환된
다.
백명의 말이 옳다면 이 경우엔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군에게 유선우는 길고 길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영웅. 한편 적군에겐 창 한 자루만 쥐고 달려와 군대를 베어 넘긴 귀신이다.
‘내가 저렇게 보였다는 거 아냐.’
유선우가 반쯤 허구인 자신을 바라봤다. 어째선지 눈알이 핏빛이다. 안광을 레이저처럼 쏴대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으어어어어!”
이젠 괴상한 행동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바알의 시체에서 목을 잘라내곤 뿔을 붙잡는
다.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붕붕 돌려서 바닥에 쾅 찍어버린다.
고인 능욕도 저만한 게 없었다.
‘아, 저건 진짜로 했었나?’
어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일단 각색이라고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좀 인성이 되바라져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