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유선우와 펠리스는 동굴을 빠져나왔다. 둘의 손에는 별다른 물건이 들려 있지 않았다. 대신에 유선우의
허리춤에 매달린 아공간 주머니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벌, 벌, 천벌…….”
펠리스가 거무죽죽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에 푸른 머리칼이 떨어지는 모습이 비
쳤다. 희희낙락 입구를 걸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선대 님을 뵐 낯이 없어요.”
“괜찮다니까. 편하게 생각해. 기껏 낫고 있는데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지.”
“생각해보면 비늘이 문제가 아니었는데….”
애초에 탈모의 원인도 유선우였다. 막무가내식 행동과 요구는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펠리스를 괴
롭혔다. 이번에도 결국은 병 주고 약을 줬을 뿐이다.
‘또 당했어.’
펠리스는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한편으로는 거절했어도 똑같은 결과가 되었으리
라는 예감도 들었다.
유선우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방법이 온건한지 아닌지의 차이였다.
“하아.”
몸도 마음도 보물도 빼앗긴 펠리스가 유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원망 어린 시선에 유선우가 멋쩍게 볼
을 긁었다.
“그보다 아까 뭐랬더라. 아브나바가 직접 내려줬었댔나. 아무도 못 쓰는 거라면서.”
유선우는 아공간 주머니에 시선을 줬다. 정체 모를 새하얀 창도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그보다라니… 하아. 복잡한 일은 아니에요. 갑자기 아브나바 님께서 그 검을 전하시곤 그러시더군요. 필
멸자는 못 쓰는 무기이니 맡아만 두라고요.”
“그게 다야?”
“네. 특이한 점이라면… 목소리가 조금 다급하셨었죠.”
당시를 떠올린 펠리스가 의아하게 말했다. 그녀의 안에서도 여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에 기억이 선명
했다.
“언제 일인데?”
“아마 9년 전이었을 거예요.”
“꽤 최근이네. 내가 여기 왔을 땐가?”
유선우는 수염이 조금 자란 턱을 매만졌다. 펠리스가 신기하다는 어조로 말을 받았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래도 관련은 없겠죠.”
“왜?”
“쓰라고 주신 거라면 진작 창고에서 나와 있었을 테니까요. 지금은 결국 나와버렸지만.”
펠리스의 음성에 다시 한숨이 섞였다.
아브나바는 온화할지라도 신앙의 대상이었다. 지시를 어긴 벌을 받게 될 날이 두려웠다.
“네가 걱정하는 일 절대 안 생겨. 진짜로. 걔랑 친하다니까?”
“그야 총애하신다고는 들었어요. 그래도 저희가 그분과 같나요.”
펠리스에게 유선우는 주인님이고 아브나바는 신이었다. 천칭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는 재볼 필요
도 없었다.
그녀의 태도가 답답해진 유선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람 말을 못 믿네. 내가 거짓말한 적 있어? 쉬발이 죽어도 너처럼 되기 싫다고 했던 것도 진짠데.”
“……정말인가요?”
“그래. 용왕 되고 싶다고도 했었고.”
“망할 늙은이. 약한 게 욕심만 많아서는.”
펠리스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녀도 유선우의 말을 마냥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굳이 이간질할 이
유도 없었다.
“어쩌려고?”
“궁금하신가요?”
반문하는 목소리가 서릿발같이 서늘하다. 펠리스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권위에 도전하는 이를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둥지에 돌아간다면 한차례의 피바람이 불게
될 터였다.
“아니. 나름 알 것 같아. 그 대신에 좋은 생각이 있는데.”
“…생각?”
유선우가 히죽 웃었다.
“걔도 빌릴게.”
***
일을 마친 뒤에는 산맥에서 벗어나 도시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곳을 목표로 삼았음에도 비행은 오래간
계속되었다.
용이 사는 산맥의 인근에는 이렇다 할 도시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동수단인 쉬발이 뭉그적거렸기 때
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최측근인 저를…!”
“최측근은 무슨. 용족이 몇 마리나 남았다고 그런 것까지 나눠?”
“제가 얼마나 고생해서 펠리시르 님을 떠받쳤는데. 이렇게 버려지는 게 말이나 되냔 말입니다!”
펠리스는 쉬발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유선우를 상급자로 대하며 그의 명령을 성심껏 수행하라. 얼
핏 보면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동행 기간이었다.
펠리스는 특별히 기간을 정해주지 않았다.
복귀 권한은 전적으로 유선우에게 일임되었다. 내킬 때까지, 쓸모없어질 때까지 데리고 다니라는 소리였
다.
“자업자득이지, 인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럴 수가 있네.”
유선우가 피식거리며 쉬발의 뿔을 두드렸다.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바람도 쐬고 좋지. 저쪽 가면 재밌는 구경도 많이 할 텐데.”
“저쪽이라뇨?”
“저쪽이라면 저쪽이지 뭐야.”
“…설마 저도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
쉬발은 당연하게도 유선우의 출신을 알았다. 이전에 성녀가 넘어갔었다는 것도 알았고.
“응. 싫어?”
“저, 절대 싫습니다!”
쉬발은 지구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유선우의 출신지는 위험이 범람하는 무
법지대였다.
그도 그럴 게, 괴물같이 강한 유선우가 죽기 직전까지 몰렸었다. 어떤 괴물들이 산재할지 모르는 일이었
다.
“제가 그런 위험한 곳을 어떻게 갑니까. 선처해주십시오. 제 딸이 애비 없는 놈이라는 소리 듣게 하고 싶
지 않습니다.”
“뭘 딸까지 들먹여. 그렇게 위험한 데는 아니야. 이상한 착각을 하네.”
유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용도 패드립은 치는 모양이었다.
“나중엔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안 데려다준다. 갔다 와서 잘 기억해뒀다가 손주들한테 썰 풀어.”
“가기 싫습니다. 무릎 꿇고 싹싹 빌면 됩니까?”
“될 리가… 아니다. 한 번 해봐.”
“진짜 합니다?”
“어. 생각해볼게.”
좀 재밌어 보였다.
***
저벅저벅.
아이릴은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도시의 골목길을 걸었다. 아티팩트로 변장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칙칙한
적색이었다. 처음에는 환한 금발로 설정했었지만, 이젠 그냥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 죽겠어요…. 선우, 어디서 묵을까요?”
“그냥 조용한 여관. 아무도 안 엮일 만한 데로.”
유선우가 피곤한 낯으로 말을 받았다. 박아연과 쉬발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당
장 침대에 퍼질러 잠들고 싶었다.
“뭔 씨. 도시 들어오는 게 이렇게 힘들어.”
넷은 우여곡절 끝에 이곳, 포스바의 문턱을 넘었다.
처음은 피곤했던 탓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신분을 숨긴 채 문지기에게 뒷돈을 찔렀
다.
홀라당 처먹고 경비대장을 부르더라.
달려온 경비대장도 뻔뻔하게 돈을 요구했다.
결국은 빡이 친 유선우가 전부 엎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면 입 닥치라고 협박을 했다.
그때 웬 졸부 차림의 남자가 끼어들어 꿀꿀거렸다. 그놈도 때렸다.
막무가내식으로 입장했더니 다음은 경비대와 연줄이 있는 건달들이 나타났다. 어디 거친 남자들 아니랄
까 봐, 아이릴과 박아연을 보고 침을 다셨다.
다 때렸다.
죄다 엎어버리자 귀족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그냥 신분을 드러낼까 고민하던 차에 영주마저 여자에
눈이 돌아갔다.
귀족도 때렸다.
엉덩이를 걷어차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다음부턴 아예 용 타고 들어와야겠어.”
“그럼 제가 화살 맞습니다. 맞으면 아픕니다. 아프면 싫습니다.”
“말투 뭐야. 이상한 컨셉 좀 잡지 마.”
유선우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걸었다. 골목에서 벗어나자 적당히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큰 소란이 있었음에도 거리엔 활기가 가득했다. 졸부가 처맞든 귀족이 처맞든, 평민이나 천민들이 알 바
는 아니었다.
툭.
험상궂은 과일상이 썩은 사과 하나를 으슥한 골목에 던졌다. 고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앙상
한 놈들끼리 다퉈, 적당히 살집 있는 놈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저놈은 며칠 더 굶겠다.”
“네?”
“아니야. 도시가 왜 이렇게 심심해. 평범하네.”
“축제 기간도 아니니까요.”
“여긴 축제도 노잼일 거 같은데.”
유선우는 하품을 내뱉으며 과일상에게 다가갔다. 사과는 새파랗고 오렌지는 새빨갛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도 자연은 다르다.
투두둑.
과일을 아무거나 골라잡아 한 아름 사들고는 골목에 대충 던졌다. 고아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몇몇은 탐욕 어린 눈빛으로 유선우를 응시했다.
“뭘 봐.”
유선우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시선이 흩어졌다. 살집 있는 녀석만 여전히 눈을 떼지 않았다. 볼이 까져 피
가 흐르는 낯이 멍하게 벙 쪄있다.
“…….”
“뭘 보냐고.”
유선우는 무감정하게 말하곤 사과 하나를 집었다. 크게 베어 물자 표정이 대번에 떫어졌다.
“아재, 이거 썩었는데요?”
“뭐요? 댁이 잘 봤어야지.”
“에이, 입 버렸네.”
유선우가 먹다 만 사과를 골목에 툭 던졌다. 멍청하게 서 있던 고아 놈이 화들짝 놀라고는 허둥지둥 잡아
챘다.
빼앗길세라 허겁지겁 사과를 씹어먹는다. 놈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저, 저기….”
“아, 뭘 보냐고! 확 마!”
“히익!”
아이가 냅다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헛짓거리하는 유선우를 보는 과일상의 시선이 묘하다.
“형씨. 머리 괜찮으쇼?”
“지나가는 사람 뚫어지라 보잖아요. 기분 나쁘게스리. 하여튼 실례했습니다.”
“나야 뭐, 돈만 받으면 상관은 없는데….”
“여기요. 많이 파십쇼.”
유선우는 썩은 사과값까지 지불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릴은 태연하게 그와 발을 맞췄다. 박아연과
쉬발은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지금 뭐였어요? 되게 의외네.”
쫄래쫄래 따라붙은 박아연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가요?”
“선우 씨는 저런 거 신경 안 쓸 줄 알았거든요.”
“전 그쪽이 신경 쓸 줄 알았는데.”
“저도 교회에서만 지내진 않았으니까요.”
박아연은 자주 돌아다니지는 않았어도 3년간 여러 인간군상을 봐 왔다. 고아나 천민들을 보는 것도 이젠
익숙했다.
“박아연 씨는 애들 별로 안 좋아하나 봐요?”
“그럭저럭요. 저런 애들은 동질감이야 좀 들긴 해도 나설 정도는 아니라서.”
“성격도 복잡하시네.”
유선우의 기억 속에서 박아연은 호구나 다름없는 선인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던전까지 들어가는
이상한 사람.
그런데도 애들을 나서서 도와주진 않는단다. 신기한 여자였다.
“선우 씨는요? 애들 좋아해요?”
“음….”
유선우는 턱을 매만지다가 옅게 웃었다.
“네. 그럭저럭요.”
***
‘그냥 그렇네.’
유선우는 적당히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가 있는 장소는 여관의 1인실이었다. 아이릴과 박아연은
2인실을 사용했고, 쉬발은 1인실을 사용했다.
낭비였지만 유선우는 쉬발과 함께 잘 생각이 없었다. 쉬발의 코 고는 소리가 개 같이 시끄럽기 때문이다.
‘바로 자자.’
유선우는 마력을 일으켜 등을 껐다. 그는 오랜만에 아침까지 푹 잘 예정이었다.
평소였다면 두세 시간쯤 지나 아이릴에게 불려갔겠다만 오늘은 그녀도 오지 않을 터. 매일매일 고생해 피
곤해진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이제 두 곳 남았나.’
찾아갈 기억 속의 전장은 앞으로 두 장소. 홀로 악마를 10체가량 도살했던 협곡과 바알을 처리했던 평원
이다. 유선우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알맹이였다.
‘바알은 잘 모르겠네.’
바알 처단은 혈혈단신으로 행동해 이룩해낸 업적이다. 목격자가 없었는데 격으로 인정이 될지 어떨지 확
신이 서지 않았다.
‘가봐야 알겠지.’
유선우는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로 지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부모님과 동생, 연인과 친구. 머릿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3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버려진 동네와 반파된 집이었다. 귀환하자마자 봤었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유선우는 이번에 보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준비했다. 억지로 쉬발을 데려왔고, 밤의 왕국과 용족의 창고를 털었다.
충분할 만큼 많은 것을 손에 쥐었다. 지구에서도 거리낌 없이 창을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저번엔 너무 신중했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협회장. 고작 잡놈을 하나 잡을 뿐인데도 많은 수고를 들였었다.
항상 남의 눈을 신경 쓰면서 움직였었고, 사회적 강자들과 교섭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신중하게 움직일 여유가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넘어야 할 벽은 신계다. 자갈을 신경 쓸 시간이 아깝다.
‘같잖은 새끼들이 방해한다면…….’
걷어차 길 밖으로 치워낼 뿐이다.
유선우의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