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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21화 (121/179)

화려한 휴가

여행도 길어지다 보면 일정이 규칙적으로 변해가기 마련. 이동수단이 버스이든 비행기이든 관련 없이 일

정한 패턴이 생긴다. 진귀한 용을 타고 돌아다니는 유선우도 마찬가지였다.

기억 속의 전장을 순회하며 격을 받아들인다. 다시 공중을 누비다가 해가 떨어지면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야영한다.

고즈넉한 새벽이 찾아오면 아이릴과 둘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아침이 되면 밤에 뭘 했는지 눈가가 퀭한

박아연을 은근슬쩍 놀리고.

유선우와 아이릴에게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쉬발은 무급으로 혹사당했고 박아연은 내내 수면 부족에 시

달렸다.

‘참 이상한 여자야.’

쉬발의 뿔을 고삐처럼 쥔 유선우가 고개만 돌려 박아연을 쳐다봤다. 오묘한 시선이었다.

‘왜 맨날 엿보는 거지? 이해가 안 되네.’

어제의 박아연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유선우와 아이릴의 뒤를 밟았다. 잔뜩 지쳐서도 엿보기를 그만두질

않으니 집착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박아연 씨, 괜찮아요?”

“네, 네? 아, 네. 네에…….”

“정신 차려요. 떨어지면 어쩌려고.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빨간 포션 드려?”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웃음 짓는 안색이 파리하다. 유선우는 못마땅하게 혀를 두어 번 찼다.

“용왕한테 갔다가 근처 도시라도 들립시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 저 때문에 늦어지면 안 되죠. 뭐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유선우의 행동도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 내려가 멍하

니 서 있기만 하고 돌아오니까.

그가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반복하니 아이릴로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우 때문에라도 쉬는 게 맞아요. 생각해보면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들었죠? 부담 갖지 말고요. 여행 와서 몸 상하면 안 되지.”

“…그것도 그러네요. 어떤 도시예요?”

“그냥저냥 지낼 만해요.”

유선우는 기억이 희미해서 건성으로 얼버무렸다. 그래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빈곤한 도

시에서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었다.

괜찮은 여관이 없더라면 영주의 저택에서 머물면 되니까. 유선우가 머물겠다는데 거절할 간 큰 놈은 찾기

도 힘들다.

“일단 일부터 마칩시다.”

“뿔은 그만 잡으십시오.”

“슬슬 너도 익숙해졌잖아.”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유선우는 핸들을 다루듯 두 뿔을 잡고 쉬발을 몰았다. 큼지막한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머지않아 흐릿한 산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탈모 용왕의 둥지가 가까워졌다.

***

펠리스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한 손으로 용기를 쥐었다. 그녀는 찌푸린 눈으로 빨간 포션을 요모조

모 뜯어봤다.

“이건… 피인가요?”

“보면 알잖아.”

“피를 왜 제게?”

주저앉은 채로 유선우를 올려다보는 펠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흉한 몰골을 보여주는 것이 미

치도록 창피했다. 일행을 떼어놓고 홀로 온 유선우의 배려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르시아한테서 받아왔어. 충분할지는 몰라도.”

“……저 때문에?”

“네가 그,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나 때문인 거잖아. 케어는 해줘야지.”

“선우 님….”

동공의 흔들림이 격렬해졌다. 금색의 눈에 물기가 차올라 애처롭게 빛났다. 펠리스는 머리를 가리느라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은혜는 무슨. 안 그래도 돼.”

“아니요. 제 이름을 걸고서라도-”

“나는 있잖아.”

유선우가 말꼬리를 잘랐다. 그의 입가가 반원을 그렸다. 서늘한 웃음에 펠리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말로만 하는 감사는 잘 안 믿어.”

온화하던 분위기가 얼어붙어 긴장감이 차올랐다.

날을 세운 공기가 펠리스의 두피를 쿡쿡 찔렀다.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맥없이 끊어

졌다.

“딱딱한 말이긴 해도 이해해줘. 내 성격 알잖아. 우리 사이가 그 정도는 되니까. 그렇지?”

“우, 우리 사이….”

의미심장한 말에 펠리스의 목울대가 무겁게 넘어갔다.

그녀는 유선우의 종이었다.

도구이자 창고이며 탈것이었다.

콧대 높은 용족의 왕이라도 유선우에게는 거역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마뱀 꼬치구이가 되어 노점상의 철

판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난 네가 꽤 마음에 들어. 비주얼 좋고, 순종적이면서 능력도 있고.”

“과분한 말씀이세요.”

“아니야, 아니야. 지금 말한 건 다 곁다리 수준이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을 빼먹었네.”

유선우가 펠리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이를 어루만지듯 상냥한 손길이었다.

“아….”

펠리스는 거부하기는커녕 몸에서 힘을 축 뺐다. 안기듯 기댄 그녀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주인님의 자애

로운 얼굴이 보였다.

“가진 게 참 많더라. 역시 오래 살아서 그런가?”

“물건 말씀이신가요? 제가 가진 거라곤 이 둥지뿐인데.”

“겸손이 심하네. 용족의 보물창고가 얼마나 유명한데.”

몽롱하던 펠리스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튀어 올랐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푸른 머리칼을 흩날리며 도리질

했다.

“그건 제 개인 소유물이 아니에요. 용왕이 대대로 수호를 맡아왔을 뿐이지….”

“지금 왕은 너고. 먼지만 먹는 보물이 네 비늘보다 소중할까? 글쎄.”

“하, 하지만 균형을 지키는 게 제 일인걸요.”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네 창고 털어다가 뭘 하겠어? 나라라도 부술까 봐? 그쯤이야 맨손으로도 할 수 있

어. 꼭 필요한 건 아니고, 그냥 서로 신뢰용으로 몇 개 맡아두겠다는 거야.”

유선우는 시종일관 온화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자신과 마주할 때, 펠리스는 유약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

다. 윽박지르면 거북이가 등딱지에 숨듯이 움츠릴 터였다.

“아, 안 되는데.”

펠리스는 시선을 내리깔고 우물쭈물했다. 용족의 창고가 열린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전쟁 때에

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더더욱 열려서는 안 되었다. 분란의 불씨가 될 우려가 컸다.

‘귀찮게 구네.’

유선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의 눈가가 차갑게 식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시는 건가요?”

“그야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네가 용왕인데 말이야. 아직은.”

“…아직?”

묘한 뉘앙스에 펠리스의 눈매가 좁아졌다.

“쉬발이 그러더라고. 비늘 없는 용왕에겐 품위도 없다나 뭐라나.”

“쉬발라가….”

“죽어도 너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도 했지.”

“죽어도 말인가요.”

흘러나오는 음성이 무감정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의 기억이 재생되었다. 유선우를 데려와 숨이

넘어가라 웃어젖힌 쉬발라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했다.

“과연. 그래서 선우 님을 데려온 거였어요.”

유선우는 대륙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용왕을 갈아치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그런 인물과 동행해 현 용왕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쉬발라의 계략처럼 느껴졌다.

빠득, 빠드득.

합리적 의심을 품은 펠리스가 이를 갈았다. 젊은 용왕 펠리시르의 칼은 날카롭다.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펠리스가 소심하게 대하는 사람은 유선우뿐이었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로 통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유선우가 펠리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펠리스의 낯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

유선우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동굴을 걸었다. 어둑한 아가리가 끝없이 이어져 통행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하지만 유선우의 낯에 꺼림칙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탐욕으로 눈이 번뜩거렸다.

“저번에도 생각했던 건데, 좀 허술하지 않나? 무슨 장치도 없고.”

“용족이 지키는 곳이니까요. 저희가 뚫리면 어떤 장치도 의미가 없죠.”

“내가 털어버릴 걸 그랬다.”

유선우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 농담으로 받아들인 펠리스는 기품 있게 생긋 웃었다.

“후회하셨을걸요. 허가 없이 입장하면 동굴이 무너지게 되어있거든요. 아예 얻지 못하도록. 그 정도론 부

서지지 않는 무구도 있지만, 무구 종류는 오히려 적은 편이에요.”

“잘 기억 안 나네. 전엔 자세히 안 봤었지.”

어깨를 으쓱인 유선우는 앞장서는 펠리스를 바라봤다.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아왔고 땜빵이 눈에 띄게 사

라졌다. 전부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금세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터였다.

“그런데 정말로…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뭐야. 먹고 입 싹 씻는 거야?”

“저희는 아브나바 님의 명령으로 여길 지키는 거예요. 잘못되면 벌이 내려올지도 몰라요.”

“괜찮아. 걔 지금 바빠.”

“걔라니, 불경해요.”

“불경은 무슨. 혹시 아브나바가 갈구면 나한테 말해.”

유선우는 대충 내뱉곤 발걸음을 재촉했다.

펠리스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제 머리를 만졌다. 손바닥을 펼쳐보자 세 가닥이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아.”

한숨이 인생만큼 무겁다.

***

창고의 내부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휘황찬란한 빛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모든 물건에 먼

지가 먹구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벌 받아도 싸다. 관리가 네 일이라며?”

“아무도 안 쓰는 걸 청소해서 뭐하나요?”

“…하긴.”

떠름하게 수긍한 유선우는 물건들을 살폈다. 펠리스의 말대로 무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해봐야 열 개 안

팎. 이외에는 능력을 알 수 없는 액세서리와 다양한 소품들이었다.

“이건 뭐야?”

유선우가 특색 없는 고동색의 가죽 주머니를 들고 물었다.

“아공간 주머니예요. 흔한 물건이지만 용량은 흔치 않죠.”

“응. 빌릴게.”

“…조심해주세요. 찢어지면 산 하나쯤은 날아갈 테니까.”

“알아, 알아. 이건?”

이번에는 하얀색의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누리끼리한 녹만 봐도 오래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변장 도구예요.”

“잡템 아니야? 마법 쓰면 되잖아.”

“일반적으로 쓰이는 변장 마법은 외형을 달리 보이게 만드는 거죠. 그거랑은 달라요. 사용하면 인간이 쥐

로 변할 수도 있고… 변형에 가깝겠네요.”

“응. 빌릴게.”

유선우는 아공간 주머니를 벌려 그 안에 반지를 넣었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펠리스의 뺨이 움찔거렸

다.

“어라.”

문득 유선우의 눈이 구석으로 향했다. 이목을 끈 것은 먹물에 적신 듯 전신이 새까만 검이었다. 게임에서

오류가 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생김새였다.

“신기하게 생겼네. 느낌도 묘하고.”

유선우가 검을 쥐고는 휙휙 돌려대며 주의 깊게 살폈다. 다른 물건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검에는 마력

이 아니라 간섭력이 깃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하기로 431-9 차원에 간섭력을 사용하는 놈은 없었다.

“엔라, 이거 뭐야?”

- 난 몰라. 아브나바가 알겠지. 간섭력이라도 넣어봐.

“어떻게 되려나.”

“그건 안 돼요! 아브나바 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키이이잉!

검에서 청명한 쇠의 울림이 들려왔다. 유선우가 주입한 간섭력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검은 울음을 토해내며 찬란한 백광에 휘감겼다. 어두운 실내에서 직격으로 눈뽕을 당한 유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오, 눈부셔.”

그는 불평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간섭력을 불어넣을수록 검이 발하는 빛이 강해졌다.

새까맣던 부분이 전부 사라지자 광채가 압축되어 형태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도 못 쓸 거라고 하셨는데.”

지켜보던 펠리스가 혼란스럽게 말했다. 이전에 아브나바는 검을 건네주며 필멸자가 쓸 무기가 아니라고

전했었다. 그저 맡아두기만 하라고 덧붙이면서.

하지만 펠리스의 눈에 담긴 장면은 들었던 바와 판이했다. 검은 어느덧 유선우에게 맞춰 창으로 변해 있

었다.

우우웅!

창이 유선우의 손안에서 경쾌한 울음을 흘렸다. 새까맣던 색도 완전히 반전되어 눈처럼 새하얀 빛깔을 띠

었다.

“음.”

유선우가 서커스 하듯이 창대를 붕붕 돌렸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창을 가지고 놀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

다.

“이것도 빌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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