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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20화 (120/179)

화려한 휴가

영상은 5분도 이어지지 않고 금세 끊어졌다.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유선우를 자극하는 데는 충분했다.

‘망할 년.’

유선우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옛날 일이었기에 조금이나마 언짢음이 덜어져 가고 있었건

만. 타인의 시선으로 보게 되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오르시아는 유선우에게 있어 아이릴 버금가는 은인이었다. 목숨을 구해줬고, 자기 피를 빨간 포션처럼

챙겨줬다. 사이가 단절된 이후에도 그녀는 알게 모르게 그를 도와줬다.

헌신적인 여자였다.

관계 회복은 둘째치고서 죽여서는 안 되었다.

그는 은혜도 모르는 금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오, 짜증 나네.’

갈 곳 없는 화를 억누른 유선우가 백발의 노인을 쳐다봤다. 낯익지는 않아도 약간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너, 누구였지?”

“섭섭한 말씀을. 질레이옵니다.”

“질레…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네. 시종이었나?”

“미천한 제겐 과분한 일이지요.”

질레는 오르시아의 말에 따라 채찍과 미약을 가져오던 놈이었다. 떠올리자 유선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

었다가, 다시 온기를 되찾았다.

‘그래도 그나마 얘가 잘 챙겨줬었지.’

오르시아가 보지 않을 때 인간의 식사를 준비해주던 은인이 질레였다. 그때의 밥은 산 정상에서 먹는 컵

라면처럼 맛있었다.

“됐다. 근데 뭐 하러 모였대.”

“공께서 오셨으니 당연히 모여야겠지 않습니까.”

“나인 건 어떻게 알았고?”

“공께는 표식이 있으니까요.”

“응?”

의아한 목소리에 질레가 유선우의 옆구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유선우는 시선을 따라 자신의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맞다. 아직 안 없어졌었지.”

옷을 들춰보니 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살갗이 보였다. 불꽃인지 그냥 꽃인지 모를 붉은색의 표식. 이전

에 오르시아에 의해 새겨졌던 놈이다.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아이릴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으니, 결국 못 지웠다는 건데.”

“성녀 말씀이시군요. 당연합니다.”

“그래? 저주 종류 아닌가.”

아이릴은 성녀답게 해주의 스페셜리스트다. 저주를 건 인물이 흡혈여왕일지라도 어렵잖게 지울 수 있을

터. 그런데 표식은 아직 선명했다. 유선우가 잠들어 있던 3년간 발견하긴 했을 텐데도.

“그럴 리가요. 왕께서 공의 몸에 저주를 왜 거시겠습니까.”

“어, 아니야?”

“이전에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마는… 하긴. 그땐 상황이 좋지 않았었지요.”

질레는 혼자 말하고는 제멋대로 납득했다. 표식이 새겨질 당시에 유선우는 정신이 오락가락했었다. 당연

히 설명도 똑바로 듣지 못했으리라.

“왕의 부군이라는 증거입니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으음… 결혼반지겠군요.”

“꺼져. 이혼해.”

“하하. 농담도 심하십니다.”

유선우의 낯이 악귀처럼 험악하게 구겨졌다. 심상찮은 기세에 질레가 흠칫거리고는 헛기침했다.

“고, 공께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득도 안 되겠지.”

유선우가 차갑게 내뱉으며 옆구리를 매만졌다.

‘오르시아를 죽이면 없어지려나.’

방금까진 생각이 없었다마는 심각하게 고려를 해야 할 듯싶다. 살심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질레의 동공이

살짝 떨렸다.

“득이 안 되다니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부군의 증거라고.”

“그래서?”

유선우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질레가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희는 공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

“왕의 명과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선우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단순히 말해 자신이 밤의 왕국의 서열 2위가 되었다는 뜻이다.

솔직히 당장은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륙을 뒤덮던 위험이라면 이미 제거했으니 병력을 운용할 일

이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나쁘지 않다. 앞으로도 431-9 차원에 종종 들리게 될 터. 어지간해선 큰일은

안 생기겠지만 유비무환이라. 귀찮은 놈들은 어디서나 나타나기 마련이다.

‘은근히 괜찮은데?’

흡혈귀들은 기본적으로 능력이 뛰어나다. 밖으로 돌리면 정보도 잘 가져오고, 피를 팔면 돈도 된다.

짜증 나는 놈들에게 보내면 물어서 권속으로 만들 수도 있다. 아니면 피를 지구에 가져가서 장사할 수도

있고.

종합적으로 보면 효용성은 썩어 넘치는 수준. 편하게 써먹을 수 있는 장기말이 손에 들어오는 셈이다.

‘오르시아가 걸리기는 하는데.’

부군이다 뭐다 해도 이곳의 왕은 오르시아다. 지금은 잠들어 있더라도 슬슬 깨어날 때가 되었겠지. 그녀

가 깨어난다면 권한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다.

‘근데 별문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오르시아는 유선우를 괴롭히곤 했었다. 그러나 악감정에서 비롯된 행위는 아니었다.

호의를 이상한 식으로 표현하니 사적으로는 개 같았었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었다.

‘일로만 대하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

본인이 설치면 교육 좀 해주면 된다. 리디에게도 지는 오르시아가 유선우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결론을

내리자 유선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알았어. 괜찮겠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하, 왕께서 들으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일어나면 말해주던가. 그보다.”

유선우가 히죽거렸다.

“명령, 당장 할 수 있는 건가?”

“당연합니다. 애초에 공께서 인정하지 않으셨을 뿐이지, 표식이 새겨진 지는 제법 되었으니까요.”

“그래. 그럼 하나만 시키자.”

만족스럽게 말한 유선우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칙칙한 잿빛의 궁전이 있었다. 그의 눈에는 휘

황찬란한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내가 말하는 거, 다 가져와.”

***

유선우는 짐을 바리바리 싸맨 채 지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온몸에는 각종 액세서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

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혼수품.”

“……뭐라고요?”

“별일 아니야. 일단 잠깐 와봐.”

유선우가 눈썹을 찌푸린 아이릴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는 그녀가 챙겨온 가죽 백을 풀고는 전리품을 죄다

쑤셔 넣었다.

밤의 왕국에서 얻은 전리품은 총 14개였다.

질레를 압박해 약탈하다시피 가져온 아티팩트가 일곱. 나머지 일곱은 오르시아의 피를 담은 용기였다.

“피를 뭐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습니까?”

“혹시 몰라서 그냥.”

처음에는 몰래 한두 병만 챙길 셈이었다만, 걸려버렸으니 뽕을 뽑았다. 질레의 표정이 상당히 떫었지만

뭐 어쩌라고. 정신적으로 충격받았었던 위자료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부족하다.

“선우 씨, 방금 넣은 게 다 뭐예요?”

“별거 아니에요. 투명망토, 마력 증폭 반지 등등.”

“…설마 훔쳐 오신 겁니까?”

쉬발이 기가 막힌 기색으로 물었다. 유선우는 도리어 자기가 어처구니없다는 양 헛웃음을 쳤다.

“내가 넌 줄 알아? 훔칠 거면 아예 다 털어왔지. 허락받고 가져온 거야.”

강압과 협박의 결과였지만 상관없다. 가져가선 곤란한 물건이라면 질레도 필사적으로 거부했을 테니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창고 정리를 도와준 셈이다.

“어디다 쓰려고요? 당신한텐 필요도 없을 텐데.”

가죽 백을 쳐다보던 아이릴이 의아하게 말했다. 이름값만으로도 남들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위인이

유선우다. 그런 그에게 아티팩트가 필요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돌아갈 때 가져가려고.”

유선우는 항상 한 가지 일을 후회하고는 했다. 지구로 귀환할 때 맨손으로 돌아갔던 일이었다.

당시엔 431-9 차원에 흘러왔을 때처럼 발가벗겨지리라고 생각했었기에 구태여 챙기지 않았었다.

정작 돌아가 보니 아니더라.

토를 했을 뿐, 옷은 그대로였다.

이번엔 교훈을 살려 쓸 만한 놈들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

붉은 숲에서 나온 뒤에는 용왕의 둥지를 목적지로 삼아 이동했다. 중간중간 샛길로 빠져 전장을 들렸고,

예상대로 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비행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쉬발이 피로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나약하다, 나약해. 용 맞아?”

“직접 날아보시든가요. 허억!”

“이젠 말 막 하네.”

유선우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휴식을 선언했다. 용이 사는 산맥에서부터 사흘 밤낮을 고속으로 날아온 것

이다. 강인한 용에게도 강행군이었을 터였다.

야영지로 선택된 장소는 녹음이 우거진 숲이었다. 전문가 유선우와 아이릴 덕에 야영 준비는 금방이었

다.

요리는 유선우가 맡았는데, 그가 끓인 수프는 확실히 일품이었다. 고인물다운 실력 덕분에 일행은 만족

스러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저 이런 거 처음이에요.”

“뭐요?”

“야영이요. 캠핑도 한 번도 못 해봤거든요.”

모닥불 앞에 앉은 박아연은 제법 들뜬 기색이었다. 용을 타는 데도 익숙해진 그녀는 현재 상황을 여행으

로 받아들였다.

“어릴 때 수련회는 가봤잖아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돈 때문에 수련회도 한 번밖에 못 가봤고.”

“아니, 분위기 어쩔 거야.”

“그냥 그랬다는 거예요.”

흙수저 박아연은 출렁거리는 불길을 보다가 유선우를 곁눈질했다. 둘은 한 칸을 비우고 나란히 앉아 있었

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둘 사이로 떨어졌다.

“…….”

그녀의 시선이 빈자리에 머물렀다. 싫은 간격이었다.

“하여튼 지금은 잘 사니까 됐죠. 이런 경험을 달리 누가 해봤겠어요?”

“저랑 쟤요.”

유선우는 식사의 뒤처리를 하는 아이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성녀답지 않게 그녀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요리 재능이 처참한 그녀라도 설거지 실력은 뛰어났다.

“별 신기한 데 다 가보고, 못할 경험 많이 해봤죠. 분위기는 좀 딱딱했지만요. 주로 저 때문에.”

“앞으로는 저도 끼워줄래요? 둘만 하지 말고.”

“생각해보고요.”

가볍게 피식거린 유선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박아연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은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밤을 밝혔다.

***

“으응…….”

새우잠을 자던 박아연이 몸을 뒤척거렸다. 불어온 찬바람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흐으으….”

박아연은 부르르 떨면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 번 잠들면 어지간해선 깨어나지 않는 그녀도

추위에는 버티지 못했다.

화륵.

박아연의 손바닥 위에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숲에 거주하는 정령. 그녀는 정령 중에서도 불의 정령과

가장 상성이 잘 맞았다.

‘좀 살겠다.’

몸을 녹이며 눈알을 빙그르르 굴렸다. 주변을 확인하자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어라. 없네.’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릴과 유선우였다. 쉬발은 아무것도 모르고 요란하게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어디 갔지?’

졸음이 달아난 박아연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였다면 산책하나 보다, 하며 넘어갔을 터인데

오늘은 달랐다.

이유 모를 야릇한 예감. 그리고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둘이 야밤에 무엇을 하며 싸돌아다니는지 보고 싶

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인 채로 숲속을 걸었다. 무턱대고 시작한 행동이었지만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바람의 정령은 탐색에 활용하기에 제격이었다. 친화력이 높지는 않아도 간단한 부탁을 할 정도는 되었

다.

박아연은 정령이 가르쳐주는 대로 발을 내디뎠다. 걷다 보니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불더니만, 호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멀리도 갔네.’

정령은 그녀를 호수로 이끌었다. 무성한 나무들을 헤쳐 지나간 끝에 호수가 드러났다. 수면은 달빛을 받

아 선연한 푸른색으로 반짝거렸다.

박아연은 환상적인 경치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녀가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선우와 아이릴의 목소리. 아니, 숨소리.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지 호흡의 간격이 짧다.

박아연은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을 돌려보니 먼발치에서 엄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번에 교회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어쨌든.

‘미쳤어!’

박아연은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걸음을 되돌렸다. 되돌리려고 했

다.

하지만 어째선지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미, 미쳤어…….’

그녀는 결국 망부석처럼 제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숨을 죽인 채로, 숲을 맴도는 달뜬 숨소리를 들었

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다음날 햇빛 아래에 드러난 박아연의 눈가는 조금 검었다. 민낯인데도 화장이 번진 듯 보였다.

“언니, 잘 못 잤어요? 얼굴이 퀭한데.”

“네? 아, 네. 바닥이 딱딱해서….”

“처음에는 힘들죠. 저도 그랬어요.”

아이릴이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박아연은 어색한 웃음만 흘릴 따름이었다. 잠들지 않은 건 둘 다

마찬가지였는데도 한 명만 피로에 절어 있었다.

‘저 사람 참.’

유선우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박아연을 쳐다봤다. 그는 간밤의 일을 전부 눈치채고 있었다.

박아연이 자신과 아이릴을 훔쳐봤다는 사실과, 보고서 돌아가기는커녕 홀로 엄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으으음.’

강렬한 예감이 유선우의 가슴을 울렸다. 앞으로의 여행이 조금 자극적으로 변하리라는 예감이.

단순한 착각은 아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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