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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19화 (119/179)

화려한 휴가

대륙의 동쪽에는 붉은색으로 뒤덮인 숲이 존재한다. 그 음산한 숲에는 흡혈귀들의 거주지인 밤의 왕국의

통로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통로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천 년간 풍화되지 않은 바위 아래, 말라비틀어진 고목 내

부.

전부 확실치 않다. 추측만이 무성할 뿐이다. 그러나 한동안 밤의 왕국의 손님이었던 유선우는 길에 관해

서도 빠삭했다.

“여기면 되려나.”

“아, 아무것도 없는데요?”

박아연은 몸을 으슬으슬 떨며 숲을 둘러봤다. 나뭇잎도 붉고, 나무줄기와 바위도 붉다.

온통 피투성이 같아 정신이 이상해질 듯했다. 공포영화도 잘 못 보는 그녀에게 이처럼 으스스한 스팟은

쥐약이었다.

“언니, 왜 그렇게 떨어요?”

“아, 안 떨었어요. 내가 왜. 여차하면 다 태워버리면 되는데.”

“그러다 저주받아요. 매일 생리한다던가.”

“끔찍해….”

아이릴의 말에 박아연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졌다.

한편 유선우는 거리를 재듯 주변을 빙빙 돌았다. 몇 바퀴를 돌고서야 그가 바닥에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았

다.

“삽이… 하, 낙원에선 편했는데.”

혼잣말을 내뱉은 유선우가 얼음 삽을 만들었다.

“자, 받아.”

일행에게 하나씩 건네줬다. 자신도 하나를 쥔 뒤에 삽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팝시다.”

“갑자기 땅을 왜 파십니까?”

“너 정도 짬이면 알지 않나? 이 밑이야.”

“그야 압니다만….”

폴리모프한 쉬발이 의아하게 말을 흐렸다. 유선우의 말대로 밤의 왕국은 숲의 지하에 있다.

하지만 입구가 따로 존재한다.

흡혈귀들이 땅 파서 드나들 리가 없었다.

“정식절차 밟으면 오래 걸려. 그리고 귀찮아져. 후딱 갔다 오려면 이게 맞아.”

그러니까 닥치고 파.

덧붙인 유선우는 삽질을 시작했다.

푸욱!

아이릴도 그를 따랐다. 성녀로서 유선우와 한동안 동행했었던 그녀는 이런 일에도 익숙했다.

“으음….”

쉬발과 박아연도 머뭇머뭇 삽을 잡았다. 일행 사이에는 남녀와 종족의 차별이 없었다.

카가각!

10분가량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삽질의 소리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단단한 광석을 긁는 소리와 함께 반

탄력이 손아귀를 강타했다.

“으.”

낯을 찌푸린 박아연이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줘봐요.”

유선우가 무심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아이릴에게 내밀었다. 금세 회복을 받은 박아연은 멍한 눈빛으로 유

선우를 바라봤다.

“고, 고마워요.”

“왜 저한테 말해요?”

“…그러네요.”

머쓱하게 웃은 그녀가 다시 아이릴에게 감사를 표했다. 잠깐의 대화 후에 유선우가 바닥을 발로 두드렸

다.

흙이 걷어진 지면에는 잿빛의 광석이 보였다. 겉면이 제법 매끄러운 놈이었다.

“여기서 내려가면 바로 궁전일 거예요. 거기서 후딱 피 뽑고 오면 끝이죠.”

“잠시만요. 어떻게 내려갑니까? 문은 없어 보이는데.”

“부숴서 가야죠.”

쉬발의 말에 아이릴이 대답했다. 그녀는 유선우의 행동방식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귀찮으면 다 부순다. 그게 끝이다.

“잘 아네. 근데 다 갈 필요는 없고. 쉬발, 따라와.”

“…왜 접니까?”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

“아, 그랬습니다. 발모제였죠.”

발모제라는 말에 두 여성이 쉬발을 쳐다봤다. 머리를 확인하는 표정이 미묘하다.

“저, 저 아닙니다! 용왕께서 쓰시는 겁니다!”

“…그 여자가 발모제를요?”

“너 진짜….”

하필이면 펠리스의 지인한테 퍼뜨리고 자빠졌다. 유선우는 쉬발의 처우를 고민하다가 한숨만 쉬었다.

“그냥 혼자 갔다 온다. 자리 옮길 준비나 해.”

그의 손가락에 짙푸른 검기가 맺혔다. 협곡에서의 수련 덕분인지 형태가 안정적이었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고정되어 있어 마치 고체처럼 보였다.

“허어.”

경지의 편린을 알아본 쉬발은 눈을 의심했다. 3년간 쓰러져 있었는데도 실력이 무뎌지기는커녕 더 강해

졌다. 괴물이 괴물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키이이이!

유선우의 손가락이 닿는 대로 바닥이 잘려나간다. 쉬발은 자신의 몸이 저 잿빛의 광석처럼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유선우는 자신의 몸이 충분히 들어갈 크기의 구멍을 뚫어냈다. 뚜껑처럼 떼어낸 광석은 낙하하지 않도록

지상에 올려다 놨다.

“대기하고 있어. 밑에 애들 따라오면 귀찮아지니까.”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왕이 자고 있는데 멋대로 따라오진 않겠죠.”

“애들이 날 좀 좋아하거든.”

소곤거린 유선우는 구멍 아래로 몸을 던졌다. 3초간 낙하한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밟아 공중에 섰

다. 밑을 내려다보니 회색의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하네.’

유선우는 담담한 눈빛으로 도시를 살펴봤다. 계산이 틀렸는지 궁전이 조금 멀다. 그는 신선처럼 허공을

거닐어 도시 안으로 다가갔다.

이동하면서 하나둘 시선을 느꼈다. 주위가 점차 웅성거린다. 구멍에서 빛이 내려오는 탓이다.

유선우는 개의치 않고 궁전으로 들어갔다. 대리석과 비슷한 자재로 만들어진 건축물. 실내에는 의지할

빛줄기 하나가 없어 발걸음을 두렵게 한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잘만 보이지만 예전은 아니었다. 유선우는 복잡한 감상을 품은 채로 복도를 달렸

다.

기억을 되짚으며 향한 곳은 왕의 침실이었다. 마력으로 문을 열자 하얗고 빨간 침대가 보였다.

잿빛의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색감의 침대. 그 위에는 한 여성이 가지런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오르시아.’

유선우는 무심하게 오르시아를 내려다봤다. 하얀 피부에 옅은 회색 머리카락. 굳게 닫힌 눈 안에는 루비

처럼 빨간 눈동자가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근데 제대로 당했네.’

오르시아의 복부에는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다. 어지간한 상처는 금세 회복되는 몸인데도 피가 마르지 않

았다. 그만큼 리디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뜻이다.

유선우는 제법 감회가 새로웠다. 리디는 옛적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사 하나 이기지 못했었다.

그녀도 재능이 뛰어났기에 금세 강자가 되었다마는 오르시아를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재작년이라 했었나.’

충돌은 2년 전 일이라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

그렇다면 그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룩해낸 것일까.

아니, 멍청한 소리다.

‘그냥 내가 몰랐던 거구나.’

당시에는 귀환에 급급했던 나머지 주변을 잘 둘러보지 못했었다. 동료가 답답하다면서 혈혈단신으로 적

지에 쳐들어갈 정도였었다.

제자라고 성실하게 돌봤을 리가 없었다. 리디가 서운해하던 것도 당연했다.

‘됐다.’

유선우는 잡념을 떨쳐냈다. 이상한 감상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저 제자의 성취가 생각보다 높았을 뿐. 좋

은 일이니 돌아가서 칭찬 좀 해주면 되겠지.

기억에 새겨둔 유선우는 행동을 시작했다. 그는 얼음의 용기를 만들어 오르시아에게 가져갔다.

말라붙지 않은 끈적한 피가 용기에 담겨 얼음을 붉게 물들인다. 워낙 흥건한지라 가득 차는 것은 금방이

었다.

유선우는 용기의 윗부분에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오

르시아의 목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목에는 붉은색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금이 쩍쩍 갈라진 보석, 다 헤진 가죽 줄.

볼품없는 생김새였다.

“이건 좀 버려라, 야.”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유선우는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졌다. 뻔하게도 그가 선물한 놈이었다.

유선우와 오르시아의 관계는 묘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시작은 뻔했다.

유선우는 오르시아에게 목숨을 구원받았고, 자연스레 사이가 가까워졌다.

만날 때면 입도 맞췄고, 더한 일도 했다.

서로가 원해서 서로를 품었다.

오르시아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깊은 사이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유선우는 아니었다. 그는 돌아갈 사람이었기에 진지한 관계는 걸림돌이었다.

오르시아는 유선우의 태도에 분개해 그를 가뒀다.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귀환을 방해했고, 그는 실

제로 한 달을 빼앗겼다.

결과적으로는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지만 세상이 어디 결과만으로 돌아가나. 탈출한 유선우는 결국 오르

시아를 잘라냈다.

그게 전부였다.

“아오. 찝찝하게.”

- 걱정 안 된다며?

“어. 안 돼.”

난데없는 목소리에도 유선우는 당황하는 일 없이 대답했다. 엔라가 말을 걸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 근데 이상하네.

“뭐가?”

- 그, 음. 나랑 비교하면 얜 덜 쓰레기였잖아.

“어휘력 좀 봐라.”

덜 쓰레기란다. 머리가 빈곤해 보이는 표현이다.

- 하, 하여튼. 아직 끌고 있는 게 답지도 않다 싶어서.

“그건 그렇지.”

지금에 이르러선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귀환은 거머쥐었다. 이젠 차원을 오갈 방법도 존재한다.

감정을 문제 삼기엔 엔라마저 받아들였다. 오르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사실 끌고 있는 건 아니고.”

하지만 유선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얜 머리가 좀 이상해.”

- …그건 그래.

“목조르기 같은 건 더는 못하겠더라.”

오르시아는 극도의 SM충이었다.

양측을 전부 좋아했다.

때리기를 좋아하고 맞기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오르시아도 숨겼지만 갈수록 느낌이 싸해지더라. 그녀는 점차 끼를 드러내며 도를 넘고는 했

다.

새파래진 얼굴로 황홀하게 웃는 모습이 어찌나 무섭던지. 침 뱉어달라 할 때는 솔직히 뺨을 때리고 싶었

다.

참았던 이유는 순전히 은혜 때문이었다. 오르시아가 자신을 구해준 횟수가 열 번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내도 거기까지였다.

“어우, 소름 돋아.”

회상한 유선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등을 돌렸다.

앞으로 이곳엔 볼 일도 없다.

***

궁전에서 나와 지상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돌연 회색 도시 곳곳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유선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어둠 속을 살폈다. 포착된 그림자의 수는 어림잡아도 오십이 넘었다.

나름대로 은밀하게 행동했건만. 주민들의 눈에는 잘만 보인 모양이었다.

오십도 적잖은 숫자인데, 인영은 갈수록 늘어났다. 궁전을 포위하듯이 둘러싼 그림자들. 그들은 밤의 왕

국의 백성이었다.

흡혈귀들의 차갑게 이글거리는 시선이 유선우에게 일제히 쏘아졌다. 무리 중 하나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자,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다가온 인물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몸을 경련하듯 떨다가 눈물을 훔쳤다.

“유선우 공, 드디어 와주셨습니까.”

“…….”

“오래 기다렸습니다. 저희도, 왕께서도. 혹여나 이미 뵈어보셨는지.”

유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어라?’

그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궁전 앞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흡혈귀들이 가득했다.

- 왕의 부군께 예를 표하라!

광장에 모인 수백의 흡혈귀들은 질서정연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귀한 밤의 일족이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것은 업적이었다.

‘이거 그거잖아.’

유선우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했다. 낙원에서 숱하게 겪어왔던, 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

다. 그는 낙원을 떠나기 전에 백명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곳을 둘러보아라.

모자람을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의 말은 이번에도 옳았다.

여러모로 예상 밖의 소득이었다. 전장을 둘러볼 셈이었지, 밤의 왕국에서 격을 얻어낼 수 있을 줄은 꿈에

도 몰랐다.

하지만 유선우는 만족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그는 떨리는 눈으로 궁전의 발코니를 바라봤다.

그곳에선 개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 아핫, 아하하하! 너는 내 것이다. 영원히 내 것이야!

그리 외치는 오르시아는 채찍을 들고 있었고,

- 아악, 아아아아악!

유선우는 사지를 묶인 채 얻어맞고 있었다.

발가벗고 눈가리개만 찬 상태로.

발코니에서, 공개적으로.

‘이게 업적이야? 어?’

유선우의 이마에 혈관이 빠득빠득 돋았다. 분노를 불태우는 와중에도 영상은 계속되었다.

- 개처럼 헐떡이는구나. 그 얼굴을 내… 아니, 우리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거라.

- 꺼져, 죽어, 죽어…!

- 아직 교육이 덜 되었나. 재갈을 가져오너라.

- 싫어. 싫어어어!

구경하던 놈들이 수백이었다.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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