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유선우는 렌탈한 자가용을 이끌어 브뤼켈로 향했다. 용에게는 바람 저항 가호 옵션이 딸려 있기에 승차감
은 나쁘지 않았다.
유일한 문제는 시간이었다.
“역시 펠리스보단 못하네.”
“당연합니다. 제가 그분만큼 뛰어나다면 진작 용왕이 됐겠죠.”
“오, 뭐야. 용왕 해먹고 싶어? 도와줄까?”
“…정말입니까?”
“아니. 빨리 가기나 해. 늦겠다.”
유선우가 황제에게 말해뒀던 도착 예정 시각은 정오였다. 슬슬 햇살이 강해지는 것을 보니 브뤼켈은 퍼레
이드 준비가 한창일 터. 속도를 내지 않으면 도착이 지연될 우려가 있었다.
“이랴!”
타악!
“악!”
유선우는 길쭉한 얼음 봉을 만들어 쉬발의 몸통을 때렸다. 기마술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탈것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이대로 인성도 잡아줘야겠어.’
펠리스는 아직도 여러 가지를 떨어뜨리며 울고 있겠지. 상처받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쉬발의 인성교육은
필요했다.
***
“하아암.”
박아연은 하품을 뱉으며 브뤼켈의 시내를 터덜터덜 걸었다. 정오가 다 될 무렵이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몽
롱했다.
‘패턴 완전히 깨졌네.’
기나긴 마차 생활의 여파였다. 그곳에선 잠자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생체리듬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으, 시끄러워.’
피곤해하는 박아연과는 다르게 주변에는 활기가 넘쳤다. 주름이 선명한 노인부터 코흘리개 아이까지 얼
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황성에서 공지한 퍼레이드가 원인이었다.
“어, 어디 이상한 곳 없지?”
“예. 아름다우십니다.”
“그치? 그치? 날 기억하실까?”
“당연하죠. 편지도 받으셨으니까요.”
광장에는 평민뿐만이 아니라 귀족도 상당수 자리해 있었다. 느닷없는 공지였음에도 그들의 낯에는 불만
이 없었다.
“대통령보다 인기 많네.”
박아연은 자리의 분위기가 묘하게 낯간지러웠다. 광장을 빈틈없이 채운 사람 떼가 전부 유선우를 기다리
고 있다는 게 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구는 잘 모르지만… 여기엔 선우보다 이미지 좋은 사람은 없어요.”
아이릴이 실실거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박아연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릴은 마법으로 변장한 상태였다.
혼란을 우려해 황성의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또한, 그녀는 큼직한 가죽 백을 지니고 있었다. 갖가지 야영 용품으로 가득 찬 백이었다.
“좀 신기해요. 여기서면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 지구를 고집할 이유가 있는지.”
“돌아가면 어디 못 사나요? 능력만 있으면 어딜 가든 잘 먹고 잘 살 수 있죠.”
“그것도 그렇구나.”
“언니는 돌아가기 싫어요?”
“술이 너무 맛있어서….”
“으, 그런 걸 뭐하러 먹는대.”
아이릴은 자몽이라도 씹은 것처럼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알코올 쓰레기인 그녀는 술이라면 치를 떨었다.
반면 술 생각을 하니 박아연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마시라고 있는 건데 마셔야죠. 체나 님이 몇 병 주셨는데-”
뿌우우우!
그때 나팔소리가 울렸다. 광장이 극도로 떠들썩해졌다.
“오, 오신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하늘로 향했다. 그 끝에서는 비늘이 멋들어진 흑룡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용이 다가오자 황성에서 파견된 기사들이 주변을 통제했다.
“저희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처음부터 통제는 하고 있었다만 문제는 생기기 마련. 거만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걷는 귀족 자제가 그 문
제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그를 쥐뿔도 신경 쓰지 않고 투명한 벽을 둘렀다.
공무원들의 분전 덕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곳곳에서 억, 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전부였다.
곧 위용 넘치는 자태로 허공을 가로지른 쉬발이 브뤼켈에 도착했다. 유선우는 브레이크를 밟고자 쉬발의
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아, 아, 아, 아아아!”
“어허, 시끄러워.”
가까이서 보면 우스울지라도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다. 말 그대로 영웅의 모습이었다. 얼굴도 곱
상하니 그림이 따로 없었다.
“허, 와…….”
생전 처음 용을 본 박아연도 멍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유선우가 돈도 많으면서 차 하나 안 사는 게 이상했
었는데, 지금은 이해가 됐다.
용을 타는데 람보르기니에 만족할 리가 없지.
“야, 날개 접어서 잘 내려가. 뭐 부수면 네 뿔도 부서져.”
“명심하겠습니다.”
“근데 너도 은근히 즐기네. 좋냐?”
“뭐랄까 이게… 근질근질하네요. 조상님이 인간들 돌보시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시켜줄게.”
“충성입니다.”
쉬발은 대화하면서도 살짝살짝 움직여 제 몸을 뽐냈다. 피식거린 유선우는 쉬발의 등에서 단숨에 낙하했
다.
내려가니 곳곳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선우는 자신이 상당한 관종임을 인정했다.
‘좋다, 좋아.’
지구에서는 별의별 씨벌 것들이 트집 잡고 난리가 났었는데. 홈그라운드에선 메시 호날두 저리 가라다.
유선우의 눈이 광장을 훑었다. 인파가 바글거렸으나 그의 감각은 특정 인물들을 정확히 찾아냈다. 박아
연과 아이릴이었다.
다행히도 말해둔 대로 가장 앞줄에 서 있었다. 리디는 없었는데, 유선우가 일이나 하라며 인원에서 제외
했다.
유선우는 마법사가 쳐둔 투명한 벽을 손짓으로 허물었다. 그가 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타.”
흔한 말도 클라스가 달랐다.
***
“꺄아아아아악!”
“닥쳐라, 여자!”
“이거 안 떨어져요? 떠, 떨어질 거 같은데!”
“비늘 뜯지도 마라!”
“조, 조, 조, 좀만 잡을게요!”
쉬발의 등에 올라탄 박아연이 글썽거리며 외쳤다. 그녀는 처음엔 황홀감에 젖어 있었지만 비행이 시작되
자 절규만 해댔다.
산파에 시달리는 임산부처럼 보이는 사물을 죄다 팍팍 뜯는다. 그게 다 비늘이었다. 떨어진 비늘만 벌써
열 개가 넘었다. 일반인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아니, 이번엔 고소공포증이에요?”
“이게 고소공포증이 문제예요? 현대 사람이면… 꺄아아악!”
“그냥 비행기라고 생각해요.”
“안 타봤어요!”
흙수저로 태어난 박아연은 제주도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 변변찮은 수저마저 어린 나이에 떨어뜨렸고,
헌터가 된 이후론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고로 그녀의 첫 비행은 바로 지금이었다.
“보기 드문 사람이네. 아이릴 잡아요.”
“아이릴 씨요? 잡을 데가 어딨다고 잡아요.”
“그럼 저 잡던가요. 귀찮게 왜 이래?”
“나,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박아연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머뭇머뭇 유선우를 쳐다봤다. 평소였다면 그냥 잡았겠다만, 교회에서 봤던
그와 아이릴의 그렇고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비늘 말고 아무거나 잡아라, 이 년아!”
“죄, 죄송해요!”
흠칫거린 박아연이 유선우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앞으로 비늘이 떨어질 때마다 네년의 사지를 하나씩 씹어먹을-”
“야.”
얼음꼬챙이를 쥔 유선우가 쉬발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쉬발은 움찔 몸을 떨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뭐라 하지 마십시오. 이러다가 제가 펠리시르 님처럼 되면 책임지실 겁니까?”
“너 걔 싫어하지?”
“복잡한 감정은 있습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제가 용왕이 됐을 테니까요.”
“어우, 다행이네. 네가 됐으면 네 피 빨았을 거 아냐. 걔 피는 잘 괜찮았는데 넌 좀 그래.”
유선우는 펠리스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피를 마시는 데 강한 저항감이 있던 그에게도 그녀의 피는
일품이었다.
“그 여자가 왜요? 맨날 바쁘다 하던데.”
용왕의 얘기가 나오자 아이릴이 물었다.
“그런 게 있어. 복잡해.”
“복잡하면 됐어요.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고.”
매몰찬 말에 유선우는 작게 피식거렸다. 그의 기억 속에서도 아이릴은 남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
본적으로 타인에게 온화하게 대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은 성녀라는 위치 때문이었다.
‘근데 둘이 친해진 거 같던데. 신기하네.’
유선우는 고개만 뒤로 돌려 박아연을 쳐다봤다. 박아연이나 아이릴이나 서로 성격이 까다로워 맞물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맞다. 걔는 요즘 뭐 한대?”
“누구요?”
“그, 오르시… 발.”
“아, 오르시아.”
오르시아는 흡혈여왕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유선우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여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
는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도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선우 씨, 왜 그래요?”
“아니요. 갑자기 좀 덥네. 후우.”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년의 기억은 선명했다. 감금 조교를 당했었던 한 달간의 기억. 그건 평생 잊지 못
할 터였다.
“사실, 음….”
아이릴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문을 열었다.
“재작년에 그쪽에서 협박문이 왔었어요.”
“…협박?”
“당신 안 넘기면 강제로 데려가겠다고요.”
“그래서?”
유선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세를 물었다. 듣기도 전부터 예상이 갔다. 오르시아는 빠꾸
없는 여자다.
“진짜로 쳐들어 왔었죠. 군대까진 아니고 소수정예로. 뭐, 당연하지만 맞고 돌아갔어요. 상처가 좀 심했
다던데.”
“걔가 어디 가서 맞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당신 제자가 때려잡았어요. 못 들었어요?”
“리디가? 들은 거 없어.”
“배려했나 보네요.”
흡혈여왕은 431-9 차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다. 그런 인물을 막은 것은 자랑하기에 차고 넘
치는 공훈이었다.
그런데도 리디는 일언반구조차 꺼내지 않았다. 이는 아이릴의 말대로 배려였다. 그녀는 제 스승의 트라
우마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에 승진했다고 했었지.”
“얘기는 원래부터 오가고 있었는데, 그걸로 쐐기를 박았다던가. 그렇게 들었어요.”
“누구한테?”
“라일라 황녀한테요. 병실에서 저는 개무시하고 별말 다 떠들던데요?”
“걘 언제 한번 거하게 실수할 거 같다.”
“실수야 벌써 했죠.”
돌연 아이릴의 음성이 서늘해졌다.
“제 눈 밖에 났으니까. 뻘짓거리하는 순간 확….”
“…넌 왜 항상 화나 있어?”
유선우는 떠름하게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한동안 아이릴을 케어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근데 부상이 심하다고?”
“설마 걱정돼요?”
“아니, 뭔 걱정이야. 그냥 묻는 거지.”
“선우. 그년은 안 돼요. 정말로.”
아이릴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오르시아와 유선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둘은 3개월간 밤의 왕국에서 동거했었다.
자세하지는 못해도 꽤 사이가 좋았다던가.
하지만 어느 날 돌연 파국이 찾아왔다.
갑자기 정신이 나갔는지 오르시아가 유선우를 제 궁전에 감금한 것이다. 가둬놓고는 매혹 마법이나 체벌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조교하려 했었다고.
유선우는 감금당한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강해졌다고 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결국 자
력으로 탈출했고, 이후론 오르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이번엔 제 말 들어요. 그년은….”
“그게 아니라.”
유선우는 아이릴의 걱정과는 달리 걱정이라곤 쥐뿔도 없었다.
“다쳤으면 지금 자는 거 아니야?”
“…아마도요?”
흡혈귀는 깊은 상처를 입으면 동면하듯 잠든다. 이를테면 회복기다. 회복기를 거친 후에는 더욱 강인한
몸이 되어 깨어난다.
오르시아도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을 터다. 만약 멀쩡하다면 진작 설치고 있었겠지. 하지만 최근에 그
녀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쉬발. 방향 좀 돌려. 그쪽부터 들려야겠다.”
“서, 선우 씨?”
잠자코 듣고 있던 박아연이 유선우의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왜요?”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긴 해도… 안 가면 안 되나요?”
박아연에게는 유선우가 옛 연인을 질질 끄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녀는 그 결과가 대부분 좋지 않다는 것
을 잘 알았다. 경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었다.
“그냥 겸사겸사 가는 거예요. 어차피 그쪽도 들려야 하니까.”
“다들 말은 그렇게 하죠.”
“아니, 드라마를 너무 보셨는데.”
유선우에게 미련 따윈 없었다. 애초에 그는 오르시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에
게 향하는 이유는 달리 있었다.
“이상한 걱정 좀 하지 맙시다. 피 뽑으러 가는 거니까.”
“……피요? 취향이 많이 독특한….”
“아, 제발 개소리하지 마요 진짜.”
유선우가 혀를 끌끌 찼다.
“걔 피는 특별하거든요. 엘릭서보다 좋아요.”
“엘릭서면 무슨 포션 같은 거요?”
“네. 잘 아시네.”
“나름대로요.”
박아연은 지구에서 지낼 때 이따금 판타지와 무협 소설을 읽곤 했었다. 취미라기보다는 능력을 다채롭게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녀가 엘릭서를 모를 리가 없었다.
“마시면 재생력이 오지게 오르거든요. 인간도 트롤 뺨치게 되죠. 그 정도로 유지되는 건 잠시뿐이지만.”
“그런 걸 어디다가 쓰시려고….”
유선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발모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