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다
한바탕 눈물을 짜낸 뒤로 리디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평소의 귀신 같은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이었다.
상관의 생소한 얼굴에 기사들이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엄청 친해 보이네.”
“그야 사제지간이니 당연하지 않겠나.”
“그냥 과장인 줄 알았지.”
“저도 그렇습니다. 뭐라고 할지… 드라이한 관계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마탑처럼요.”
마탑의 마법사들은 철저히 이익을 따져 사제의 관계를 맺는다. 제자는 스승의 이름과 지식을 빌리고, 스
승은 가르침의 대가로 인맥의 소개나 재물 따위를 받는다.
이를테면 상부상조의 형식이다.
유선우와 리디의 사이도 이따금 메마르게 비추어지곤 했다. 고위 관계자는 둘의 유대를 알지만, 리디의
부하들은 쉬이 믿지 못했다.
그들에게 유선우는 황제보다도 먼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변인이 영웅의 제자라는 건 현실감이 없
었다.
“알고 보니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지금까진 대단찮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건 아닌데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느낌이.”
“아, 악수 부탁드려도 되나?”
남들이 떠들수록 리디의 콧대는 높아져 갔다. 그녀는 유선우를 데리고 황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내가 이 사람과 친하다, 하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그저 제 스승에게 경외의 시선이
향해지는 것이 가슴 벅차고 즐거웠다.
“스승님. 오늘부터는 어디서 지내실 겁니까?”
“일단은 이대로 교회에서 지낼걸.”
“그럼 저도 교회에서 자야겠습니다.”
유선우는 발을 멈추고 떨떠름하게 리디를 바라봤다. 달라붙어서는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 모습이 영
락없이 강아지 같았다.
“일 안 하냐?”
“이게 제 일입니다.”
“나랑 잡담하는 게?”
“그렇습니다. 폐하도 전하도 인정하실 겁니다.”
“그야 인정은 하겠지.”
어떻게든 유선우를 잡아두는 편이 제국에는 이득이다. 아예 휴가까지 던져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며칠만 있다가 좀 돌아다니려고.”
“어디로 가십니까?”
“레 뭐시기 평원이랑 브 뭐시기 산맥이랑 등등. 마차 타야 하나. 불편한데.”
“레이스 평원에 브라자 산맥입니까. 멀리도 가시는군요.”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내심 감탄하고 있는 유선우에게 리디가 말했다.
“용왕 부르셔서 태워달라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야, 너 머리 좋구나.”
“과찬이십니다.”
“근데 걘 안 바쁘대?”
용왕은 거창한 칭호 그대로 용들의 우두머리다. 여타 집단이 그렇듯 수장이란 엉덩이가 무겁기 마련. 며
칠씩이나 시간을 받기는 힘들 터였다.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합니까?”
“응?”
“스승님 일인데 만사 제쳐놓고 와야지. 제깟 게 뭐라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할 겁
니다.”
“……아, 응.”
“제 말이 틀렸습니까?”
리디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난다.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어린 양처럼 순종적이다.
‘얘 성격이 어쩌다가 이렇게…….’
이래서는 시집도 가기 힘들지 않을까. 정략결혼이야 어디서든 가능하겠다마는 연애결혼은 글쎄. 말하는
꼴 봐서는 데이트할 때 불러도 달려올 것 같았다.
유선우는 속으로 탄식하다가 문득 생각이 미쳤다.
‘나 때문인가?’
기억을 짚어보면 리디가 옛날부터 이 모양은 아니었다. 오히려 야생동물처럼 매번 발톱을 세우곤 했었
다.
당시에는 그게 귀찮아서 불평할 때마다 때렸었다. 2년이 넘도록 그런 생활을 보냈으니 길들여질 만도 했
다.
‘뭐 어때.’
성가시게 구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
유선우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여드레가 지났다.
그날도 아르테 제국의 수도, 브뤼켈에서는 수많은 마차가 통행하고 있었다.
그중 한 대의 마차는 검문소를 넘자마자 여성의 그림자를 토해냈다. 유선우의 소식을 들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박아연이었다.
“하아, 하아!”
마차에서 내린 박아연은 교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길을 잘 알지는 못해도 문제는 없었다. 총본산은 아
닌지라 교회 건물이 거대하진 않지만, 목적지로 삼을 크기는 됐다.
박아연은 광인처럼 달려 교회에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의 인사를 대충대충 넘기며 복도
를 지나갔다.
‘어라.’
병실의 근처에는 못 보던 여성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성의 눈은 유선우의 병실에 고정된 상태였
다. 그런데 어째선지 들어가기 힘들다는 듯 머뭇거렸다.
박아연은 여성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냥 지나쳤다. 아무래도 오지랖이었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유선우를 만나고 싶었다.
“자, 잠시만요!”
다가가자 여성 쪽에서 박아연을 제지했다. 박아연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봤
다.
“네?”
“그, 여기 교회 분이신가요?”
“한동안 여기서 살았었죠.”
괜한 의심을 살까 관계자임을 입증했다. 여성은 제가 말을 꺼내놓고 한참을 주춤거렸다.
“할 말 없으시면 이만. 제가 좀 바빠서요.”
“아, 저기…!”
박아연은 만류하는 여성을 무시한 채로 병실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리자 저항이 느껴졌다. 그새 또 문고
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거칠고 몰상식한 놈들이 몇 번이고 드나든 탓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힘껏 악력을 넣어 문고리를 비틀었다. 경첩이 불쾌한 소음을 흘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아이릴과 유선우의 조금 엄한 장면을.
“…….”
“잠깐, 아니, 이거는 그…!”
박아연은 말없이 문을 닫아줬다. 문 너머로 괴성이 들리는 듯했지만 착각이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멍한 낯으로 등을 돌렸다. 붉은 머리의 여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하하….”
거북한 웃음소리가 겹쳤다.
***
유선우의 병실 안에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아이릴은 부끄러움에 머리를 들지 못했다. 반면 박아연은 멋쩍게 목덜미를 쓰다듬었고, 리디는 무표정하
면서도 귀만 붉었다.
“크흠!”
유선우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행히도 이런저런 냄새와 열기는 환기한 지 오래였다.
“왔으면 말을 하지.”
얼굴에 철판을 깐 그가 리디에게 말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야 음….”
“노크하려고 다가가니 목소리가 들려서. 옛날처럼 눈치껏 대기했습니다.”
“옛날?”
의아하다는 목소리에 리디는 기억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전에 저와 같이 다니셨을 때도 이따금 문을 잠그셨었죠.”
“그, 그거는 인마. 어?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랬었던 거지.”
“그다음에 방을 청소하면 항상 머리카락이 나오곤 했었습니다. 녹색, 갈색, 회색, 노란색, 파란색….”
리디가 색깔을 나열하며 손가락을 접어갔다. 색이 뭐가 그리 많은지 손가락 열 개가 금세 다 접혔다.
아닌 척 곁눈질하던 아이릴이 유선우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어째 살이 없고 다 근육이라 꼬집기도
힘들었다.
“혈기왕성했던 때지. 암.”
유선우는 그냥 뻔뻔하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박아연에게 눈을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박아연 씨.”
“…정신 차려서 다행이에요.”
“다 들었어요. 간호해줬다면서요.”
“그냥, 뭐. 가끔요.”
박아연이 볼을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교회에서 생활할 적의 그녀는 하루의 태반을 병실에서 보내곤 했
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는 낯부끄러웠다.
“고마워요. 이것저것.”
유선우도 아이릴에게 들었기에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굳이 꼬집지는 않았다. 흐뭇하게 마주 웃은 그가 창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을 두드리는 햇볕이 화사하다.
아르테 제국은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새삼스럽긴 한데, 제가 살던 데가 여기예요.”
창밖의 작은 정원에는 목련을 닮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유선우에겐 제국의 경치가 아직 신선했
다.
“어때요?”
“글쎄요. 빈말로도 재밌는 곳이라곤 못하겠네요.”
“하긴 뭐. TV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노잼이죠, 노잼.”
“그래도 좋아요. 맘에 들어.”
박아연이 생긋거리며 곱게 눈웃음쳤다.
“선우 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알게 됐고요. 여러모로.”
“좋은 쪽으로 여러모로였으면 하는데.”
“평소에 잘했어야죠.”
“잘했을걸요, 아마도.”
“하긴. 그러니까 다들 좋아라 하는 거겠죠.”
오히려 너무 잘해서 문제였다. 유선우가 깨어난 지 2주가 지났음에도 병실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맞다. 거기 갔다 왔다면서요? 망할 꼬맹이들 사는 데.”
“…꼬맹이요?”
“저도 예전에 들렸었는데, 가자마자 돌팔매질 오지게 당했었거든요. 버르장머리 없는 쉐끼들.”
“저는 그냥 무시당했었습니다.”
요정은 상대방의 속내를 어느 정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당시 독기에 차 있었던 유선우는 그들
에게 둘도 없는 악당이었다.
반면에 리디는 친화력이 부족해 철저하게 무시당했었고.
“근데 이분은?”
“제 제자요. 가끔 말했었죠?”
“아, 반가워요. 혹시 멀리 사시나요? 한 번도 못 뵀던 거 같은데….”
박아연이 리디를 쳐다보며 묘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그녀의 말대로 리디는 유선우가 일어나기 전에도 병
문안을 온 적이 없었다.
리디는 매번 교회 근처에서 어물쩍거리다가 발을 돌리고는 했었다. 완벽한 무인이라 생각했던 스승이 사
경을 헤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요. 일어나니까 갑자기 달라붙어.”
그것을 언짢게 여긴 아이릴이 툴툴거렸다. 리디는 변명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튼 박아연 씨는 많이 달라졌네요. 음… 축하해야 하나?”
유선우의 눈이 박아연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녀에게 달라붙은 정령 몇몇이 눈에 들어왔다.
“위로받을 일은 아니죠.”
“저도 한 번 배워보려다 돌 맞고 포기했었는데.”
요정은 선천적인 정령술의 전문가다. 그들과 정령은 상생 관계로, 생활 전반이 서로 관계되어 있다.
함께 살다 보면 정령술을 터득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물론 재능이 있다는 가정하에.
“다들 착하던데요? 좋았어요. 말 잘 듣는 애들 키우는 거 같아서.”
다행히도 박아연에겐 재능이 있었다. 적잖은 성과를 거둔 덕분에 그녀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애들이라. 그러고 보니 박아연 씨도 이제 서른….”
“그쯤 하죠?”
온화하던 낯이 차갑게 굳는다. 나이에 대해선 그녀 본인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아니, 뭐. 좋은데요 왜.”
“됐어요. 그럼 이제 돌아가나요?”
“아뇨, 아직. 돌아가고 싶어요?”
유선우가 반문하자 박아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크게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지금은 반반이네요. 솔직히 저쪽에 별 미련이 없어서. 언젠가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요.”
“신기한 사람이네.”
유선우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흔한 갑분싸 패턴이었다.
“그럼 저랑 같이 갑시다. 구경시켜드릴게.”
“네?”
유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용 타고 대륙 일주. 어때요?”
***
대륙의 북서쪽에는 사람의 출입을 용납지 않는 장소가 존재한다. 예로부터 용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신비한 산맥.
현재 유선우는 그곳을 오르고 있었다.
“멀다, 멀어.”
유선우는 지도를 주머니에 꾸깃꾸깃 구겨 넣으며 발을 옮겼다. 용왕을 자가용으로 써먹고자 직접 달려온
것이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뛰어 보니 의외로 금방이었다.
‘몸이 좋아지긴 했다.’
이제는 자신이 인간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초월자와 반반 정도일까. 달려서 대륙을 가
로지를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근데 지도 보는 게 이렇게 개 같을 줄이야. 감 다 잃었네.’
속도가 빨라지니 그만큼 길을 잘못 드는 경우도 잦았다. 적잖은 고생 끝에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감히 내 연락을 끊어?’
어제 일을 회상한 유선우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