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다
유선우는 깨어난 지 닷새 만에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면서 상태를 살폈
다.
‘아오, 아파.’
움직일 때마다 관절은 삐걱거리고. 근육이 송곳에 찔리는 듯이 따갑고. 빈말로도 양호하다고는 할 수 없
었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돈 아니었다.
“이제부터 어쩔 거예요?”
침대에 앉아 있던 아이릴이 싱글벙글 웃으며 계획을 물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유선우를 따라갈 셈이었
다.
마음을 줬다. 3년간 수발까지 들어줬다.
이제는 유선우가 책임을 져줄 차례였다.
“글쎄다.”
유선우는 마음 같아선 당장 지구로 가고 싶었다.
문제는 게이트를 여는 법을 모른다는 것. 물론 지푸라기조차 없는 건 아니다. 엔라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엔라는 최대한 숨겨놓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다시 신계에 끌려간다면 데려온 의미가 없
었다.
‘어차피 박아연 씨도 데려가야 하고.’
요정의 땅에서 아르테 제국의 수도까지의 여정은 길다. 최소 일주일은 기다려야 할 터다.
그렇다면 뭘 하든 움직이는 편이 낫다. 스마트폰도 없이 가만히 있어서야 지루해 죽어버린다.
“일단 할 일은 있는데.”
누워 있으면서 생각해둔 계획은 두 가지였다.
먼저 백명에게 들은 대로 전장을 둘러보는 것. 시간이 걸릴지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격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적으로도. 당시와는 상당히 다르겠지만 감회가 새로울 터였다.
‘그리고 리디.’
다른 하나는 제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닷새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매정한 제자를.
“내가 잘못 키웠지.”
“뭐가요?”
“아니야. 뭐 별다른 일은 없고?”
“일보다는 사람이 많죠.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이릴이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 더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유선우는 무심한 낯으로 맨 위의
하나를 들었다. 건성으로 살펴본 그는 밀봉도 풀지 않고 툭 던지듯 놓았다.
“언제나 많았지. 누군데?”
“주로 귀족들이에요.”
“그냥 무시해.”
제 밥그릇만 챙기는 놈은 어디에도 있기 마련. 전쟁이 한창일 때도 매한가지였다.
평화로워진 지금이라면 어떨까. 발에 차일 정도로 널렸을 터다.
유선우는 자신을 써먹으려는 치들이 우스웠고, 불쾌했다. 하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나를 밟으면 반대편의 하나가 기뻐한다.
장단 맞춰줄 바에야 백 놈을 공평히 밟고 말지.
그마저도 차선책이다. 최선은 무시다.
“방문해달라는 놈들은 엿 먹으라고 답장하고.”
그래도 환자를 불러내는 것들은 욕먹는 게 맞다.
“알겠어요. 그런데….”
아이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저 왠지 비서 같지 않아요?”
“……그러네. 미안.”
“시, 싫다는 말은 아니고. 신선하고 괜찮아요.”
“별 게 다 신선해.”
유선우는 피식거리며 아이릴을 응시했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원체 길기 때문인지 심상찮은 형태로 묶여
있었다.
풀면 바닥에 질질 끌릴 텐데 왜 안 자르는 걸까. 언제 봐도 이해하기 힘든 고집이었다.
“3년이면… 너도 스물넷이네.”
“지구 나이로는요.”
“정확히는 한국 나이지.”
“다른가요?”
“어. 여러모로.”
잡담이 끊어져도 유선우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아이릴의 귀가 벌게졌다. 부끄러운
듯했다.
“왜, 왜요?”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싶어서.”
“……칭찬인가요?”
유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릴의 머리만 쓱쓱 쓰다듬었다. 이건 말하기 좀 쑥스러웠다.
***
교회에서 나온 유선우는 아르테 제국의 황성으로 발을 옮겼다. 물론 출입증 따위의 물품은 지참하지 않았
다. 없어도 입성할 수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빠릿빠릿하고 좋네. 수고해.”
유선우는 문을 지키는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문턱을 넘었다. 병사의 얼굴이 감격으로 젖었다. 그는
이 일을 딸에게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너희 단장 집무실.”
내리닫이 창살 문을 지나간 유선우가 말했다. 그의 옆에는 리디의 부하 기사, 베른이 자리해 있었다.
아이릴은 동행하지 않았다. 본인은 원했으나 그녀에겐 성녀라는 입장이 있었다. 교회의 얼굴인 성녀가
황성에 드나들면 일이 귀찮아진다.
“지금 시간대라면 연무장일 겁니다. 낮에는 수련, 밤에는 집무. 바쁜 사람이죠.”
“실드 치지 말자. 같이 술 마셨다면서?”
“크, 크흠! 안내하겠습니다.”
유선우는 베른을 뒤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들어와 보니 구조가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보이는 정원.
숨 돌리고 싶을 때면 들리던 예배당.
건물은 같았으나 보는 시선은 달랐다.
‘편하게 돌아다니는 건 처음인데.’
이곳은 항상 그를 긴장시키던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연회는 어떻게 됐습니까?”
“연회?”
“쾌차를 기념해 황성에서 연회를 연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닙니까?”
“몰라. 해도 안 가. 관심 없어.”
연회. 기억하기로는 개 같은 행사였다. 귀족들은 복잡한 정치를 해대고, 시종들은 죽어라 돌아다니고. 말
이 연회지 누구에게나 고생의 장이었다.
‘거길 내가 왜 가.’
유선우는 혀를 끌끌 차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스로 앞장서기 시작하자 베른의 표정이 떠름하게 변했
다.
“저, 안내….”
“됐어.”
“그럼 왜 데려오셨는지.”
“혼자 오면 심심하잖아.”
유선우는 백명처럼 뒷짐을 진 채로 연무장에 도착했다.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연무장. 그곳에선 여덟의
남녀가 창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라.’
의외로 창을 쓰는 이가 많았다.
8명 중 5명의 손에 창이 쥐여 있었다.
‘유행인가?’
그렇다면 흡족한 일이었다. 웃음 지은 유선우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때마침 눈에 띄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셋 셀 때까지 안 일어나면 맞는다. 하나, 둘.”
“일어났습니다!”
뻐억!
“악!”
“일어나면 안 때린다고는 안 했어. 억울해?”
“아, 아닙니다!”
“억울하면 눕지를 마. 다시!”
“예!”
앳된 외모의 붉은 머리 여성이 장년의 기사를 괴롭혀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기사들의 표정은 무덤
덤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득 창을 쥔 한 사내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알이 빙그르르 돌아가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그의 입이 함
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시, 신창…….”
“응?”
“유, 유선우 님이요!”
풍채 좋은 사내가 덩치에 안 맞게 허둥거렸다. 그는 유선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못했다. 불경한 짓
이었다.
“뭔 소리 하나 했더니.”
여성이 코웃음을 치며 사내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양반이 왜? 아직 병실에서 골골대고 있을…….”
툭.
유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여성이 창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식은땀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돌
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다. 응?”
“헉!”
어느새 유선우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가 여성, 리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쓰다듬는 게 아니었고, 당장
이라도 두개골을 부술 듯한 자세였다.
“하하. 누가 뭐? 그 양반이 어쨌는데? 골골대니 뭐니 들은 거 같은데. 어디 아프대?”
“고, 골골대고 계실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랬구나. 걱정 많이 했구나.”
“그렇습니다. 제가 걱정에 잠도 못 이루고… 마음고생이 심해 살까지 빠졌습니다.”
“그랬구나. 불면증이라서 술이나 처먹었구나. 다이어트하고 지랄지랄 하느라 많이 바빠서 병문안 한 번
을 못 왔구나.”
자애롭게 웃은 유선우가 악력을 가했다.
“아, 아, 아아픕니다, 아파! 머리 터져요, 진짜!”
“터지면 안 아파. 내가 많이 터뜨려봤어.”
“그럼 죽지 않습니까!”
“내가 반쯤 죽어봤어. 의외로 살 만한 데로 가더라고.”
“뭔 개소리야아아아악!”
“왜 반말이야?”
유선우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법에 빠삭했다. 무작정 압박하는 것은 하수다. 고수는 중간중간에 쉬어
주며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갈 줄 안다.
그가 손을 조였다가 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괜히 고수가 아닌지 리디의 눈가가 금세 물기로 반짝거렸
다.
“아픕, 아픕니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아픈 사람이 나쁠까, 아프게 한 사람이 나쁠까?”
“다, 당연히 아프게 하아아아아악!”
“아플 짓을 한 사람이 나쁘지.”
“제가… 제가 나쁩니다. 흐윽, 으흑!”
울먹이기 시작하자 유선우는 손을 떼어냈다. 아무래도 부하들 앞이다. 더 이상의 체벌은 좋지 않았다. 그
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리디의 등을 토닥여줬다.
“뚝 해, 뚝. 눈에서 즙 보이면 뒤질 줄 알아.”
“너, 너무하십니다. 흑!”
“우리 사이에 너무한 게 어딨어. 거 어디야. 동굴에서 몇 달을 같이 살았는데. 그치?”
리디가 히끅, 하며 숨을 삼켰다. 그때의 기억은 그녀에게도 선명한 것이었다. 아직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밤잠을 설칠 정도로.
“어우, 허리야.”
유선우는 상체를 숙여 리디가 떨어뜨린 창을 주웠다. 어찌나 험하게 썼는지 창대가 흠집으로 지저분했
다.
흠집을 낸 것은 리디가 아니라 유선우였다. 이것은 옛적에 그가 사용하던 창이었다. 신품으로 갈아타면
서 리디에게 물려줬었다.
“이걸 왜 아직도 쓰냐. 별로 좋지도 않은 놈을.”
유선우는 질책하는 투로 말하면서도 먼지를 탈탈 털어 건네줬다. 리디가 훌쩍거리며 창을 받아들었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 꼭 껴안는다.
“…저한텐 이게 제일 좋으니까요.”
“참나. 그러면서 왜 병문안은 안 왔어?”
“제가 왜 갔어야 했습니까?”
“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반항적인 태도에 유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리디는 몸을 흠칫 떨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
다가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유선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왜 갔어야 했냐고 물었습니다. 제멋대로 없어져선 숨만 붙어서 돌아오고.”
“어, 응?”
“이젠 나았으니 또 가시겠죠. 저한테 더 볼일 없으신 게 아닙니까. 그럼 저도 똑같습니다.”
리디는 표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유선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라 말을 못 하겠네.’
솔직히 욕먹기는 억울했다. 그야 귀환하려고 죽도록 굴렀으니까. 합당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리디의 심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은 항상 떠나는 쪽이었다.
지구에서도 떠났었고, 이곳에서도 그랬었다.
심지어는 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남겨지는 기분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거 다 너 때문이잖아.”
유선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엔라가 으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
들었다.
“하아.”
탄식한 유선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손이 재차 리디의 머리에 올려졌다. 방금과는 달리 상냥한 손길
이었다.
“…저 애 아닙니다.”
“이제 스물둘이잖아. 맞지?”
“맞습니다.”
“그럼 애네.”
유선우는 인생 썩은물들 사이에서 지내왔다.
스물둘이면 코흘리개지.
한국 나이로는 글쎄. 생일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뭐 기사단장 달았다며. 그 나이부터 대단하네.”
재작년에 임명됐으니 20살 때부터 요직에 앉은 것이다. 심각하게 파격적인 인선이다.
하지만 자격을 따져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리디는 전쟁에서의 공훈이 상당할뿐더러, 유선우와의 연결
로 인맥도 휘황찬란하다.
무엇보다 유선우의 유일한 제자라는 타이틀이 출신을 뛰어넘는 스펙이다.
“스승님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그래.”
유선우는 종종 자신의 나이를 잊어먹고는 했다. 아마도 27살이었다. 협곡에서 보낸 세월은 세기 싫었다.
“하여튼 네 말이 맞다. 난 또 돌아갈 거고, 넌 아이릴처럼 쫓아오진 못하겠지. 알아. 저번에도 안 왔잖아.”
“스승님이 뭐라고 제가 거기까지 따라갑니까.”
“그것도 맞지. 근데 말투는 신경 쓰자.”
“못할 말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이기적이십니다.”
유선우는 들어나 보자며 맞장구를 쳐줬다.
“내가 돌아가겠다는 게?”
“아니요. 자기는 제가 있는데도 안 남아주셨으면서, 저보곤 따라왔으면 한다는 말이시잖습니까.”
“누가 그러라고 했어?”
“…가면 싫으신가요?”
이제는 시무룩해한다. 감정변화가 널뛰기하듯 급격하다. 애가 아니기는 무슨. 사춘기 중고생만큼이나 귀
찮고 복잡하다.
“이상한 오해하지 말고. 안 와도 괜찮다는 소리야. 때때로 내가 놀러 올 거라서.”
“……무슨 동네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게 어떻게 됩니까.”
“돼.”
유선우가 히죽 웃었다.
“내가 좀 잘나졌거든. 그깟 건 일도 아니야.”
리디는 시선을 피하기를 그만두고 유선우와 눈을 맞췄다. 말없이 속을 들여다본다. 그녀가 머뭇머뭇 유
선우의 옷깃을 잡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알아먹으면 돼.”
“믿어도 되는 겁니까?”
“그래, 인마.”
리디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우물거렸다. 그녀가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물기 젖은 눈가가 휘어졌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스승님.”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유선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리는 핑핑 돌아갔다.
‘볼일 없다, 스승님이 뭐라고 따라가냐, 이기적이다…….’
아주 잘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