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지랄이야
결과적으로 백명은 손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지켜보던 초월자들이 불청객들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쥔 채로 고함을 내질렀다.
“왔으면 뒈져야지!”
“주, 주, 주, 죽어어어!”
불길이 몰아치고 검격이 흩뿌려진다. 소용돌이와 낙뢰가 천지를 휩쓴다. 수십의 인원이 저마다의 격을
발출하는 장면은 퍽 장관이었다.
“이런 미친놈들…!”
“웰치 님, 어쩌시겠습니까!”
초월자들의 막무가내 행동에 간수들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간수들이 낙원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
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
입을 다문 웰치가 콧김을 뿜어냈다. 간수 중에 명령의 상세를 꿰고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들은 애초부
터 생환을 지시받지 않았다.
협조를 구하고, 응하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개입의 뜻을 전하라. 만일 전투가 벌어질 시에는 참고인을 찾
아내 사살하라.
신계에서는 분명히 지금의 결과를 예측했다. 위에서 원하는 바는 자신들이 끼어들 명분과 체면치레였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참고인의 목숨까지.
애초부터 간수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짤랑!
목울대를 넘긴 웰치는 석장을 앞세웠다. 임무를 받는다면 불평 없이 수행한다. 신계의 일꾼인 그의 사명
이었다.
“산개해서 목표를 찾는다.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도록.”
낮은 목소리로 지시가 떨어졌다. 당황을 가라앉힌 간수들이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초월자들은 저마
다 근처의 적을 쫓으며 추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웰치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었다.
“왜 나서지 않는 거지?”
웰치가 날카로운 눈으로 백명을 노려봤다. 백명은 간수들을 쫓아가기는커녕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었
다. 다짜고짜 거인의 머리를 터뜨렸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웰치는 그 심경 변화가 궁금해 발을 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등을 보이자마자 죽게 될까 두려웠다.
“아저씨, 뭐해?”
방관하는 백명을 보며 한주가 초조하게 물었다. 혹시라도 유선우에게 변이 생기면 어쩌려고. 백명이 침
묵을 유지할수록 한주의 낯이 찌푸려졌다.
“마음이 바뀌었다.”
백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떠들썩하고 좋지 않으냐. 축제 같기도 하고.”
“…이게 어딜 봐서.”
한주는 떠름한 눈빛으로 낙원을 둘러봤다. 음식과 술이 아니라 창칼이 난무한다. 이런 살벌한 축제는 듣
도 보도 못했다.
‘도망치진 않았군.’
백명의 시선이 먼발치에 꽂혔다. 그곳에는 간수에게 창을 들이대는 유선우가 있었다. 자신이 표적임을
알 텐데도 도망치기는커녕 맞서고 있다.
“기특한 놈. 빨리도 커버렸어.”
백명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눈알을 굴려 웰치를 쳐다봤다.
“근데 넌 안 가나? 눈치도 없군.”
“뭐?”
“그냥 다른 놈들에게 맡길 셈이었다만. 굳이 남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아니, 잠깐…!”
“잠깐은 무슨.”
치지직!
백명이 오른발을 뻗었다. 그의 다리에 백색의 번개가 휘감겼다.
“그런 거 없다.”
***
유선우는 청년의 외견을 한 간수와 대치하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어색함이 감돌
았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
적과 무기를 마주한다는 것. 분명 수도 없이 해왔던 일인데도 감회가 새로웠다.
‘하긴, 그동안 대련만 해왔으니까.’
협곡에서 보낸 세월만 30년. 본래 인생보다도 더 긴 세월을 수련에 매진해왔다.
대련도 살벌하기는 매한가지였다만, 실제로 목숨이 오가지는 않았다. 여차할 때는 항상 백명이 나서주었
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이 상황이다.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고.’
오히려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적당한 긴장감이 몸을 감싸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둘 사이에는 시선만이 오갔다. 한동안 유선우를 쳐다보던 간수가 갑작스레 입을 크게 벌렸다.
“목표 발견했…!”
“그러는 거 아니야, 인마!”
외치려는 기색을 눈치챈 유선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10보 밖에서 내질러진 창이 간수의 복부를 노렸
다.
카앙!
“읏!”
간수가 본능적으로 석장을 내세웠다. 무형의 창격이 가로막혔다. 간수는 본인이 막고서도 의아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것은 찰나의 틈으로 연결되었다.
유선우는 놓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나갔다. 그는 종횡무진으로 허공과 지면을 누비며 창을 휘둘렀다.
간수는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창대를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그의 전신을 조금씩 갉아
먹었다.
‘뭐, 뭐지?’
당혹감에 간수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다. 그는 아직 유선우의 수준이 그리 뛰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했었
다. 자신이라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랬기에 신계가 과잉대응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고작 몇 합을 섞었을 뿐인데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압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
한 자신보다는 강하다는 것을.
‘안 되겠어.’
간수는 생각을 고쳐먹고 크게 뒤로 물러났다. 재빨리 동료들을 끌어모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
은 둘도 없는 실책이었다.
푸욱!
돌연 간수의 가슴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칼날이 튀어나왔다. 등에서부터 깊숙하게 찌른 것이었다.
“으흐, 으흐흐. 자, 자, 잘 먹을게.”
간수의 뒤를 노린 인물은 유선우의 반년을 가져갔던 검선이었다. 어처구니없이 상대를 빼앗겼다. 유선우
의 낯이 허망하게 변했다.
“아니, 형이 왜 여기서… 아오. 갑자기 열 확 뻗치네.”
“꼬, 꼬, 꼬우면 너도 뺏던가.”
검선이 키득키득 웃었다. 섬뜩한 웃음이 유선우에게는 얄밉게만 들려왔다.
“어휴. 말을 말지.”
혀를 찬 유선우는 다음 상대를 물색하고자 주변을 둘러봤다. 낙원은 어느새 전장이 되어있었다. 아니, 사
냥터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간수들은 분전하는 듯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아무래도 벌써 죽은 놈은 소수였지만, 달아나는 놈은 제법
있었다.
“뭐, 뭘 모르네.”
“네?”
“도망가면 좋다고 쫓아다닐 텐데.”
검선이 킥킥, 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유선우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한편으로 마음 깊이 수
긍했다.
“변태들밖에 없으니까요.”
그리 말하면서도 유선우의 시선은 한 간수에게 고정되었다. 놈은 꽁무니가 빠지라 달아나고 있었다. 잔
뜩 겁에 질린 낯빛을 보니 가학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가지고 놀기에 제격이다.
창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저거 제 겁니다. 이번엔 진짜로 페어플레이하죠. 또 건드리면 형부터 잡을 거니까.”
“조, 조….”
“좋다고요?”
“X 까라고. 히히.”
“예. 맘대로 처하세요, 그냥.”
유선우는 백명이 옛적에 초월자를 죽였었다던 정보를 떠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전력 유지만을 위한 행동
은 아니었으리라. 참다 참다 터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검선에게 말했다.
“일단 갑시다.”
때아닌 사냥철이 왔다.
***
초월자의 태반은 생전에 타인의 공포를 몰고 다니던 존재들이다. 그들의 격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의 두려
움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이번 경우에는 그것이 크게 작용했다. 간수들이 위축될수록 초월자들의 격은 강해져 갔다.
결과적으로 사냥은 백명이 손을 댈 필요도 없이 쉽사리 끝이 났다.
“둘밖에 못 잡았네. 에이.”
유선우가 창대를 빙빙 돌려대며 투덜거렸다. 검선만 아니었으면 셋이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었다.
서로 머릿수를 경쟁할 뿐이라면 좀 짜증만 나고 말았겠지. 그런데 직접 잡아 보니 간섭력을 꽤 짭짤하게
주는 게 아닌가.
남한테 빼앗긴 게 아까워서 검선의 목숨째로 수거해가고 싶었다.
“아오. 뒤통수라도 한 대 쳤어야 했던 건데.”
“그 아이도 네가 걱정돼서 따라갔던 게다. 그것도 모르느냐.”
“그 형이요? 설마.”
“겉으로는 좀 그럴지라도 순수한 면도 있으니.”
“으음…….”
유선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믿지는 못하겠다만 어차피 지난 일. 너무 뒤끝 있게 구는
것도 애 같은 짓이었다.
“그보다는… 슬슬 때가 되었구나.”
돌연 백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급격히 달라진 분위기에 유선우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 잡으러 온 거였죠?”
“그래. 이를테면 선봉대인 셈이지. 적당한 불씨를 던져두고 명분으로 삼은 게야. 항상 꾸물거리는 놈들이
행동에 나선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건 내가 말할게.”
잠자코 듣고 있던 한주가 끼어들었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내 부하가 보고를 올렸다더라.”
“보고요?”
“응. 요즘 낙원 분위기부터 네 행동까지 낱낱이. 알았을 땐 이미 올린 뒤라서….”
“그놈 이름이 뭐지?”
“보들. 나름 고참이야.”
“보들이라.”
이름을 읊는 백명의 목소리가 싸늘하다. 한주가 면목 없다는 투로 사과했다.
“말이라도 한마디 해두는 거였는데. 미안. 내 쪽에서 해결하려다가 늦었어.”
“어쩔 수 없죠. 근데 한주 씨, 여기서 막말해도 괜찮아요?”
유선우가 알기로 한주는 백명에게도 제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있으
니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 나도 아예 찍힌 거 같더라고.”
어깨를 으쓱인 한주가 백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어디까지 알고 있었어?”
“네 상상에 맡기지.”
“하여간 뭐 있는 척은….”
한주가 백명에게 짜게 식은 시선을 보냈다. 유선우는 피식거리곤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아직 반년은 있을 셈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돼버리네.”
“세상일이 어찌 마음대로 되겠느냐.”
“이대로 버티면 어떻게 되죠? 신계에서 내려오나?”
“마음 같아서는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리 경솔한 놈들은 아니다.”
백명이 부정하자 한주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내가 잘릴걸.”
“잘려요?”
“아마 보들이 내 자리를 꿰차겠지.”
“그럼 제 권한도 없어지겠네요.”
한주에게서 받아뒀던 혼의 고정 권한. 그것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고정을 풀어줄 조력자도 잃게 될 터였
다.
결국은 낙원에 갇히고 만다는 것이다.
“내가 죽인다면?”
“의미 없어. 그냥 다른 안내원이 파견되고 끝. 얼른 움직여야 돼. 죽이지 말라는 건 아니고, 일 다 끝내고
죽여.”
한주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백명이 유선우를 응시했다.
“표정이 왜 그리 심각하느냐.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늘.”
“…제가 아직 부족합니다. 많이요.”
“네가 자신 없어하는 모습은 또 처음이구나. 평소에는 재수 없다만 이것도 조금 불편하군.”
“재수 없었습니까? 자랑한 적은 딱히 없는데.”
“말보다는 행동이 그랬지. 남의 세월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스스로도 옹졸한 생각이다 싶다마
는.”
백명이 피식 웃었다. 유선우도 마주 웃었다.
둘 사이에 아쉬운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배울 것이 많았고, 가르칠 것이 많았다.
다만 아쉬움이 발목을 붙잡아서는 본말전도였다.
“선우야.”
“예.”
“난 네가 부족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저기 엿듣고 있는 놈도 같을 게야.”
백명이 우측의 섬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선 토노토가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유선우도 그녀를 눈치채고 있었다. 절로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저기서 뭐한대요?”
“본인 나름의 배려가 아니겠느냐.”
“그럼 내가 뭐가 돼.”
졸지에 눈치 없는 놈이 된 한주가 투덜거렸다. 셋 사이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신파극은 여기까지만 하지. 어차피 금방 다시 보게 될 터이니.”
“그것도 그렇네요.”
유선우는 백명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낙원을 해방할 셈이었다. 정이 든 것도 있지만, 신계를 뒤엎기 위해
선 그게 최선이었다.
움직일 시간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별다른 감흥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시간은 얼마나 있을까요?”
“몰라. 엔라가 왔을 땐 2주 동안 아무 말도 없었는데 지금은 또 경우가 다르니까.”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닌 모양이었다.
유선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준비해야겠네요.”
두 번째 귀환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