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지랄이야
“뭐 이렇게 사람이 많아?”
유선우는 풀밭을 밟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들어오는 머릿수만 해도 마흔이 넘어갔다. 거리는 상당
히 멀었으나, 그들의 시선은 전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감지하지 못하는 시선까지 합한다면 대체 몇이나 될까. 어림짐작해본 유선우는 기가 질려 고개를 가로저
었다.
“다 구경꾼이지. 거슬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참 한가하다 싶어서.”
“새삼스럽게 뭘. 원래 다들 한가해.”
“그러니까 다들 저한테 발리고 다니죠. 어이구.”
유선우와 농담을 주고받는 인물은 토노토였다. 토노토는 자신의 앞에 당당히 선 유선우를 물끄러미 응시
했다.
“너도 대단하다. 온 지 얼마나 지났더라? 3년?”
“글쎄요. 협곡에서는 30년 정도 보냈을걸요.”
“3년이나 30년이나.”
“저 여기 스물네 살 때 왔는데요.”
“그래서 더 대단하다는 거야.”
토노토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상식은 유선우로 인해 박살이 난 지 오래였다.
고작 50년쯤의 인생으로 자신에게 도전하고 있는 남자. 이전이었다면 우습게만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그쯤 되면 질투도 안 난다.”
“질투하면 안 되죠. 반 정도는 제 스승 아닙니까.”
“딱히 난 아무것도 안 했지만…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토노토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유선우를 제자보단 친구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의
스승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려주기도 전에 지가 배우는데 어떻게 가르쳐.’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격의 활용과 실전에서의 노하우였다. 그마저도 백명의 양보 덕에 겨우 따낸 권리
였다.
하지만 유선우에겐 백명을 제외하고 타인의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냥 싸우면 스스로 깨달았다. 격은 애
초부터 잘만 쓰곤 했다.
보다 보면 자신의 길고 긴 인생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아직도 완성은 안 된 거지?”
격의 완성을 묻는 것이었다. 유선우는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네, 좀 남았어요. 중요한 알맹이 몇 가지.”
“…진짜 말도 안 되네.”
핵심이 빠진 불완전한 격으로 수십의 초월자를 꺾어왔다는 말. 아이가 어른을 이긴 셈이었다.
조건이 같았다면 모를까, 유선우에게 패배한 이들 중 격을 완성하지 못한 초월자는 없었다.
“어떻게 살았길래 그래? 인생 세 번쯤 살았나.”
대체 어떤 업적을 쌓아왔기에 그만큼 강대한 격이 만들어졌는지. 토노토로서는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많이 구른 덕분이죠. 슬슬 제 동상도 몇 개 세워졌을 거 같은데.”
“그건 나도 똑같을걸.”
“경우가 다를 텐데요. 제가 들은 게 좀 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토노토 씨는 악마 숭배나 그런 쪽…….”
화르륵!
난데없이 화염구가 쏘아졌다. 유선우가 피식거리며 가볍게 창을 내질렀다. 창끝이 화염구에 닿자 한기가
퍼져 불길을 잠재웠다.
“매너 없게 왜 이러신대. 솔직히 찔리죠?”
“여자한테 너무한 거 아냐?”
“말이 성별도 가리나요? 손만 조심하면 되지. 전 잘만 때리지만요.”
“우리 되게 잘 맞네. 나도 남자 잘 때리는데.”
“그럼 어디 한번 뺨 좀 대봐요.”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시선만이 오갔다. 유선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끼이이이!
발출된 격에 의해 형태 없는 칼날이 주변을 잠식했다. 풀밭과 공기가 잘려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토노토도 대응하듯 제 몸을 불꽃으로 휘감았다. 그녀의 낯에 여유는 없었다.
‘몇 번을 봐도 사기야.’
간담이 서늘해진 토노토가 혀를 내둘렀다. 가만히 있어도 전신이 베이는 듯한 감각. 아니, 실제로 조금씩
베이고 있는지 불꽃이 출렁거렸다.
‘좀 무섭다.’
토노토는 침을 꿀꺽 삼키며 유선우를 쳐다봤다. 그저 창을 쥐고 있을 뿐인데 귀기마저 감돌았다. 과거에
그를 향하던 눈빛이 어땠을지 그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
유선우는 자신의 투쟁심을 끌어낼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화려하게 보답해줘야만 했다.
환하게 미소지은 토토노가 양팔을 벌렸다. 열기가 천지에 차오르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곧이어 그녀의 신체가 불꽃으로 변해 비대하게 부풀었다. 형태가 제멋대로 달라지다가, 종래에는 거대한
악귀의 형상으로 고정되었다.
“내 말 맞네. 동상 앞에 두고 무슨 의식 치를 거 같다니까.”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발언을 들었는지 악귀가 몸을 뻗었다.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퍼져 유선우를 둘러쌌다. 사방팔방을 틀어막은 감옥. 사각은 없었다.
유선우는 일제히 덮쳐드는 화마를 보며 묘한 감상을 품었다.
‘볼 만하네.’
정순한 홍염의 바다. 제법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는 경치를 눈에 담으며 창을 땅바닥에 꽂았다.
쩌저저적!
창대에서 뿜어진 냉기가 화염의 표면을 얼린다. 발목을 붙잡은 것은 일순간뿐이었다. 유선우가 지닌 간
섭력은 토노토의 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간섭력이 제일 문제야.’
낙원에서는 이 이상으로 얻어낼 방도가 없었다. 엔라에게 말하면 주기는 하겠지만, 잔고를 탈탈 털기는
미안했다.
유선우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토노토에게 집중했다. 그가 창을 크게 휘두르자 불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
다.
뒤이어 둘로 찢긴 장막에 수십의 선이 그어졌다. 불꽃이 공간의 왜곡에 휘말려 진행이 더뎌진다.
쉴 새 없는 맹공이 이어졌다.
서로를 밀어내는 격렬한 소모전이었다.
먼저 백기를 든 것은 토노토였다. 퍼진 화염이 한 데로 모여들더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유선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부터였는지 하늘에는 큼지막한 원이 그려져 있었다.
‘못 피하겠다. 더럽게 큰데.’
섬 하나를 뒤엎는 규모다. 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피하려면 아예 이 장소를 이탈해야만 했다.
유선우는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원을 지켜봤다. 원에서 화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쿠우우웅!
하늘을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의 전투와는 관계없는, 이질적인 소음이었다.
“어라?”
유선우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그건 토노토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원이 순식간에 지워져 갔다. 그녀
는 불꽃마저 전부 거둬들여 땅으로 내려왔다.
“이번엔 또 뭐야?”
유선우의 근처에 착지한 토노토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을 방해받은 탓에 그녀의 낯은 험
악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글쎄요.”
“이번에도 네 지인인 거 아니야?”
“에이,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유선우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의 지인 중 낙원에 올 만한 인물은 아브나바뿐이었다. 그녀가 온다면
내팽개쳐진 지구는 금세 망해버릴 터였다.
“하, 이거 제가 이긴 건데. 갑자기 열 뻗치네.”
“말 같잖은 소리 하고 있어. 이따가 다시 해.”
“그래야죠. 우선 어떤 놈인지 상판 좀 보고.”
둘의 시선이 못 박힌 듯 하늘에 고정됐다.
이윽고 하늘이 열린 순간, 수많은 인파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어? 저놈들 뭐예요?”
“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나?”
“있었죠.”
유선우가 기억난다며 맞장구쳤다.
엔라를 쫓아 간수들이 낙원에 입장했을 때.
그때와 여러모로 비슷한 광경이었다.
“근데 좀… 많은데요?”
유선우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얼핏 보기에도 서른이 넘는 인원.
이전과 다른 점은 머릿수뿐만이 아니었다.
구성원 사이에 날개가 큰 놈이 하나 있었고, 웬 거인도 껴 있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낙하하지 않고 정연하
게 진형을 이루었다.
“그냥 얌전히 돌아갈 거 같진 않죠?”
“미쳐 돌아가네, 아주.”
토노토가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놈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변을 눈치챈 것은 둘뿐만이 아니었다. 둘을 지켜보던 수십의 초월자들이 살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때 거인 하나가 대열의 선두로 나섰다.
“수석 안내원 한주. 지고하신 분의 명을 받들라.”
거인이 말하는 순간 유선우의 옆에서 공기가 일렁거렸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신기루처럼 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한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놀래라. 왜 여기로 나와요?”
“좀 느낌이 안 좋아서. 너, 슬슬 준비해야겠다.”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 하지만 유선우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선우를 보며 한주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불청객들에게 다가가자, 이번에는 커
다란 날개의 사내가 포문을 열었다.
“상급 간수 웰치입니다. 죄인이 이곳으로 도주했다는 정보를 받아 찾아왔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리죠.”
“협조는 얼어 죽을. 미리 말은 하고 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죄인이라. 설마 또 놓쳤어요?”
“저희가 그렇게 무능하진 않습니다. 관리자 엔라에 대한 겁니다.”
“사망 보고는 진작 올렸을 텐데요.”
“불확실하다며 걱정하는 분들이 계셔서 말이죠. 증거를 볼 수 있겠습니까?”
웰치의 눈이 탐색하는 것처럼 한주를 살폈다. 한주는 가당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뒈졌는데 증거가 어디 있어.”
“낙원의 영상은 항상 기록되고 있다고 압니다만.”
“아쉽게도 날짜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거의 1년 전 일이라서요.”
1년이라는 기간을 강조하며 말했다. 지나간 일을 명분 삼기에는 부족하지 않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인이 말을 받았다.
“거부할 시 연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얌전하게 구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테지.”
“…뭘 협조하라는 겁니까?”
“죄인에 대한 기록을 제출하라. 그리고 이곳의 주민 중에 죄인과 친분이 두터운 이가 있다더군.”
한주가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친분? 위에서 그런 것도 신경 썼습니까? 제가 모르는 새 방침이 바뀌었나 봅니다.”
“말을 삼가라.”
날카로운 어조에 한주가 알겠다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유들유들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의 속은 긴장으
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다음은 뭔데요?”
“우선 참고인을 확인….”
“또 지랄이군, 또 지랄이야.”
갑작스레 끼어든 음성. 거인이 낯을 찌푸렸다. 그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꽈아악!
“끄으윽…!”
거구가 붕 떠오르더니 머리에 압력이 가해졌다. 거인이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죄는 힘은 더더욱 강해졌
다.
콰직!
머지않아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머리를 잃은 거인이 축 늘어져서 지면으로 추락했다.
“잘도 흙발로 들어오는데… 무섭지도 않나?”
한주의 바로 뒤에서 뒷짐을 진 백명이 나타났다. 그는 오연한 눈빛으로 불청객들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요즘 것들은 나를 잘 모르나 보군.”
“우리는 정식으로 수색을 명령받았다. 방해한다면 그분들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
을 원하는가?”
웰치가 날개를 펄럭이며 백명에게 석장을 겨눴다. 겁 없는 행동에 백명이 광소를 터뜨렸다.
“아주 좋지. 우리가 언제나 바라왔던 게 그것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느냐.”
그의 전신에서 선명한 백광이 피어올랐다. 명백한 적대 행위에 간수들이 일제히 산개했다.
“말이나 해보아라. 내가 굳이 너흴 살려둬야 할까?”
포위당했음에도 백명은 여유로웠다. 그의 오만한 태도를 보며 웰치가 이를 갈았다.
“만약 우리가 생환하지 못할 경우엔 네놈들이 죄인을 두둔한다고 보시겠지.”
웰치의 시선은 백명뿐만 아니라 한주에게도 닿았다. 낙원을 맡은 자로서 소임을 다하라는 의미. 하지만
한주는 코만 후벼댈 뿐이었다.
“뭘 봐요? 저보고 어쩌라고요.”
“방해했다간 네 머리도 터뜨려주마.”
백명이 무덤덤하게 한주를 위협했다.
“이거 봐. 내가 뭘 해.”
“같잖은 말장난이 통할 줄 아는가! 이는 신계의 뜻이며 협조하지 않는다면…!”
“더 할 말은 없나 보군.”
주먹을 쥔 백명의 손에서 하얀빛이 아른거렸다.
“어디 남의 제자를 건드리려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