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과자 집에 거주하는 초월자.
劍仙그는 검선 이라는 별호를 가진 청년이었다.
거창한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체구는 호리호리했다. 유약한 인상에다 기괴한 안경까지 더해지니, 무인보
다는 학자라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현재.
검선은 유선우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주, 주, 주, 죽여버릴 거야…!”
“잠깐만요, 씨발! 죄송합니다!”
“으흐, 히, 히히히!”
미치광이 같은 웃음소리가 서늘하다. 머리채를 잡힌 채 제압당한 유선우는 바닥에서 발버둥 쳤다.
팔딱거리는 그의 목젖에 칼이 닿았다. 칼날에서 서슬 퍼런 검광이 뿜어졌다.
“으히히, 죽…!”
콰아아앙!
“웁!”
난데없이 쏘아진 일장에 검선의 몸이 날았다. 검선의 손에서 벗어난 유선우가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뭐 저딴 미친놈이 다 있어!”
초면에 무례를 저지른 것은 자신이다. 유선우도 알았다. 하지만 상대의 대응이 너무 과했다. 농밀한 살기
만 봐도 단순히 협박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조용한 놈 건드리면 큰일 난다더니….”
유선우는 으스스한 한기가 돌아 제 목을 쓰다듬었다. 괜스레 몸이 떨렸다.
“후우.”
겨우 안정을 되찾은 유선우가 백명을 쳐다봤다. 백명의 손에서는 은은한 백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뒈지는 줄 알았네. 제일 약한 놈 맞습니까?”
“못 믿는 것도 이해는 한다.”
에둘러 긍정한 백명은 손을 되돌리고 뒷짐을 졌다. 태연한 태도에 유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도 안 하셨군요.”
“연륜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넌 아직 격을 완성하지도 못하지 않았느냐.”
“먼저 말씀해주시지.”
“그럼 너는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했겠지.”
“그건 그렇지만요. 하아, 최소한 성격이라도 알려주셨으면 했습니다. 식겁했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유선우가 제 팔을 쓰다듬었다. 오돌토돌 소름이 올라와 있었다.
“나도 저럴 줄은 몰랐구나. 한동안 못 봤더니…. 어느새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을 줄이야.”
쓴웃음을 지은 백명은 반파된 벽을 쳐다봤다. 어이없게 끝난 대련의 영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
다.
그건 그가 예상하던 전개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십초지적이 안 될 줄 알았건만.’
유선우는 십초는커녕 오십초를 버텨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 자체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초월자들 사이에선 공방이 눈 깜짝할 새 오가기 때
문이다.
수준이 낮은 편인 검선과 유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오십초를 섞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유선우의 패배는
빠르게 정해졌다.
하지만 찰나라고 부를 정도로 단시간은 아니었다. 그 의미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성장세를 가늠할 수가 없군.’
백명은 복잡한 눈빛으로 유선우를 응시했다.
뛰어난 제자다. 특별하기에 서운한 제자였다.
‘별생각을 다.’
백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의 초점에 맺힌 유선우의 표정은 여전히 떫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예?”
“저놈을 꺾는 데까지 말이다. 3년?”
“기준이 어딥니까? 바깥?”
백명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유선우는 수염 없이 매끄러운 턱을 매만졌다. 침묵한 채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1년도 필요 없습니다.”
***
반년이 흘렀다.
그동안 유선우는 꿈속에서 많은 전장을 봐왔다.
지형은 때로는 산맥이었고, 때로는 평원이었다. 그냥저냥 뛰어난 장수였던 그는 대륙의 방방곡곡을 누비
며 영웅이 되어갔다.
자리는 항상 최선두였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 찬란한 성장을 거머쥐었다. 선봉에 섰기 때문이 아닌,
서야 했기에 강해졌다.
스스로 보기에도 터무니없는 성장세였다.
물론 지금보다는 아니고.
“주, 주, 주, 죽어어어어!”
“형. 슬슬 정 좀 들지 않았어요? 저희 오래 봤잖아요. 근데 왜 맨날 죽으래?”
유선우는 쇄도하는 검선을 보며 피식거렸다. 검선이 살기를 드러내며 검격을 흩뿌렸다.
카앙!
유선우가 공간을 잘라 검의 궤적을 가로막았다. 역천극창의 공간을 넘나드는 묘리는 방어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이익…!”
검선은 이를 갈면서도 집요하게 유선우를 추격했다. 얼굴마저 비쳐 보이는 말끔한 검이 춤추듯 유려하게
흔들렸다.
콰아아아!
⽔氣검에서 강대한 수기 가 뿜어졌다. 형상화된 기운이 파도와도 같은 물살로 변해 몰아쳤다.
유선우는 파도에 맞서고자 격을 발출했다. 그가 쥔 창에 칼바람이 휘감겼다.
유선우가 창을 휘둘렀다. 한 줄기의 섬광에 파도가 반으로 갈라졌다. 수기는 상처가 아물듯이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다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절단면부터 얼음이 퍼져 나가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시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검선은 헐레벌떡 뒤로 뛰었다. 5m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의 옆에서 목소
리가 들려왔다.
“이 악물어요, 형.”
유선우의 창이 휘어지며 검선의 전신을 노렸다. 수십 번의 연격이 이어져 불똥이 거칠게 튀었다.
카앙!
검선은 무너진 자세로도 서른 번이 넘게 창을 받아냈다. 횟수가 거듭할수록 방어는 허술해졌다. 반면에
공격은 날카로워졌고 묵직해졌다.
버티다 못한 검선은 굴욕을 감내하고 바닥을 뒹구는 나려타곤을 시도했다.
“엇…!”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다리가 얼어붙어 지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선우는 검선이 보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창대를 뻗어 검을 쳐내고, 드러난 목에 창끝을 들이댔다.
“이걸로 3연승. 맞죠?”
“그래.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야겠구나.”
대답은 앞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왔다. 기특한 듯, 감탄한 듯한 목소리였다.
유선우는 창을 내려놓고 검선을 풀어줬다. 검선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유선우를 노려봤다.
“다, 다, 다시 해. 너, 나 안 죽었어.”
“참나. 사람이 왜 이렇게 극단적이에요?”
“주, 죽거나 죽이거나. 그래야 끝나.”
“…암만 봐도 섬뜩한데.”
유선우가 질린 기색으로 낯을 구겼다. 살아있을 적 검선의 칼에서는 피가 마른 날이 없었을 게 분명했다.
“어느 면에서는 참 순수한데.”
과자 집만 봐도 천성은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는 죽어도 못 하겠다.
머리를 절레절레 저은 유선우가 백명에게 다가갔다.
“다음은 누구예요? 제발 정상인이었으면 합니다.”
“미안하다만 낙원에서 찾기엔 번지수가 틀렸다.”
“…하아. 이번엔 몇 년차입니까?”
“잘 기억은 안 나는구나. 사오백 년쯤 됐겠지.”
“그냥 화석이네.”
늘어나는 단위부터가 심상찮다. 이번엔 또 어떤 미친놈이 나올지 심히 걱정됐다.
유선우는 한숨을 내쉬다가도 검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형, 경험치 잘 빨았습니다.”
레벨업하면 사냥터를 옮기는 게 정석이다.
***
다음 상대는 온화한 분위기를 두른 수인 여성이었다. 첫인상이 바람직해 유선우는 양호한 관계 구축을 기
대했다.
딱 싸우기 전까지만.
“엉덩잇살을 도려내서… 송송 썰고 튀겨서….”
여성은 식칼을 기가 막히게 잘 썼다. 유선우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여성을 꺾은 것은, 바깥 시간으로 한 달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공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제… 안 오는 거니…?”
“아마도요. 솔직히 오기도 싫고.”
“다른 년한테… 가는 거야?”
“예?”
“너도 날 버리는 거야? 후욱, 후우욱!”
그 후로 유선우는 낙원을 돌아다닐 때마다 시선을 느꼈다. 단순한 피해의식인 건 아닐 터였다.
***
유선우는 파죽지세로 초월자들을 꺾어갔다.
검선 이후로는 길면 한 달, 짧으면 보름.
단 한 번도 벽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성장 속도였다.
주민들은 그의 행보에 전율하며 경악했다.
그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했다. 투쟁심에 피가 끓어오르는 한편, 재능의 격차에 좌절할
까 우려되었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마음을 품고 유선우를 지켜봤다.
“이번엔 누구 차례야?”
“모르지. 저번에도 리갈 안 잡고 건너뛰었잖아.”
“허접부터 치운다더라. 생각나는 놈은 다 끝났으니… 이제 넌데?”
“뭐?”
전체적인 분위기는 활기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새로운 바람이 미풍이든 강풍이든 적대감을 가지는 초월
자는 없었다.
낙원은 지루한 곳이니만큼 좋은 여흥으로 여길 뿐. 유선우의 성격이 여타 초월자보단 낫다는 것도 한몫했
다.
“…….”
하지만 낙원에는 초월자 외에도 거주자가 몇 존재했다. 안내원이었다.
“말랑, 한주님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어?”
“네? 네. 아무것도요.”
“흐음.”
말랑의 선임 안내원 보들이 낮은 숨을 흘렸다. 석연찮다는 태도에 말랑이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 있었나요?”
“몰라서 물어? 지금 한창 시끄럽잖아.”
“…아, 신입 말씀이시군요.”
현재 낙원에 유선우 이상 가는 화제는 없었다. 이만한 이슈는 백명이 초월자 둘을 처형한 이래 처음이었
다. 잠잠하던 평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안 좋아, 안 좋아.”
보들은 그게 언짢았다. 팔짱을 낀 그는 검지로 짜증스럽게 제 팔꿈치를 두드렸다.
“왜요? 험악한 것보다는 좋은데. 기왕이면 떠들썩한 게….”
“장난쳐?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몰라?”
“그야 안내하고 도우라고 있죠. 안내원이잖아요.”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는지 모르겠네.”
보들이 험악하게 구긴 낯을 들이밀었다.
“우리는 감시자야. 놈들이랑 놀고먹으라고 보내진 게 아니라고.”
“하,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 너도 알잖아? 놈들도 우릴 아니꼽게 본다는 거. 그래서 내가 널 여기까지 데려와
서 말하는 거잖아.”
사나운 목소리에 말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5평도 되지 않는 좁다란 실내. 갖가지 미술품이 장식된 탓
에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개인실은 언제 받으셨어요?”
“오백 년도 더 넘었어. 말을 안 했을 뿐이고.”
안내원의 개인실. 신계에서 내려주는 이 공간에는 백명의 눈도 닿지 않는다.
물론 백명도 수고를 들인다면 직접 들여다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어디 한가한 사람인가. 항상 감시하
지는 않으니 들킬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하여간 그 괴물 같은 놈 때문에 귀찮게.”
보들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가 생각하기에 낙원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백명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백명의 제자 놈도 괴물 같다는 것이고.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 어쩌시려고요? 저희가 개입하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당연하지. 내가 뭔 힘이 있다고 건드려. 그래도 조치는 취해야 할 거 아냐.”
“딱히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냥 지켜보는 편이.”
보들은 만류하는 말랑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한주와 친한 놈이라 불러왔건만, 도통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앞으로 큰일이 되겠지. 불안해, 불안해. 보고라도 올려야겠어.”
“보고는 한주 님 일이잖아요.”
“그 한주 님이 안 하시잖아!”
“그건 그렇지만….”
일갈에 말랑이 말을 못 잇고 머뭇거렸다.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보들이 등을 돌렸다.
“도울 생각 없으면 됐어. 네 태도도 상세히 적어서 올리지.”
“예, 예? 잠시만요!”
“한주 님도 무슨 생각이신지…. 낙원 꼴이 말이 아니야 아주.”
보들이 불평을 내뱉으며 시스템을 조작했다. 그러자 말랑의 몸이 둥실 떠올라 방의 출구로 날아갔다. 본
인의 개인실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서, 선배님!”
말랑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낙원의 풀밭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평지 위에 환영처럼 나타난 문은, 말랑을
내보내고는 다시 환영처럼 사라졌다.
말랑의 시선은 한동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맴돌았다. 멍하니 있던 그가 불안감에 숨을 삼켰다.
‘한주 님께 알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