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백명은 유선우에게 하루의 휴식시간을 주었다. 일상적으로 움직이고 느껴서 격에 익숙해지라는 취지였
다.
백명이 밖으로 나가자 집안에는 둘만이 남았다. 유선우는 편히 앉고는 엔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잡으니까 무슨 파편 같은 걸 주더라고. 뭔지 알아?”
“파편?”
“새까만 건데, 거의 새끼손가락 크기였나. 뭔 사혼의 구슬 조각도 아니고.”
“아, 응.”
긍정한 엔라가 가볍게 뛰어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다리를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말했었잖아. 나도 여기서 나갈 방법이 있다고.”
“맞다. 까먹고 있었네.”
“1년도 더 지났으니까. 하여튼 그게 그거야.”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으응…….”
엔라가 끙끙거리면서 몸을 양옆으로 살살 흔들었다. 말을 고르는 와중에도 도통 얌전히 있지를 못한다.
유선우는 웃음 지은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너희랑은 달리 우리의 격은 만들어진 거야.”
“자세히.”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예를 들자면 내가 태어난 곳은 설산이야. 불에도 안 녹는 눈으로 가득한 설
산. 말도 안 되는 환경이지. 신계에서 조성했다고 보면 돼.”
설명을 듣자 유선우는 파편을 흡수했을 때의 영상을 떠올렸다. 검은 불꽃이 천지를 메우던 벌판. 엔라의
말마따나 말도 안 되는, 신화적인 광경이었다.
‘그걸 신계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거지.’
이유는 물을 것도 없었다.
격을 인위적으로 탄생시키기 위함이다.
‘확실히 태생부터가 다르네.’
언젠가 말랑에게 들었던 정보가 뇌리를 스쳤다. 관리자는 선천적으로 격을 얻는다는 말. 그 의미가 이제
야 와닿았다.
“근데 그 얘기가 파편이랑 관련이 있나?”
“응응. 우리가 태어나면서 얻은 격은 요만한 돌에 담기거든.”
엔라가 주먹을 쥔 채로 손을 내밀었다.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이 정도야. 원래는 형태가 없는 건데… 그분들의 힘이지.”
“왜 굳이?”
“그쪽이 관리하기 편하니까. 우리는 근원석이라고 부르는데, 위에선 그냥 돌이라고 하셔.”
“돌? 어째 알수록 싸가지 없는 놈들이네.”
조잡한 명칭에 유선우의 낯에 불쾌감이 스쳤다.
“하여튼 나한테도 있어. 네가 얻었다는 게 근원석 조각이겠지.”
“진짜 사혼의 구슬이었구나.”
“아까부터 그러더라.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유선우는 설명하기 귀찮아 말을 돌렸다. 엔라가 눈을 흘기다가 됐어, 하며 몸을 기대왔다.
“결론은 이거야. 네가 날 먹은 상태로 돌아가면 돼.”
“…주먹만 한 돌을?”
“누가 입으로 먹으래? 먹어봤으니까 알잖아.”
“이해는 했는데.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가능은 한가?”
근원석이라고 했던가. 거창한 명칭이라고는 생각해도 과장은 아닐 터다. 그런 물건을 남이 흡수한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유선우의 얼굴을 엔라가 쿡쿡 찔렀다.
“괜찮아. 방법이 있거든. 날 먹으면 돼.”
“그러니까 그게 위험하지 않냐는….”
“아니, 아니.”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엔라가 생글생글 미소지었다. 그녀가 유선우의 가슴팍을 슬쩍 밀어 바닥에 넘어뜨
렸다.
그리고는 유선우의 가슴팍을 밀며 그의 허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저번에 말했잖아. 상성 맞추면 된다니까.”
***
유선우는 평소처럼 백명을 따라 협곡을 걸었다.
하지만 모든 게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많은 점이 달랐다.
이동하는 시간은 전보다 길었고, 주변에 낀 안개도 눈에 띄게 짙었다. 협곡의 깊은 장소로 들어온 것이다.
“이번엔 여기까지다.”
묵묵하게 선도하던 백명이 우뚝 발을 멈췄다.
“여기는 배율이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다. 10배까지는 안 되겠지.”
“감지덕지네요.”
유선우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협곡을 둘러봤다. 이곳에서 며칠을 지내고 돌아가도 엔라는 짧으면 한나
절을, 길면 하루를 기다렸다고 불평한다. 그게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곳이 왜 있습니까?”
“이전에 말했… 아, 그렇군. 대충 넘어갔었던가.”
기억을 떠올린 백명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곳은 본래 낙원의 핵심지였다. 나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만, 시간의 배율을 달리함으로 완전한 감옥
을 만들 셈이었겠지. 혹은 처형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여기에 장시간 있다 보면 정신력이 깎여 소멸
하고 말 테니까.”
“그게 실패했고요?”
“실패하게 만든 게다. 아무리 신계라고 한들 그만한 구조를 순식간에 만들지는 못해. 바깥에서 만들 순
없으니 낙원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당시에 내가 직접 목을 땄다. 그러니 의도와는 크게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버린 게야.”
“캬, 멋있으십니다.”
유선우는 아부 없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공훈을 담담하게 뱉는 모습이 말 그대로 상남자였다.
백명은 멋쩍은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렸다. 그가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어쨌든 네 문제가 우선이다. 기분은 어떠하느냐.”
“글쎄요…….”
말을 흐린 유선우는 머릿속으로 창 한 자루를 떠올렸다. 빛무리가 나타나 창의 형태를 빚어간다.
후우우웅!
창대를 잡자 난데없는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유선우를 지나치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
다.
바람의 중심에서 유선우는 눈을 감았다. 쇳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진다. 피비린내가 코를 스친다. 그의
눈꺼풀 뒤에서 전장의 풍경이 가감 없이 펼쳐졌다.
바람이 끼이이이, 하고 기괴한 소리를 낸다. 마치 그들의 입으로 두려움을 표하는 듯했다.
유선우는 본능적으로 그것의 근간을 알아차렸다. 공포. 전장에서 자신을 향하던 감정이었다. 적군은 언
제나 그를 두려워했고, 때로는 아군마저 그러했다.
‘아직은 불완전하다.’
하기야 별것 없는 게 당연했다. 이번에 받아들인 격은 그 뿌리가 되는 업적이 신통찮았다.
겉으로는 치열한 전투였을지언정 실상은 황족이 차려준 밥상이었다.
하지만 불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앞으로 얻게 될 것에 기대감을 품을 뿐이었다.
“우선 한 판 뜨고 싶네요.”
유선우가 눈을 뜨며 말했다.
“음?”
“한 판 뜨자고요, 스승님.”
백명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
“선우야.”
“허억, 허어억! 예, 예?”
“괜찮으냐?”
“괘, 괜찮습니다! 뒈질 것 같기는 한데, 어우야.”
바닥에 널브러진 유선우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전신이 휘청거려 똑바로 설 수도 없었다.
“신난 건 알겠다마는…. 적당히 하는 편이 좋을 게다.”
한심한 제자의 모습에 백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아우.”
“격을 무리하게 사용한 대가인 게지. 업적에 관련된 행동을 큰 폭으로 보정해주는 한편으로 정신력에 타
격이 가는 셈이다.”
“보정. 이해했습니다. 후우우.”
유선우는 몸을 가누는 것을 포기하고 지면에 뒹굴었다. 편히 다리를 뻗은 그는 백명의 말을 곱씹었다.
“제 업적과 관련된 거면… 창술이나 백병전쯤일 텐데. 범용적이고 좋네요.”
“타인의 눈으로 어떻게 보였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서. 그들의 감정이 네가 외부
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굉장히 추상적인데요.”
“금방 익숙해질 테니 염려 말거라.”
유선우는 목만 들어 올려서 고개를 주억였다. 그를 보며 백명이 한숨을 토해냈다.
“어째 벌써 돌아가야 할 듯싶구나.”
“아직 거뜬합니다. 지금은 약간 어지러워서.”
“흠.”
백명이 낮은 숨소리를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말했다.
“아니, 돌아가자꾸나.”
“예? 정말로 괜찮습니다.”
“수련 외에 따로 시킬 게 있다.”
“시킬 거요?”
백명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 도장깨기지.”
“…갑자기 웬. 싸우고 다니라고요?”
“낙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들부터 일러줄 테니 하나하나 잡아 보아라.”
유선우는 떨떠름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혹시 가장 신입이 몇 년차입니까?”
“글쎄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렴풋이라도 됩니다.”
“아마 이백이었던가, 삼백이었던가 그랬을 게다.”
“어떻게 고인물밖에 없어…….”
맞선임이 뭐 그따위야.
어처구니없어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혹여 자신이 없는 게냐?”
백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뭐요?”
“흐으음.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지금 뭐라시는….”
“네가 아무리 천하의 기재라고는 하나… 결국은 새파랗게 어린놈이니 말이다. 음, 음. 이해는 한다. 이해
하고말고.”
푸욱!
유선우가 창을 바닥에 꽂았다. 그가 뭉그적뭉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질어질했으나 창대를 지지대로
삼아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하하. 너무 속 보이게 도발하시는데.”
“그래서 안 할 게냐?”
“당연히 합니다. 예.”
그는 어깨를 돌리면서 자신감을 표했다. 도발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따를 생각이었다.
수련과 실전은 다른 법. 얻을 건 얼마든지 있다. 그저 도장깨기라는 과격한 말에 놀랐을 뿐이지.
백명은 의욕 넘치는 제자를 흡족하게 바라봤다. 그가 뒷짐을 지고 오연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좋다. 죄다 조져버리거라.”
***
갑작스레 정해진 일이었지만 행동은 재빨랐다.
휴식을 취한 뒤, 유선우는 백명과 함께 한 장소를 찾아갔다.
“사람들 취향 한 번 진짜.”
“귀엽고 좋지 않으냐.”
“나이를 생각해보죠, 나이를. 굉장히 등신 같은데요.”
둘의 눈앞에는 과자로 된 집이 세워져 있었다. 출신 차원의 고유한 과자인지 전부 형태가 색달랐다. 가방
처럼 생긴 놈도 있었고, 옷처럼 생긴 놈도 있었다.
공통점은 달콤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는 것.
서로 뒤섞이기까지 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합니까?”
“그래.”
유선우가 확인 차 묻자 백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우는 똑같이 머리를 까딱이고는 미리 받은 지시를
떠올렸다.
스승은 기선제압을 하라고 했었다.
그 말에 따라 과자 문으로 다리를 뻗었다.
콰직!
“여봐라!”
유선우는 쩌렁쩌렁 외치며 문짝을 걷어찼다. 과자 문이 쿠크다스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캬.”
뻥 뚫리는 청량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입꼬리까지 씰룩거리던 유선우가 백명을 쳐다봤다.
“하고 묻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이래도 돼요?”
“이게 도장깨기의 참맛이지.”
“너무 개념 없는 거 같은데.”
“이딴 집에 사는 놈한테는 개념이 있어 보이느냐?”
“하, 그르네. 근데 귀엽다면서요.”
“귀여운 것들은 대개로 개념이 없기 마련이다. 아니면 내숭이고.”
“집 꼬라지 보면 내숭은 절대로 아니겠네요.”
설득당한 유선우는 내부로 흙발을 들이밀었다.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이 썩 기묘하다. 밑에도 무언가 이
상한 짓거리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거 누구 없습니까!”
찾기도 귀찮아 다시 한번 고함쳤다. 이제는 무시할 수도 없었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 누, 누구세요!
들려온 음성에 유선우의 낯이 확 구겨졌다.
“남자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