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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08화 (108/179)

공략왕

“진군하라!”

사내의 굵직한 고함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유선우가 눈을 떴을 때, 그는 피륙으로 너저분한 전장에 서 있

었다.

‘여기 구경하는 것도 마지막이겠어.’

유선우는 차분하게 주변을 훑어봤다. 수십 번쯤 봐왔기에 이제는 세부적인 전개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곧 스무 살의 유선우가 오크의 대가리를 찌르며 사자후를 외칠 터였다.

“이제 싫어어어어어!”

들려오는 목소리가 칼칼하다. 이젠 창피하기는커녕 정겹기까지 했다. 본디 지겹도록 봐온 경치일지라도

끝은 감상적인 법이니까.

소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유선우는 고요함을 유지했다. 묵묵하게 전투의 양상을 모두 지켜봤다.

“허윽, 아버지….”

어눌한 말투로 육포를 건넸던 병사가 죽는 모습.

“용사님! 적당히 나서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개 같은 놈아!”

개인행동을 일삼던 어린 날의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백인장의 모습. 잊고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 올라 향수를 자극했다.

이윽고 고함과 쇳소리가 잦아들며 끝이 다가왔다. 유선우는 빙창을 생성해 꼬나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온다.’

쿠우우웅!

거대한 존재감이 내려앉았다. 재현된 업적이 압력에 의해 짓눌리고 갈기갈기 찢어진다. 열린 하늘에서는

검은 불꽃에 휩싸인 형체가 몸을 이끌고 다가온다.

첫날에는 꺾을 방도가 떠오르지도 않던 상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운의 차이가 점차 줄어들어 저번에 이르러서는 호각지세를 다퉜었다.

간발의 차이로 패한 뒤로 며칠이 흐른 지금.

우위는 이쪽에 있다.

후우우웅!

유선우의 전신에서 한기가 방출되기 시작했다. 겨울바람이 피로 물든 황야를 휩쓸고 달려갔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유선우마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관리자의 파편이 흘리는 압력에 노

출되어 처참하게 부서졌다.

‘기분 나쁘네.’

자신이 죽는 광경은 언제 봐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주위를 둘러보던 유선우는 재차 형체를 응시했다.

불꽃의 표면에 서리가 끼고, 서서히 녹아간다.

놈의 권능이 밀리고 있다는 증거다.

‘얼른 끝내자.’

가볍게 땅을 박찬 유선우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열기가 강해진다. 그의 몸에 두

른 간섭력이 조금씩 밀려났다.

머지않아 유선우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제 자리에 섰다.

‘이건 익숙해지질 않아.’

유선우는 아무것도 없는 발밑을 툭툭 두드렸다. 허공답보라고 하던가. 이론은 다르겠지만 백명이 가르쳐

준 보법에서는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 세상에는 보이는 것 외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 중2병 냄새 나는 말이 백명의 가르침이었다.

유선우는 허무맹랑한 개소리라 생각해 코웃음을 쳤었다. 노망났냐고 했다가 개처럼 맞았었지.

하지만 백명의 창술을 보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공간을 비틀기도 하고 뛰어넘기도 하며, 간격

을 무시하는 창술.

일견만으로는 어렴풋했다. 믿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유선우는 직접 경험한 것은 인정하는 성격이었다.

겸허히 받아들이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 공간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백명이 뭐라고 했었더라. 내 노력은 똥 덩어리였군, 하고 눈물을 삼켰었던가.

어쨌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느껴지니 밟을 수 있었고, 박찰 수 있었다.

먼 거리까지 잘라내기는 아직 힘들다마는.

“후우.”

날숨을 토해낸 유선우가 제자리에서 두어 번 발을 굴렀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맹렬한 기세로 쏘아지

기 시작했다.

‘여기서 좌회전이었지.’

거리를 단숨에 좁힌 유선우는 좌측으로 크게 뛰었다. 그러자 형체에서 팔뚝만 한 촉수가 무수하게 뽑혀

나왔다. 촉수는 꼬리처럼 그의 발자국을 밟았다.

“왼쪽오른쪽오른쪽왼쪽오른쪽대각선위에서펑.”

유선우는 기억나는 대로 중얼거리며 지그재그로 하늘을 달렸다. 촉수와 불길은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

했다.

다음으로는 열 보를 전진하고 우회해서 회피.

투창으로 건드려 큼직한 공격 유도.

패턴만 숙지한다면 피하는 건 간단하다.

‘내가 벌써 몇 회찬데. 이쯤은 피하지.’

유선우는 평정을 유지한 채로 형체의 지척에 도착했다. 본체를 보호하듯이 넘실거리는 검은 불꽃. 저곳

의 공간을 잘라내 틈을 만들고, 내부로 진입해 죄다 얼리면 끝이다.

아직 끝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정확할 터였다.

‘그 전에 우선.’

콰아아아!

간섭력을 대번에 창에 쑤셔 넣었다. 무수한 얼음의 파편이 창끝에서 회전한다. 나선형으로 용솟음치는

모습이 자그마한 소용돌이와도 같았다.

유선우는 창을 불꽃의 너머로 투척했다. 다음으론 꽁무니가 빠지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수백 보 밖까지.

그리고 던져뒀던 창이 형체에 닿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무분별하게 뻗어 나온 불꽃이 주변을 집어삼킨다.

‘저건 좀 사기지.’

저 폭발에 휘말렸을 때는 억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한편으로는 한 번 당했으니 다음은 잡을 수 있겠지

싶긴 했었다.

근데 아니더라.

폭발 횟수가 아직도 네 번 남았다.

즉 그만큼 또 촉수 피하면서 다가가야 한다는 뜻이다. 멀리서 창을 던져봐야 가로막히기만 하고.

‘끝까지 민폐인 새끼…….’

유선우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뺨을 찰싹찰싹 쳐 정신을 다잡았다.

‘이대로 못 잡고 돌아가면 개쪽팔리잖아.’

웃음 참는 동자공 마스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

“드디어 잡았다.”

유선우가 질린 기색으로 내뱉었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얼음이 놓여 있었다. 불가사의한 형체를 그대

로 얼린 결과물이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유선우는 눈을 부릅뜬 채 주먹을 쥐었다. 차분히 감상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얼음의 한가운데를 겨

냥하고 망설임 없이 정권을 내질렀다.

콰직!

주먹이 닿자 중앙에서부터 금이 갈라졌다. 얼음은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나 주위로 흩뿌려졌다. 크고 작

은 파편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하여간 귀찮은 새끼.”

유선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상쾌하게 웃었다. 숱한 실패의 경험들이 보람으로 바뀌어 마음을 충

족시켰다. 이유도 없이 기지개를 켜야 할 듯싶었다.

그때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저게 뭐시여.’

수백의 얼음 파편 중에 색다른 것이 하나 섞여 있었다. 저 혼자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기에 알아보기는

간단했다.

유선우는 그것을 어리둥절한 낯으로 바라보면서도 손을 뻗었다.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기대감도 들었

다.

어째 전리품 같아서.

유선우의 손바닥이 파편에 닿았다.

그러자, 그의 몸 안으로 파편이 빨려 들어갔다.

난데없는 상황에도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저항할 겨를이 없었다.

‘이건….’

유선우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검은 불꽃으로 가득 차 있는 장소. 흉흉하지만

쓸쓸한 벌판이었다.

영원히 변함없을 듯한 그곳에서, 돌연히 불꽃이 움직였다. 발 디딜 곳도 없이 넓게 퍼져 있던 화염이 한가

운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화염은 모일수록 부풀기는커녕 작게 압축되었다. 점차 압축되고 압축되어, 종래에는 한 형태를 빚어냈

다.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

유선우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이름 모를 관리자의 탄생이다. 존재를 흡수함으로, 격이 구

성되던 때의 장면을 훔쳐보는 것이다.

‘기분 이상하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감각을 곤두세웠다. 자신의 내부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흡수된 파편이 제멋

대로 이동하다가 한 장소에서 똬리를 틀고 앉았다.

가슴인가. 아니면 머리나 복부인가.

어째선지 명확하게 느껴지지를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던 곳이 아주 조금 차올랐음을 깨달았다.

재생되던 영상이 끊어졌다.

남은 것은 정적뿐이었다.

고요함 속에서 유선우는 눈을 한 차례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흐흐흐. 좋고요.”

민폐만 끼치던 놈도 잡으면 주는 건 있는 모양이었다. 주니어부기가 뿔을 떨구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

도 그만한 잡템은 아니겠지마는.

유선우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주위에 시선을 돌렸다.

‘근데 난 언제 돌아가는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전장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우우우웅!

시야의 모든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현상을 보자마자 유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격렬한 흔들림에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다.

눈꺼풀을 닫은 뒤로 5초가량의 시간이 흘러.

귀에 익은 음성과 쇳소리가 들려왔다.

“진군하라!”

오늘만 두 번째였다.

상황을 파악한 유선우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걸 또 봐?”

마지막도 두 번이면 정겹지는 않았다.

***

유선우는 잠들 때처럼 고요하게 눈을 떴다. LED 형광등과 하얀색의 천장이 초점에 맺힌다.

“자, 잘 됐어?”

낯익은 풍경이다. 걱정이 담긴 엔라의 목소리도. 시야 끝에 보이는 백명의 굳은 표정도 여전하다.

하지만 모든 게 같지는 않았다. 유선우는 정신이 듦과 동시에 변화를 깨달았다.

파편이 깃든 공간에 새로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의심할 여지 없는, 자신만의 격이었다.

그릇의 크기에 비하면 아직 미약한 수준. 그러나 바람마저 잡을 수 있을 듯한 전능감이 느껴졌다.

생소한 감각에 유선우는 미소지었다.

“제대로 됐지. 고맙다.”

“히히. 고맙기는. 아깝긴 해도 별로 많이 쓴 것도 아니고. 그럼 이제 간섭력은….”

“필요 없을 거 같아. 이거면 됐어.”

관리자의 파편을 흡수했기 때문일까. 지닌바 간섭력이 눈에 띄게 불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놈의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굴복시켜 먹어치웠을 뿐.

‘차라리 이게 낫지. 어중간한 여럿은 필요 없어.’

차고 넘치는 수확이었다.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진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너는 이제 한 발을 뗀 게야.”

돌연 백명이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제자를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했다.

“갑자기 찬물 끼얹으시네.”

“고깝게 듣지는 말고 조언이라 생각하거라. 네 상태는 나도 아는 바가 있으니. 타인의 격을 비료로 삼는

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놈은 격을 쌓는 데 사사건건 방해를 해오리라는 것. 말뜻을 알아들었

으면서도 유선우는 히죽 웃기만 했다.

“알아요. 저보다는 관리자 훨씬 많이 잡수셨을 텐데.”

“힉!”

장난스러운 말에 엔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관리자 중에서도 고참인 그녀는 백명의 악명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스승님 말씀을 고깝게 들은 적이 있긴 합니까?”

“개소리는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지 그러느냐.”

“뭐, 일단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 유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질 것 같지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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