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왜 쏘세요
일반적인 육체였더라면 열흘도 채우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그 미친 패턴을 한 달이
나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체라지만 버틴 게 기적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대로 소멸한다. 환생조차 못 하고 완전히 죽는 게지.”
“그럼 오늘은 멈춥시다. 예? 저 진지합니다.”
수련하고 ‘그거’ 해서 죽으면 그야말로 본말전도. 처참한 꼴을 면하기 위해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흠. 어쩔 수 없군.”
백명은 마지못하게나마 수긍했다. 유선우의 생활이 사람 삶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아는바. 상황이 달라
졌으니 대응도 달라져야만 했다.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했다. 지금은 제자의 재능이 한창 꽃피우고 있는 시기였으니까. 그러
니 차라리 휴식을 겸해서 다른 일을 던져주기로 했다.
“그러면 이번에 한주에게 가보거라.”
“한주요?”
유선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 그와 한주 사이에는 별 교류가 없었다.
첫 대면은 강렬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가끔가다 마주치는 말랑과는 다르게 우연으로도 만난 적이 없었
다.
“안부나 전하라고요? 바쁜 거 아닌가.”
“말이 되는 소리를. 네 몸에 관한 문제다.”
“자세히 좀요.”
“그 관리자의 힘을 받아들일수록 네 몸의 상태는 좋아지겠지. 그럼 어떻게 되겠느냐.”
그냥 시원하게 가르쳐줄 것이지. 유선우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둔한 편은 아니었기에
결론은 금세 나왔다.
“얼마 안 가서 깨어날 수도 있겠네요. 엔라의 권능을 쓴 반동으로 죽을 뻔한 거니까.”
대답하자 백명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바라마지않던 일이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백명은 복잡한 낯으로 말을 흐렸다. 유선우가 이대로 돌아가 명계로 향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방
비를 뚫기는커녕 간수 하나도 이겨내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백명은 무작정 만류하지도 못했다. 돌아갈 수 있는데도 발목을 잡는 건 염치가 없었다.
잠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유선우의 웃음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진심으로 말하는 게냐.”
“예. 저도 부족하다는 건 아니까요. 제가 만족할 때까지 있을 겁니다.”
유선우의 대답은 자못 단호했다. 깊은 고민을 거치지는 않았으나 경솔한 말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스승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 고향이 상당히 개판이거든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신계가 지구를 건드렸으리라 예상되는 상황이다. 어중간한 실력으로 귀환해도 결국에는 죽어서 이곳으
로 돌아오고 말겠지. 그때는 육체마저 잃어 여타 초월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리라.
“그래서 지금 뽕 뽑으려고요.”
유선우의 말투는 가벼워도 담긴 의지는 강인했다. 백명은 무겁게 숨을 흘리다가도 결국에는 흐뭇한 웃음
을 터뜨렸다.
“그래, 좋다. 제자가 그렇게까지 열정을 보이는데 내가 토를 달아서는 안 되겠지. 창을 쥐거라.”
“아니, 쉬겠다고요. 방금 말했잖아요.”
“…쯧. 분위기 다 망치는구나.”
“분위기 살리다 슬슬 뒈지겠습니다.”
유선우의 몰골이 몰골인지라 농담 같지가 않았다. 백명은 다시 한번 한숨을 거듭하고는 뒷짐을 졌다.
“그러면 말했다시피 한주에게 다녀오너라. 네가 이곳에서 머무는 데 도움이 되어줄 게다.”
“믿어도 되는 거예요?”
“자세한 설명만 하지 않으면 될 일이지.”
“만약 제가 설득을 못 하면?”
유선우의 질문에 백명의 눈이 짜게 식었다.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조지러 간다고 하거라.”
***
유선우는 백명에게 들은 대로 한주에게 향했다.
말랑을 통하면 만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대화였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고 하나 어쨌든 안내원은 신계 측일 터. 그를 염두에 둔 채로, 백
명에게 들었던 일의 가능성을 물었다.
“못할 건 없지.”
“그런가요?”
“한동안 혼을 이쪽에 고정해달란 얘기잖아. 네가 원할 때 돌아갈 수 있도록.”
“고정… 그러네요.”
“시스템을 쓰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한주가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히죽거리자 유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정 자체는 언제든 가능하다. 뒤집으면 풀어주는 것마저 한주의 권한 내라는 의미다.
‘이놈이 제일 위험한 새끼였어.’
유선우는 솜털이 삐죽 서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지금껏 생각이 미치
지 않았다는 게 어처구니없을 지경이다.
“근데 왜?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입을 다문 그에게 한주가 아리송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좀 정이 많거든요. 무공 배우는 것도 꽤 재밌고.”
“배워? 제자로 들어갔구나. 누구?”
“…그 아저씨요.”
유선우의 뺨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가 백명에게 배우고 있음은 낙원에서도 유명한 일이다.
한주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굳이 입으로 꺼내는 까닭은…….
“아, 역시 그렇게 됐나 보네.”
한주가 몸을 양옆으로 흔들며 실실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식어 유선우를 응시했다.
“정, 재미. 섭섭하게 왜 그래? 도와달라고 왔으면 성의를 보여야지.”
“거짓말은 아닌데요. 이런 관계는 처음이라 신선하고 좋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낙원은 마음에 드는 편이
기도 해서.”
온화한 목소리에 한주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갔다.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다.
“영화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신기한 풍경,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편리한 권능, 만나본 적도 없는 강자들
까지. 드나들 수만 있으면 진짜 낙원일 텐데 말이죠.”
“정은 솔직히 모르겠지만 재미는 중요하지. 나한테도 그래. 인정해.”
“마음이 맞아서 다행이네요. 제 나이대에선 그만큼 중요한 요소가 없거든요.”
유선우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얼핏 보기에 썩 나쁜 흐름은 아니었다. 낙관하고 있을 때,
한주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내가 등신으로 보여?”
“뭐가요?”
흐름이 단숨에 틀어졌다. 유선우는 당황을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스승님은 자기 이름을 대라 하셨었지.’
백명의 이름은 한주에게도 두렵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모로 봐도 협박은 최선이 아니다. 인격적인 문
제를 떠나 위험도 측면에서 좋지 않다.
현재 한주는 목줄을 쥐고 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탈출은 물거품이 될 터다.
방법은 뻔하다. 방금 말한 혼의 고정을 평생 유지해서 유선우를 낙원에 감금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백명이 한주를 죽일 테니, 서로 침몰하고 끝인 셈이다. 최선은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
“말했잖아요. 거짓말 아니라고. 사람 마음이 어디 뜻대로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런데 난 네 생각보다는 인간을 잘 알아. 너에 대한 것도 은근히 빠삭하고. 사람 과거
들추는 건 일도 아니거든.”
“뭐 재밌는 거라도 있었나 봅니다. 남한테 자랑할 만한 인생이긴 하죠.”
“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봤지. 마지막엔 조금 울컥하기도 했어. 남의 차원에서 고생고생해서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니까.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돌려보려고.”
한주의 사족에 유선우는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그럴 때가 아닌 건 알지만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 많았다.
“몇몇 씬은 빼고 보시는 편이….”
“그런데 지금은 바로 돌아가기 싫다고 하네?”
무감정한 음성이 말꼬리를 잘랐다.
“…….”
유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변덕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살아온 태도가 너무도 모순됐다.
“네가 정이나 재미를 추구할 장소가 언제부터 여기가 됐지?”
“…의외로 말 잘하시네요.”
“너는 시원찮네.”
유선우는 인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주가 다시금 미소짓고 얼굴을 떼어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할게. 음.”
한주가 고민하듯이 눈매를 좁혔다. 유선우는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은 뜸을
들이며 양보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리라.
“혼의 고정, 그래. 해줘도 상관없어.”
“본론은요?”
“권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가냐는 게 문제야. 내가 가지고 목줄을 휘두를지, 아니면 너한테 갈지.”
“한 번 들어나 보죠. 그쪽도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말하지 않았어? 재미….”
“재미 엿 먹으시고요.”
유선우가 헛웃음을 치곤 다리를 꼬았다.
“정, 재미.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제가 등신으로 보입니까? 전 댁들이 얼마나 죽는 걸 무서워하는지 잘
알아요.”
그는 관리자의 죽음을 지켜본 전적이 있었다. 초탈하기는커녕 발버둥 치는 꼴이 퍽 인상적이었다.
안내원도 별반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그런 놈이 신계에 찍힐지도 모르는 행위를 재미로 한다고?
개소리다. 솔직히 처음부터 지랄한다 싶었다.
말없이 시선이 오갔다.
이번에는 한주가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반 정도는 진짜로 흥미였는데, 참.”
“그럼 제 말도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되겠네요. 게다가 그냥 심심하다고 남 과거까지 파봅니까?”
“이건 내가 할 말이 없네. 인정해.”
“그리고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유심한 시선이 한주에게 쏘아졌다.
“엔라에 대해선 뭐라고 보고하셨죠?”
“난 지시 안 오면 보고도 안 해.”
“근데 지시가 왔겠죠. 벌써 한 달 지났는데도 반응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위에서도 여긴 잘 안 건드려. 부담스러워하니까. 너도 알잖아.”
“아예 건드릴 생각이 없으면 안내원이 왜 필요한데요?”
안내원은 초월자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신계에서 초월자와 치고받아서 겨우겨
우 낙원에 처넣었는데 잘도 편의를 봐주겠다.
“감시하고, 여차하면 간섭하고. 그게 댁들 일이잖아요? 제공해주는 섬이나, 아무거나 만들 수 있는 권한
은 안내원의 목숨값이겠고. 그거라도 없으면 진작 우리 스승님이 안내원들 다 회 떠버리셨겠죠.”
“말랑이 들으면 울겠다, 야.”
“여기 없으니까 됐어요.”
유선우는 피식거리곤 말을 이었다.
“이번엔 딱 봐도 간섭할 상황이지 않았나요? 별로 어렵지도 않잖아요. 말만 조금 흘리면 끝인데.”
직접 손대지 않고 엔라를 죽이는 법은 간단하다. 낙원에 엔라의 소식을 퍼뜨리면 되는 일이다. 관리자를
사냥감으로 보는 초월자들은 좋다고 달려들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문은 가라앉았다.
그 원인은 한주에게 있을 터였다.
“죽었다고 했지.”
“언제?”
“보고 요청 들어온 건 2주 정도 됐어. 하여간 느려 터진 건 여전해, 새끼들.”
“…그렇게 말해도 돼요? 그래도 부모 같은 거 아닌가.”
“하는 게 X 같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한주가 외모에 어울리지도 않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대답과 태도가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걸 눈
치채고 나서야 유선우는 속을 쓸어내렸다.
“저기요.”
“응?”
“우리, 아군은 쏘지 맙시다.”
이 새끼, 배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