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라
“아무것도 안 했다니….”
유선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쥐뿔도 모르면서 자신을 탓해온 엔라의 사고방식
이 이해되지 않았다.
“전에 말하지 않았었나? 네가 뭘 실수해서 생긴 결과라고.”
“뉘앙스는 잘 기억이 안 난다만, 그랬었지 아마.”
“앞뒤가 안 맞잖아. 한 거 없다면서 왜 자책을 해?”
유선우의 눈빛에 미세한 불신이 담겼다. 짧은 인생일지라도 상대의 말이 모순되는 경우는 숱하게 봐왔
다.
그 원인은 십중팔구가 거짓말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엔라가 거짓말을 뱉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초조해하는 유선우에게 엔라가 말했다.
“으음… 말투가 조금 적절치 못했나. 내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건드리진 않았다는 뜻이다.”
“근데 뭐 아무런 의심을 안 했어?”
“의심이야 많이 했었다. 날 마땅찮게 여긴 다른 관리자의 소행이지 않을까 싶었지.”
유선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타당한 선. 목적이 분명하니 신계의 음모보다는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관리자의 권한은 본인의 구역에서는 막강하나 그 외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니.”
딱 잘라 부정한 엔라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원인을 찾지 못했지. 그건 결국 내 탓이 아니겠느냐.”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문제가 내게는 없었을지 모르나 지구에는 있었을 것이다. 과정은 어쨌든 정황이나 결과가 확실하니 내
가 발뺌을 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책임을 졌다는 뜻. 유선우는 이제야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어쨌든 몬스터는 지구에서 흘러간 거니까.’
지구의 창작물이 제멋대로 튀어나온 것이다. 출처가 분명했기에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엔라에게는 해결책이, 다른 관리자들에게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흐른 것은 필연적
인 결과였다.
“하, 골치 아프네.”
생각을 정리한 유선우는 피로감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를 보면서 엔라가 툴툴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만났는데 딱딱한 얘기만 하는구나. 섭섭하도다.”
“…머리가 꽃밭이네, 아주.”
“내가 처한 상황이 시궁창이니 머리라도 꽃밭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참나.”
시종일관 심각하던 유선우가 피식 웃었다. 그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방금 대화로 피아의 구별은 더욱 뚜
렷해졌다. 신계를 적대할 이유를 얻은 것으로 수확은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젠 어떤 대화를 할까.
할 말은 차고 넘친다. 부탁할 것도 있다.
쌓인 얘기는 많고 많지만 거슬리는 점부터 짚기로 했다.
“그럼 우선 말투부터 고쳐. 우리 스승님 같아서 좀 짜증 난다.”
“호오. 모르는 새 그런 것도 생겼느냐.”
“겹친다니까.”
단호한 어조에 엔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알았어. 그만하겠느니, 아니. 그만할게.”
“그래. 역시 그게 낫다.”
한편 유선우는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고풍스러운 말투도 완전히 익숙해져 싫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가벼운 쪽이 외견과의 갭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맞다. 너한테 도움 좀 받고 싶은데.”
“응?”
“지금 수련이 막힌 참이라서.”
유선우가 가르침을 구할 대상으로 점찍어둔 인물은 엔라였다. 빙공이 필요한 이유는 냉기를 띠는 간섭력
과의 상호작용을 위함. 그렇다면 그냥 간섭력을 건네준 엔라에게 기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일단 설명하자면…….”
유선우는 현 상황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관리자의 파편에 발목을 잡힌 것.
빙공을 배워야 하는데 가르쳐줄 사람이 없다는 것.
사정을 들은 엔라는 고민에 잠겼다.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결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와주고는 싶은데… 미안. 난 무공 같은 건 하나도 모르거든.”
엔라에게 한정된 말이 아니었다. 관리자는 선천적으로 강대한 권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니 굳이 무공을 익히는 관리자가 있을 리가 만무. 어딘가에는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엔라에겐
그런 별난 인맥은 없었다.
또다시 벽이었다.
하지만 유선우는 무덤덤했다.
“그건 기대도 안 했어. 마나… 그러니까 간섭력을 늘리고 싶은데.”
내공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주된 동력원을 간섭력으로 바꾸면 될 일. 창술에 접목하는 것도 충분히 가
능하리라.
“알아서 늘어날걸?”
“그 코딱지만 한 걸 어떻게 써먹어.”
“그것도 그렇지. 단기간에 늘릴 방법은 글쎄. 내가 알기로는 없어.”
“그래? 내가 아는 거랑은 좀 다르네.”
유선우의 입가가 씰룩였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네 거 나눠주면 되잖아.”
유선우는 간섭력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봤다. 근거는 엔라가 아브나바에게서
빌려 썼던 경험. 전례가 있으니 못할 것도 없을 터였다.
“…뭐라고?”
“내놓으라고.”
얼굴은 웃고 있는데 목소리는 낮다. 심상찮은 모습에 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진심이야?”
“당연하지. 그렇다고 다 달라는 건 아니야. 조금이면 돼.”
유선우는 엔라를 안심시키고자 온화하게 말했다. 실제로 많은 양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관리자의 파편을
꺾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후에는 비로소 격을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부족한 분량은 글쎄.
돌아간 뒤 관리자들을 족쳐서 수확하면 되겠지.
“딱 말해봐. 돼?”
“……그래, 가능은 해. 가능은 한데.”
엔라가 눈매를 확 좁히며 말을 반전시켰다.
“근데 너무한 거 아니야? 너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말은 똑바로 하자. 갇혀서 탈옥했다며? 올 데가 여기밖에 없었던 거겠지. 틀려?”
“그게 지금 할 소리……!”
유선우의 매정한 말에 엔라가 언성을 높이려 했다. 그녀가 말을 끊고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으음.”
처벌이 정해진 이상 엔라에게 미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신계의 손 위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 낙원
도 관리자에겐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엔라가 살아있는 건 순전히 유선우 덕분이었다.
“봐, 맞잖아. 근데 조금 넘겨달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모아둬봤자 쓸데도 없잖아.”
“그, 그렇구나. 이제 지구 관리도 안 해도 되고.”
“그럼 답 나왔네. 부탁할게.”
엔라는 끙끙거리며 유선우를 응시했다. 생각해보면 딱히 건네줘도 문제는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말
이다.
“근데 네가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또 무슨 소리야.”
“그릇이 너무 작아. 네가 얼마나 원하는지는 몰라도 부담이 상당할걸. 자칫하면 독이 될 수도 있어.”
“……그건 생각 못 했네.”
유선우는 일리 있다며 수긍했다. MP 통 한계를 무시하고 억지로 박아넣는 꼴.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게 당연했다.
‘그냥 다른 무공을 배워야 하나.’
유선우의 표정이 급격히 떫어졌다. 침울해진 그를 보며 엔라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기, 있잖아.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뭐? 있어?”
“크기가 부족하면 효율을 높이면 돼. 나랑 파장을 맞추는 거지.”
“돌려 말하지 말자. 오래 걸려? 늦어도 5년 안엔 돌아가고 싶은데. 솔직히 아브나바가 잘할지도 모르겠
고.”
“응, 알아. 난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좋지만.”
엔라의 어색한 웃음에 유선우는 가슴이 미어졌다.
“문제가 또 있었구나. 넌 어쩌냐. 이쪽에 두고 갈 수도 없고.”
“그건 내가 생각해둔 게 있어서 괜찮아.”
“웬일로 우리 빡대가리가?”
유선우가 감탄 반 수상함 반으로 눈을 흘겼다. 엔라는 그런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
다.
“나보단 네 일이 먼저지. 방법이 뭐냐면 말이야.”
말을 멈춘 엔라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긴장한 듯하기도 했고,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에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나랑 그거 하면 돼. 그거”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이다. 유선우가 똥 씹은 표정을 짓자 변명하듯 설명이 돌아왔다.
“정신체끼리 몸을 섞는 건 의미가 크거든. 말 그대로 서로 연결되는 거야.”
“좀 불길하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어쨌든 상성이라고 할지, 궁합은 점점 좋아져. 관리자들끼리는 거
의 안 하지만.”
“궁합…….”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이내 키득키득 웃으면서 엔라를 바라봤다.
“어째 별로 기분 나쁘지가 않네.”
“응?”“오랜만에 만나서 말하긴 뭐한데, 처음엔 너 진짜 싫어했었거든. 알지?”
“…그야 알지. 욕 많이 먹었었고.”
엔라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정수리에 유선우의 손이 앉았다.
“그때 궁합이니 뭐니 들었으면 화냈었을 텐데. 지금은 안 그래.”
엔라에 대한 감정은 어느덧 온화해졌다. 창끝이 닿을 곳은 따로 있었고, 엔라는 멍청하되 순한 여자였다.
이계로 가게 됐던 건 순전히 그녀 책임이겠다마는. 이 문제라면 진즉에 결론을 내린 뒤였다. 고생이 있었
기에 특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죽어도 고맙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엔라를 대하는 것에 있어선 응어리가 사라졌다.
***
이후로 유선우의 일상은 큰 폭으로 달라졌다. 협곡에서의 수련은 여전했지만, 집에서의 생활은 격변했
다.
이전에는 혼자서 지루하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었다면, 이제는 엔라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팔팔한
스물넷 청년답게도 그 생활이 싫지는 않았다.
기분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엔라가 말했던 상성이 맞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
다. 손발이 잘 맞게 되고, 보이지 않는 연결이 두꺼워졌다고나 할지.
기존 목적도 빠르게 달성해가고 있었다. 엔라가 간섭력을 불어 넣어주니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
다.
엔라는 아까워 죽겠다며 눈물을 흘리고는 하나 뭐 어쩌랴. 간섭력에 대해서 무지한 유선우로서는 딱히 안
쓰럽지도 않았다.
“근데 표정이 왜 그러느냐.”
백명이 떫은 낯으로 유선우의 몰골을 살폈다. 마치 시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진짜로 죽을 거 같습니다.”
골골거리는 유선우의 상태는 확실히 산 사람 같지는 않았다. 기가 잔뜩 빨린 것처럼 수척해 창 한 번 휘두
르기를 힘들어했다.
‘그야 씨, 죽도록 수련하고 죽도록 그거 하는데 뒈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