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라
과한 비약. 억측일 공산이 컸다.
그러나 위화감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유선우의 낯이 점차 굳어갔다. 심각해진 모습에 백명이 고개를 주억였다. 낙원의 출구를 열어줄 열쇠인
유선우에게 의욕이 생기는 건 환영할 일이었다.
“본래는 돌아갈 즈음에 알려주려 했다만, 상관은 없겠지. 낙원은 명계와 이어져 있다.”
“…그게 어딘데요? 전혀 안 와닿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개 인간이었으니 당연하다. 그래서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이고.”
“그냥 귀찮으셨던 거면서.”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지.”
백명이 피식거리며 술병을 들었다. 잔이 채워지는 소리와 말소리가 어우러진다.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주마. 명계는 거대한 감옥인 셈이다.”
“그건 압니다. 문이 거기 있으니 저희가 명계에 갇힌 거나 다름없겠죠.”
“아니, 낙원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쓸모없어진 관리자, 특별히 강한 혼. 신계의 신경을 긁는 존재들이
전부 갇혀 있는 게지.”
“제멋대로군요.”
“그래. 제멋대로다. 그리고.”
백명은 웃음기를 싹 지우고 유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오랜 염원이 눈빛에 담겼다.
“이제야 뒤엎을 때가 왔어.”
***
진지한 화제가 지나가자 술자리는 싱겁게 끝이 났다. 유선우가 지겨움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백명과의 대화가 싫지는 않았다. 꼰대 말투만 걸러 듣는다면 안줏거리로는 충분했다. 다만 술이 안주에
턱없이 모자랐다.
‘그냥 쓴 물이잖아.’
물처럼 퍼마셨으나 알딸딸하지도 않았다. 취하지 않는다면 마시는 의미가 없었다.
‘앞으로 낙원 내 음주는 거르는 걸로.’
한창 마실 나이이건만. 인생의 낙을 하나 빼앗겨버렸다. 유선우는 탄식하며 무관을 나섰다.
그의 발은 자연스레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수 개월간 완전히 익숙해진 섬. 적응된 건 환경만이 아니었다.
홀로 있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돌아갈 장소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이다지
도 반가울 줄은 생각지 못했다.
금세 집에 도착한 유선우는 소파로 다가갔다. 아이릴이 차지하던 자리. 그곳에는 엔라가 누워 있었다.
‘얜 언제까지 자려나.’
아직 의식은 회복되지 못한 채였다. 그래도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았다. 괜찮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백명
을 믿었다.
게다가 날뛰던 마나도 제법 잠잠해진 상태. 보아하니 머잖아 정신을 차릴 듯했다. 얕은 지식으로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하다만.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네.’
얼른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
엔라가 낙원에 찾아온 뒤로 사흘.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치들은 여전히 다퉜다.
떠들던 이들도 똑같이 떠들었다.
그들의 입에선 종종 엔라의 화제가 튀어나왔다. 관리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구석구석에 퍼졌다.
낙원은 즐길 거리가 없는 심심한 곳이다.
새로운 일은 논란이 되기에 좋았다.
하지만 극성으로 열을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백명이 죽였겠지. 어르신이 묻으셨겠지.
여럿의 입으로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결국에 낙원은 여느 때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유선우와 백명도 그래야만 했다. 평소처럼 협곡에서 수련을 쌓아야 했고, 그리할 터였다.
아무런 장해가 없었더라면.
“문제가 생겼다.”
“예?”
“이럴 줄은 몰랐는데. 하아.”
백명이 골치 아프다는 듯 눈가를 매만졌다.
또 무슨 일이래. 유선우는 약간의 긴장감은 안은 채 백명을 쳐다봤다. 뒷말을 재촉하는 시선에 백명이 상
세를 밝혔다.
“빙공을 가르칠 놈이 없어.”
“아, 그렇습니까?”
“그래. 혹시 몰라 낙원을 세 바퀴 정도 둘러봤다만 쓸만한 놈이 없더군.”
유선우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기로 무협지에서도 빙공은 희소한 무공이었다. 태생적
으로 음기를 타고나야만 하는 금수저형이었던가.
‘단명하는 데다가 손도 귀하다고 나왔었지.’
당연히 소설과는 다르겠지만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없진 않겠지.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간단히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부터가 오산이었다.
“마법사는 안 되나요?”
“마법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어떻게 보면 무공보다도 편법이 안 통하는 분야지. 배우다간 머리가 터질
게야.”
난해한 이론을 섭렵해야 하고 매일 같이 머리를 쥐어짜며 연구해야 한다. 변태들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격의 재현에도 불리하겠죠. 그냥 말해본 거였어요.”
“어째 의외의 면에서 막히는구나.”
“전 익숙한 편인데. 항상 이랬었거든요.”
스승의 부재 정도야 새삼스럽기만 한 일. 옛 기억을 떠올린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백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태도도 의외고 말이다. 급할 때는 언제고 막상 막히니 느긋하게 구느냐. 대개는 반대일 터인데.”
“제가 그 대개에 포함되진 않는가 보죠.”
“아니…. 진지하게 좀 듣거라.”
백명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누구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건만, 배우는 본인이 태평하니. 걱정하는 쪽
이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달리 생각이라도 있느냐?”
“음. 우선 꼭 빙공을 배워야 합니까?”
“그편이 가장 효율적이다. 말했던 대로 네가 가진 간섭력과 상성이 좋겠지. 지금은 하잘것없는 수준이라
도 훗날에도 그렇지는 않을 게야.”
백명의 설명에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여태까지는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공의 활용법이 중요하다는 건 알았다. 다만 빙공이 아니라 다른 무공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이
전에는 단순히 그게 잘 맞을 거라는 말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들어보니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였던 모양. 이제야 좀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
전히 유선우는 담담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제가 배운 창술은 범용적인 거죠?”
⽕氣“그래. 심법에 관한 건 의도적으로 배제했으니 화기( )를 접목해도 상관없다. 달리 말하면 아직은 미
완성인 셈이지.”
백명의 말로 확신을 얻었다. 유선우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네요. 사실 기댈 구석이 하나 있어서.”
“음?”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창술부터 갑시다.”
말을 돌리고는 손에 창을 쥔다. 더 얘기할 생각은 없다는 뜻. 스승을 휘두르려는 작태에 백명이 헛웃음을
쳤다.
“아주 제멋대로구만.”
그리고 한동안 유선우의 곡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
유선우의 생활에는 하나의 패턴이 생겼다.
시간의 흐름이 빠른 협곡에서 이틀가량의 시간을 보낸다. 다음으론 집으로 돌아와 6시간에서 8시간의 휴
식을 취한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다. 지금 역시 패턴과 어긋나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약간 더 처맞았다는 것
을 제외한다면.
수련을 마친 유선우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흐느적거리며 현관문을 여는 순간,
와락!
품에 난데없는 무게가 실렸다.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결이 닿는다. 익숙한 감촉. 엔라의 몸이 주는 이
느낌이 감개무량했다.
“뭐야. 언제 일어났어?”
“으음…. 좀 됐다. 심심해 죽는 줄 알았느니라.”
엔라가 가슴팍에 머리를 문질러댔다. 이전보다도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말랑이 본다면 눈을 의심하지 않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품은 유선우가 작게 웃었다.
“근데 가만히 있었네. 웬일이야.”
그는 솔직히 불안했었다. 엔라가 자신이 없는 사이 깨어나 설치고 다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어떤 초월자에게 잘못 걸려 죽었더라면 웃음도 안 나왔으리라.
토노토에게 맡길까 생각도 했었다. 문제는 서로 안 맞을 게 뻔했다는 것. 둘이 박 터지게 싸울 미래가 눈에
선하더라.
그래서 집에 내버려 뒀는데, 다행히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찾으러 갈까 싶긴 했다만, 나도 학습 정도는 하는 것이다.”
“학습? 뭔 소리야.”
“몇 있지 않았느냐. 잠깐을 못 기다려서 설치는 치들이. 그리고 대부분이 인질로 잡혀서 욕을 처먹곤 했
었지.”
“…몇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았지.”
유선우는 옛 동료들을 떠올렸다. 허구한 날 기다리라고 해도 못 알아 처먹더라.
그러다가 결국에는 인질이 되거나 다쳐서 지랄지랄. 뒤처리는 항상 자신의 몫이었다.
그 장면은 필시 지켜보던 엔라에게도 고구마였겠지. 지금 도움이 됐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
유선우는 엔라에게 설명을 들었다.
시국을 어지럽힌 죄라며 처벌을 받은 것.
명계에서 갇혀 지내다가 틈을 봐 탈옥한 것까지.
원인과 결과가 확실해 이해하기는 간단했다.
하지만 유선우는 과정이 궁금했다. 그 파란만장한 경험의 상세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탈옥했대. 그렇게 경비가 허술해?”
“병력은 꽤 있었다만 할 만했다. 결국은 지쳐서 웬 허접들한테 쫓기다가 쓰러졌지마는.”
“허. 대단하네.”
“흐흥. 나는 빠꾸 없는 여자인 것이다.”
엔라가 가슴을 펴고 으스댔다. 관리자 중에서도 힘만큼은 특출난 그녀다. 방심한 틈을 타 깽판 치는 것 정
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신계에서 내려와 있었다면 얘기는 달랐겠지. 그래도 별걱정은 없었다. 그분들은 명계를 싫어하시니까.”
“그래?”
“음. 발 디디는 것조차 더럽다고 생각하시지.”
유익한 정보다. 이후에 명계로 향하게 된다면 엔라의 조언은 피와 살이 되겠지. 머릿속에 새겨둔 유선우
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지구는 어떻게 됐고?”
“아브나바가 잘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 굉장히 속이 편하구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니라.”
당당하게 말하는 엔라의 낯이 화사하다. 유선우는 쓴웃음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정리해보면 간수가 했던 말이랑 똑같네.’
엔라가 수감당했었다는 것도, 탈옥했다는 것도.
간수의 입은 예상보다도 솔직했던 모양이다. 덕분이라고 할지, 느긋하게 새로운 정보를 곱씹을 수 있었
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엔라의 죄목. 시국을 어지럽혔다고 다짜고짜 구금이란다.
‘참 훌륭한 조치야.’
머리에 똥물이 찼나 싶을 정도로.
해결책을 꺼내고 처벌을 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 지구에서 설치는 치들을 진정시킨다거나, 혹은 이곳
저곳으로 흘러간 암 덩어리들을 박멸한다거나.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지구에 다른 관리자를 파견하는 것 정도는 해야만 했다.
그러나 별다른 대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상황이 나아졌다면 바통이 아브나바에게 갈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유선우는 엔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 분명 죄인이다. 수많은 차원에 피를 뿌리고 제 구역마저도 개판으로 만든 대역죄인이다. 평생을 감
방에서 썩어도 싸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의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게 정말로 엔라의 소행이었는가.
아쉽게도 엔라는 명확한 답을 내주지 못할 터였다. 그녀는 여태 본인의 실수라고 말해왔으니까.
다시 물어도 똑같겠지만, 더 자세히 파고든다면 내막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야, 하나만 묻자.”
“음?”
“네가 대체 뭘 했길래 그, 몬스터가 엄한 데다 흘러간 거야?”
“참 새삼스럽구나.”
엔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