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백명은 뒷짐을 진 채로 불청객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은 달랐지만 중요한 부분에선 같았다.
등에 달린 효율성 없어 보이는 작은 날개. 그리고 불쾌감이 들 정도로 똑 닮은 간섭력. 합계 열셋의 무리가
전부 동일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간수들이군. 보는 건 오랜만이구나.”
관리자나 안내원과 마찬가지로 신계에서 만든 존재들. 명계의 죄수를 감시하는 한가한 놈들이다.
본래라면 대면할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니 밖에서 이변이 벌어진 모양이었
다.
“하나 물어보마. 무슨 일로 왔지?”
“그걸 우리가 답해야 하나?”
“나는 대답할 건데. 저거 잡으러 왔어.”
“알았으면 꺼져!”
한 번의 물음에 다수의 답이 돌아온다. 백명은 떠들썩한 건 몰라도 정신 사나운 건 싫어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입을 줄이는 편이 옳았다.
“안내원과는 다르게 교육을 똑바로 못 받은 모양이야.”
백명이 느릿하게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은은하게 빛나던 그의 손이 선명한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파지직!
손끝에서 한 줄기의 뇌전이 뽑혀 나온다. 뇌전의 모양새는 가느다란 실처럼 볼품없었다.
재롱이라도 부리나. 간수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렀다. 조소는 오래지 않아 끊어졌다.
쿠르르릉!
번개가 거미줄 치듯이 수만 갈래로 흩어졌다. 벼락의 줄기는 순식간에 아홉의 몸을 불살랐다.
그러고도 기세가 죽지 않아 맹렬하게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닿는 곳곳마다 공간이 파편이 되어 떨어져
나간다. 덮어져 있던 투명한 돔이 깨져서 흩날리는 듯했다.
“이게 무슨….”
경악은 간수들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유선우도 그들과 같이 눈을 의심했다.
이게 어딜 봐서 무공이란 말인가. 자신이 여태까지 해온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졌다.
‘나도 동자공을 배워야 하나? 아니, 배울 순 있나?’
평소였다면 하지도 않았을 멍청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토록 압도적이었다. 수도 없이 갈아엎어 왔던 상
식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경외의 시선이 백명을 향했다. 그런 가운데, 정신을 차린 간수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런 미친…!”
“위에다 보고해, 빨리!”
“보고는 얼어 죽을. 일단 튀어!”
재빠른 판단이었지만 올바르진 않았다. 그들이 낙원에 흙발을 들이민 것부터가 경솔한 행동이었다.
파지지직!
위로 끝없이 솟구치던 뇌전이 역행을 시작했다. 전류가 낙하하며 원형으로 퍼진다. 촘촘한 백색 그물이
간수들을 둘러쌌다.
“자, 잠깐만! 공무 집행 중이라 했잖아!”
“방해했다간 신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처벌이 두렵지 않나?”
“그건 네놈들이나 그렇고.”
백명은 콧방귀를 뀌며 그물을 좁혔다. 셋이 새로이 잿더미가 되었고, 남은 건 고작 한 놈이었다.
“살려, 살려줘! 보고 안 할 테니까!”
“말을 묻기에 사람은 하나로도 과하지.”
“무슨 개소리…!”
“하나에서도 반쯤은 없는 게 낫다.”
무심한 음성 뒤에는 간수의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
“그래서 뭐하러 왔다고?”
백명은 반쯤 송장이 된 간수를 보며 물었다. 평소였다면 그냥 죽였겠다만 이번에는 내막을 듣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의 목적에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다.
“끄으으…. 젠장, 내가 어쩌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반송장이 꿈틀거렸다. 아직도 욕지거리가 나온다니. 철없는 건지 대담한 건지, 여하간
정상은 아니었다.
“사람은 맞으면 좋은 말을 하게 되는 법이지.”
“그렇습니까?”
“남한테 필요한 말 말이야.”
“그러다가 듣기도 전에 죽겠습니다.”
유선우가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도 고문은 익숙했지만 언제 봐도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그럼 내가 할까? 나 고문 같은 거 잘해.”
토노토의 활기는 살벌한 소리를 할 때도 여전했다. 섬뜩한 대화에 간수가 죄송하다는 듯 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도, 도주한 죄수를 쫓아왔습니다!”
“아까도 그랬었지. 얘가 죄수라고?”
유선우가 인상을 찌푸린 채 엔라를 바라봤다. 엔라는 아직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세는 저희도 모릅니다. 하여튼 권능을 회수하기 전에 죄수가 탈옥했고, 저희는 쫓다가 결국 여기까지
왔습죠.”
“명령받고 온 건 아니란 말이군. 신계는 항상 뭉그적대니까.”
“그, 그렇게 됩니다.”
백명의 낯이 단박에 시큰둥해졌다. 듣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웬 별난 관리자가 탈옥해 낙원으로 들어왔고, 간수들은 질책을 우려해 제멋대로 행동했다. 의외성은 넘
치더라도 단지 그뿐인 일.
그는 안심이 드는 한편으로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흥이 식어버렸다.
“그래. 이제 되었다.”
“자, 잠깐…!”
파스스.
백명의 손이 닿자 간수가 잿더미로 변했다. 살려둘 이유는 하등 없었다. 매정한 손속에도 유선우와 토노
토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남은 건 이 여자군.”
백명의 시선이 엔라에게 옮겨갔다. 귀찮은 일을 떠넘긴 값을 치르게 해줄 셈이었다. 그의 의중을 눈치챈
유선우가 백명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제 지인이에요.”
“지인? 관리자가 말이냐.”
“네. 전에 제가 안내원 둘이랑 말하던 거 들으셨다면서요. 그때 나온 엔라가 얘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하게도 토노토는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반면에 백명은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확실히 간섭력도 똑같아. 그래도 가만히 두면 성가셔질 텐데.”
“성가셔지는 게 싫으십니까?”
유선우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를 보며 백명도 마주 웃었다.
“그냥 한번 말해봤다. 네가 오니 일이 끊이지를 않는구나.”
“어르신, 내버려 두시게요?”
“딱히 문제는 없지 않으냐. 숨길 건 알아서 숨기면 돼.”
엔라 탓에 신계의 이목이 끌릴 수는 있다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몇 달도 전부터 주목은 하고 있었을 테니
까.
“애초에 시선이 한둘 늘어난다고 해서 놈들이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계 말씀이시죠. 저번부터 생각하던 건데, 그놈들이 왜 몸을 사리는지 좀 이해가 안 돼요.”
명색이 신인데 쫄아서 움직이지도 못한다니. 유선우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낙원은 감옥이지만 우리에게 족쇄는 없지. 사지가 자유로운 죄수는 누구나 두려워하는 법이다.”
“옛날엔 더 자유로웠었을 테죠. 그런데도 결국은 강제적으로 낙원에 들어오게 됐고요.”
“당시엔 수가 적었으니까. 점점 줄어들어 낙원에 온 시점엔 스물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때도 출혈을
겁내 전면전을 피했던 놈들이니 지금은 어떠하겠느냐.”
“…20명이요? 말이 되나.”
유선우가 반신반의한 투로 말했다. 그는 신계가 그만한 소수의 인원을 두려워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
다. 아니면 의외로 신계가 허접스러웠던 것일지도.
‘아니, 그건 아니겠지.’
관리자만 불러모아도 수백이 족히 넘을 텐데 무슨. 생각이 너무 이리저리 튀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자 백명이 싱겁게 웃었다.
“평균적인 무력이 달랐지. 그땐 먹을 게 많았으니 말이다.”
“갑자기 웬…… 아.”
유선우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당시의 백명과 다른 초월자들이 관리자나 신을 먹어치운 것이다.
자신과 다른 점은 요행이 아니었다는 것. 그러니 소화도 완벽하게 해냈겠지.
초월자의 숫자는 점차 줄었겠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갈수록 강해졌을 터다.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과
연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까.
백명만 봐도 그건 명백했다.
“나도 좀 일찍 태어났어야 했는데.”
잠자코 있던 토노토가 툴툴거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낙원 원로들의 무력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전부
백명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부러워할 정도는 됐다.
“그랬다면 넌 진즉에 죽었을 게다.”
“에이, 절 뭐로 보시고.”
웃어넘기는 토노토를 보며 백명이 혀를 찼다.
“내 때는 말이다. 개판이 따로 없었어. 의지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다.”
“…또 시작이시네.”
“편히 살아온 요즘 것들에겐 짐이 무거웠겠지.”
“알았어요. 내가 나빴어.”
다 좋은데 이놈의 꼰대질은 언제 그만두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토노토가 유선우의 팔을 잡아끌었
다.
“선우야. 돌아가자.”
“네? 전 더 듣고 싶은데요.”
“오오, 그러냐. 그럼 한잔 걸치면서 얘기하자꾸나.”
“술 좋죠. 뭘 좀 아시네.”
한잔이라는 말에 유선우가 반색했다. 제자의 반응이 좋으니 백명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취하진 않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술자리의 주역은 대화인 게지.”
“당연하죠. 그리고 스승님 말씀을 어떻게 취한 채로 듣겠습니까. 한마디 한마디 적어가면서 들어도 모자
랄 판에.”
“아암, 그렇지!”
“저희 집으로 괜찮으십니까? 얘도 옮겨야 해서.”
유선우가 엔라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뽕 맞을 대로 맞은 백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니, 무관으로 가자꾸나. 좋은 장소가 있다. 술은 경치를 곁들여야 제맛이지 않겠느냐. 네 친구는 내가
옮겨다 주마.”
“하하. 역시 뭘 좀 아십니다. 연륜이 있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둘은 저들끼리 화기애애했다. 홀로 소외된 토노토가 헛웃음을 쳤다.
“사회생활도 잘하네.”
***
쪼르르륵.
자그마한 상 위, 백색의 잔에 술이 차오른다. 마루에 앉은 백명은 차분하게 그것을 바라봤다. 잔이 가득
차자 이번에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홍의 꽃이 만개한 정원은 썩 화려했다. 수만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절경일 터다. 금세 질려서 바꿔버리겠
지마는.
“아름답지 않으냐.”
“왜 또 감상적인 척하십니까. 솔직히 안 어울립니다.”
“…흠. 개인적으론 조금 전이 이상적인 제자 상이었는데 말이다.”
“안 하던 짓 하니 피곤하더라고요.”
농담 같은 진담에 백명이 조용하게 웃었다. 그가 맞은편에 앉은 유선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관리자는 금방 일어날 게다. 단순히 지쳤을 뿐이니.”
“다행이네요.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편이 안전하겠죠?”
“당연하다. 애초에 나갈 수도 없겠지. 신계에서 네 친구를 이용한다 쳐도 여기에 두는 편이 써먹기 좋으
니까.”
“이용이라.”
말을 되뇐 유선우가 입매를 비틀었다. 엔라가 누군가에게 휘둘린다 생각하니 이유 모를 불쾌감이 스멀스
멀 기어올랐다.
“다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
백명이 말을 반전시켰다.
“첩자 노릇을 시키기엔 초월자들은 관리자를 싫어하니.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금세 죽었을 게야.”
퍽이나 희망적인 얘기다. 유선우는 골치가 아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또 다른 게 문젠데요. 제가 돌아간 뒤는 어떡합니까?”
“…글쎄다. 보던 눈이 너무 많았어. 항의라도 하면 내가 막기는 힘들어지겠지. 이런 곳에서도 명분은 필
요하니 말이다.”
“하아. 생각해봐야겠네요.”
엔라를 데리고 나갈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여간 하나하나 민폐 되는 여자다.
애초에 어떻게 찾아온 것일까. 상황을 정리하느라 잊고 있던 의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스승님.”
“음?”
“문이 대체 어디 있습니까?”
의문의 해답은 백명에게 있었다. 이전에, 그는 분명히 낙원의 문이 위치한 장소를 안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알아야 했다. 이유는 엔라를 건드린 것에 대한 불쾌감뿐이 아니었다.
‘탈옥했다고 했었지.’
즉 수감당했었다는 뜻. 행보를 보면 처벌받아 마땅한 여자이긴 했다. 많은 차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
인이니까.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일개 관리자한테 그런 일이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