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후우.”
제자리에 선 유선우는 가느다란 숨을 내뱉었다. 심호흡을 두어 번 반복하니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선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가 쥔 창이 바위를 향해 휘둘러졌다.
콰드드득!
5미터가량 떨어진 바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갈라져 갔다. 마치 창과의 공간이 접힌 듯했다.
“…빨리도 배우는구나.”
지켜보던 백명이 허탈한 듯 감탄한 듯 말했다. 몇 개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건만.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재능
이었다.
“그래요?”
“최소 3년은 걸리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에이. 고작 이거 하는데 무슨 3년이에요. 절 너무 허접으로 보시네.”
유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딱히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아직 그는 백명은커녕 토노토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관리자의 파편도 꺾지 못했고. 이제 출발선에서 발
을 뗀 격이기에 자랑하기엔 한참 일렀다.
‘하긴. 워낙 먼 길이니.’
백명은 유선우의 조급함을 헤아렸다. 눈에 띄는 진전이 없는 이상은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슬슬 추진력이 붙을 시기가 되었다.
“이제는 시간을 쪼개도록 하지. 내공을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마.”
“내공… 꼭 필요합니까?”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
“그 뭐야. 격이 중요한 게 아닌지.”
유선우는 내공, 즉 마력이 끝물이라고 생각했다. 관리자는 마나를, 초월자는 정체 모를 무언가를 사용한
다고.
두 연료에 비하면 마력은 뒤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억측이었다.
“중요하지. 격은 이를테면 주춧돌인 셈이다. 그 위를 쌓고 장식하는 게 무공이며 마법이고.”
“이전엔 격의 재현이 무공보다 우선이라고….”
“말을 귓등으로 들어 처먹었구나. 언제 우선이라 했느냐.”
백명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氣“주춧돌 위에는 돌과 어울리는 놈을 쌓아야 하지. 화기( )의 사용에 능해 초월자가 되었는데 난데없
이 빙공을 쓰겠다며 설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아, 이해했습니다.”
“저번에도 그 소리는 들었던 것 같다만… 뭐, 됐다.”
그러려니 넘긴 백명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정순한 백색의 뇌기가 맺혔다.
“오. 이게 뭡니까? 마법인가?”
“내가 마법을 쓸 것 같으냐. 단순한 내공이다.”
“이게요? 신기하네.”
“심법을 통해 변질시켰을 뿐이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느냐?”
유선우는 고민조차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개인차는 있을지라도 대개 비슷한 성질을 띠고는 했
다. 단언컨대 이 정도로 특이한 놈은 없었다.
“알면 알수록 네 고향이 궁금해지는군. 흔하진 않더라도 가능한 놈이 없지는 않을 터인데.”
“비슷한 거라면 저도 쓸 줄은 알지만요. 이렇게.”
유선우가 마나를 주위에 흩뿌렸다. 낯익은 기운에 백명이 낮은 숨을 흘렸다.
“간섭력인가. 그러고 보니 처음에도 썼었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묻지 말아 주세요. 사정이 좀.”
유선우가 멋쩍은 듯 대답을 회피했다. 남에게 대놓고 말해주기엔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흠, 그래. 차라리 잘 됐구나.”
“잘 됐다 하심은?”
“이대로 빙공을 익히면 되겠지. 간섭력과 내공은 성질이 다르기는 하나 상호작용을 기대할 수 있을 터.
문제는 가르칠 놈인데… 한번 알아보마.”
“그 뭐야. 격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을까요?”
“괜찮을 게다. 애초에 네 내공은 음기에 치우쳐져 있으니.”
“그렇습니까?”
엔라와는 기존부터 상성이 좋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제법 신기한 일이었다.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죽
도록 싫어했었으니까.
유선우의 오묘한 표정을 본 백명이 피식 웃었다.
“그래. 기센 여자한테 약할 상이야.”
“…짚이는 게 없진 않네요.”
“쯧. 연애란 휘둘리는 게 아니라 휘두르는 것이건만.”
“동자공 마스터한테 듣기 싫은데요.”
“실례되는 놈이로군. 배워보고 싶으냐?”
“하하. 전 이미 늦었습니다.”
썩 친밀한 사제였다.
***
유선우는 협곡에서 수련한 뒤에 거처로 돌아왔다. 협곡의 특성 탓에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함.
그렇다고 잠을 잘 필요는 없었기에 그는 토노토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좀 어때?”
“그냥저냥 똑같아요. 왜요?”
“내 차례는 언제 오나 싶어서. 아직도 어르신이랑만 놀잖아.”
“제가 허접해서 죄송합니다.”
유선우가 씁쓸하게 말했다. 사과에 되레 민망해진 토노토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내가 억지 부린 건데. 그리고 이렇게 얘기만 해도 좋아.”
“…굉장히 낯간지러운데요.”
유선우는 괜스레 멋쩍어져 볼을 긁적였다. 대낮부터 낯부끄러운 소리나 하고 자빠졌다. 낙원은 언제나
대낮이긴 하지만.
“응?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너만큼 정신 박힌 애가 별로 없으니까.”
변명도 거짓말도 아니었다. 토노토의 시선 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 증거였다.
“악기는 집에서 쳐라, 개 같은 년아!”
“실내에서 음공을 쓰라고요? 머리에 피가 아니라 똥물이 차셨나.”
“뭐, 뭐?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으니!”
“마르면 죽거든요, 멍청하긴.”
“죽은 지 5천 년은 더 됐다, 이 새끼야.”
개판이었다. 낙원에선 지겨울 정도로 흔한 풍경. 수십 번을 보다 보니 유선우도 이제는 익숙해져 있었다.
“근데 매번 싸우면서 죽는 사람이 없는 게 신기하네요.”
“죽이면 어르신한테 죽거든.”
“스승님이요?”
“응. 나도 몇 번 봤어. 왜 그러시는지는 얼마 전에 알았지만.”
전력의 보존을 위한 본보기였다. 언젠가 낙원에서 나가게 될 때를 대비한 전력. 탈출하면 신계와 충돌하
게 될 테니 초월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죽임으로써 전력을 유지한다는 건 모순적이긴 하나 불가피한 일이었다. 초월자들은 기본적으로 말을 안
들어먹기 때문이다.
“잘하셨네요. 안 그러셨으면 진작에 여기도 파벌이다 뭐다 지랄 났을 텐데.”
“파벌도 없지는 않았지. 어르신한테 대들던 놈들이 좀 있었는데, 처맞고 개심했어.”
“…살벌하시네. 역시 매가 약인가 봅니다.”
“그런 거야. 여기가 심심한 건 전적으로 어르신 탓…”
토노토가 마음에도 없는 불평을 토해내려던 때였다.
쿠우우웅!
하늘에서 큼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량이 무거운 물체가 벽을 때리는 듯한 소리였다.
난데없는 소란에 낙원이 정적으로 휩싸였다.
“뭐야. 무슨 일이에요?”
유선우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토노토도 의문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글쎄. 입구가 열리나 보네. 웬일이래?”
“입구면… 신입 온 거 아니에요? 제 후임 생깁니까?”
“설마. 그리 자주 나타날 리가 없지. 그리고 저긴 우리가 못 써.”
“그런 건 어떻게 아세요?”
“안내원이 저쪽으로 오거든. 폐기당할 때도 저쪽으로 끌려가고. 그래서 별짓 다 해봤는데 꿈쩍도 안 하더
라고.”
둘은 잡담을 나누며 뚫어지라 하늘을 올려봤다. 다른 초월자들의 시선 역시 그곳을 향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자그마한 인영이 나타났다.
“어라. 상태 안 좋나 본데요.”
인영은 구름을 뚫고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번지점프라도 하는 것처럼. 얼핏 봐도 멀쩡해 보이
지는 않았다.
“의식 없는 거 같은데. 아무도 안 도와주네요.”
“저런다고 안 죽어. 인간도 아니고.”
“하긴, 오지랖이죠.”
둘은 여전히 태평하게 낙하 장면을 주시했다.
이윽고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였다.
생김새를 확인한 유선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쟤 뭐야.”
“응?”
“자, 잠깐 갔다 올게요!”
헐레벌떡 몸을 일으킨 유선우가 땅을 박찼다. 보법까지 쓰며 달려간 그는 낙하 위치에서 양팔을 벌렸다.
그림자가 점차 선명해진다. 가녀린 몸이 큰 충격과 함께 품에 안겨들었다.
성공적으로 받아낸 유선우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잘못 본 게 아니었는지 그곳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
다.
“엔라?”
투명한 피부와 새하얀 머리카락.
성격에 맞지도 않게 기품 있는 인상까지.
아무리 봐도 엔라였다.
“…….”
불러 봐도 대답은 없었다. 예상대로 의식이 없는 모양이었다.
‘상태가 이상한데.’
유선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엔라를 살폈다. 굳게 닫힌 두 눈, 실 끊긴 인형처럼 처진 신체. 그뿐만 아니라
마나가 제멋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윽!”
뿜어진 한기가 유선우를 집어삼켰다. 몸의 표면이 얼기 시작하자 그는 황급히 손을 뗐다.
털썩.
놓친 몸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엔라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유선우는 널브러진 엔라를 보며 사색에 잠겼다. 반가움은 차츰 줄어들고 걱정만이 부풀어 갔다.
그때였다.
쿠우우웅!
하늘을 두드리는 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요란한 노크에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도합 13명의 무리
였다.
그들은 엔라와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정신은 멀쩡해 보였고, 스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들이 뿜어대는 흉흉한 살기였다.
“비켜, 쓰레기!”
“죄인에게서 떨어져라!”
고함을 지르며 낙하한 그들은 엔라의 조금 위에서 정지했다. 몇몇은 유선우를 경계했고, 몇몇은 엔라에
게 손을 뻗으려 했다.
“죄인? 얘가?”
유선우는 의아하게 말하면서도 엔라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방해가 들어오자 놈들의 낯이 단박에 구
겨졌다.
짤랑!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꺼지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텐데.”
젊은 청년 하나가 석장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다.
“자기가 와놓고 꺼지라니, 별 개떡 같은 놈이 다 있네.”
“닥쳐! 귀가 더러워지….”
화르륵!
난데없이 몰아친 불길이 청년의 말을 끊었다. 청년은 짜증스럽게 석장을 휘둘러 불꽃을 걷어냈다.
공방이 오가자 놈들이 흘리는 살기가 급격히 짙어졌다. 단순한 위협 공격이었지만 적대로 받아들이기엔
충분했다.
“공무 수행 중이다. 방해하지 마라, 천한 것들!”
“누구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입 다물고 돌아가든가, 대가리 박고 뒈지든가.”
어느새 다가온 토노토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남의 땅에 들어와 쌍소리를 하는 것들이다. 차릴 예의 따위
는 없었다.
“쓰레기가…!”
“온 김에 청소도 해야겠어.”
“좋지. 다섯만 잡아두자.”
하지만 엄포는 먹혀들지 않았다. 놈들은 오히려 화가 뻗쳤는지 토노토와 유선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봉변이래.”
산개하는 놈들을 바라보며 토노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하다기보다는 귀찮다는 기색이었다. 시원찮
은 반응에 유선우가 소곤거렸다.
“이거 망한 거 아니에요?”
“응? 음. 아마 그럴걸.”
“근데 뭔 여유야, 대체.”
명백한 수적 열세. 토노토 본인도 위험을 인정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태평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유선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토노토의 입술이 벌어졌다.
“쟤들이 망했다고.”
“네?”
“말했잖아. 돌아가든가 대가리 박고 뒈지든가. 돌아가려면 늦었으니까 뒈져야지.”
“그냥 한 소리 아니었어요?”
“난 거짓말은 해도 허풍은 안 쳐. 슬슬 오실 텐데.”
토노토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이 끝맺어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변화가 일어났다.
쿠르르릉!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강렬한 백광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선우의 시야에는 백명의 널찍
한 등이 들어와 있었다.
“잡놈들이 기어들어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