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명
유선우는 백명의 지도에 착실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일취월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성장세가
가파르다는 것은 확실했다.
파앗!
백명의 발이 민첩하게 움직여 눈을 현혹했다. 그의 보법은 지면을 밟는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땅을 누비
고 허공을 박차는, 날카로우며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눈을 번뜩인 백명이 바람을 두른 창을 내질렀다. 그것은 유선우의 창술과는 확연히 달랐다.
공기마저도 창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다.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거리를 무시하는 기술이었다.
백명의 창끝과 유선우의 몸 사이에는 열 보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 닿을 리가 없음에도 유선우는 창대를
곧추세워 방어했다.
타악!
창이 창에 가로막히며 경쾌한 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진다. 명백한 타격음이었다.
유선우는 제가 막았음에도 백명의 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니, 보기는 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말도 안 되는데.’
공간이 접힌 듯한 현상도, 공기의 저항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것도. 유선우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
다.
접하면 접할수록 허구 속에서 허우적대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벌써 벽에 가로막혔느냐면, 답은 단연코
부정이었다.
‘보법은 이렇게 하는 건가?’
유선우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았다. 한 번 물러선 뒤에, 다시 허공을 박차며 날아가듯이 달려든다. 그
것은 어설프지만 백명의 보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거리를 좁힌 유선우가 백명의 복부를 노렸다. 그의 팔은 두 뼘이 채 뻗어지기도 전에 창대에 가로막혔다.
백명이 궤적을 예측해 흐름을 끊은 것이었다.
“안일하다. 왜 지금 휘둘렀지?”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같았습니다, 가 아니다. 더 생각해. 네 행동 하나하나에 타당한 이유를 달아라.”
“감각으로 움직이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반응이 빠른 몸을 두고 뭣 하러 불확실한 것을 믿느냐.”
백명의 일침에 유선우가 감탄에 찬 숨을 흘렸다. 본능적인 동작은 불확실하다. 정확한 말이었다.
감각은 속임수에 취약하다. 토노토와의 대련에서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버릇을 전부 뜯어고쳐야 한다.’
유선우는 조용하게 의욕에 타올랐다. 그의 눈빛을 본 백명이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군.’
오랜만에 생긴 제자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상한 놈이었다. 가르치면 뭐든지 받아들이는, 흰색의 도화
지 같은 놈.
사람이란 본디 남의 가르침을 똑바로 들어먹지 않기 마련이다. 살아오면서 구성된 가치관에 따라 제멋대
로 곡해한다. 입맛에 맞는 것은 취하고, 아니면 버리거나 뜯어고치고.
특히나 무인은 이러한 경향이 짙다. 무공서의 지식이라면 편견 없이 받아들이지만, 남의 말이라면 다르
다.
하지만 유선우에겐 그런 고집이 보이지 않았다.
‘줏대가 없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보기에 유선우는 그리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말하는 본새만 봐도 뻔하지.
‘잘은 모르겠다만. 어쨌든 축복이군.’
백명은 유선우의 창을 받아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축복이다.
하나를 말하면 놓치지 않고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고방식도. 열을 보여주면 다섯을 습득하는 재능도.
“참 미친놈이야.”
“…왜 갑자기 시비 거세요?”
“음? 아, 말이 헛나왔다.”
“헛나오기는. 무심코 나왔겠죠. 저를 그렇게 보고 계셨구나. 실망입니다.”
빠악!
“억!”
매섭게 휘둘러진 창대가 유선우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아무리 훌륭한 제자라도 설치면 맞는 건 당연하
다.
“하하. 이 싸가지만 고치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말이다.”
“어으…. 이건 지도가 아니잖습니까.”
“인성을 가르치는 게다. 무술은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긴 하나, 쓰는 사람에
따라 쓰임새가 천차만별로 바뀌는 것이야.”
개소리가 길다. 바닥에 주저앉은 유선우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리 인성이 잘나셨는데 왜 무술을 제자 패는 데다가 쓰시는지.”
“아쉽게도 내 인성은 쓰레기다. 그러니 너라도 훌륭해져야 하지 않겠느냐.”
“역시 그랬습니까.”
실패한 꿈을 자식에게 떠맡기는 부모 꼴이다. 참으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잡설은 됐으니 일어나기나 해라. 아프지도 않지 않으냐.”
“예. 엄살 좀 부려봤습니다.”
유선우가 히죽거리며 긍정했다. 백명의 말대로 아픔은 가신 지 오래였다. 때리는 기술이 좋은 건지, 정신
체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통증이 잔류하지는 않았다.
‘맞을 땐 더럽게 아프지만.’
혼을 몽둥이로 맞는 감각이라고 할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유선우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백명을 향해 창을 겨눴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
유선우는 시간의 경과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수련에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겐 퍽 즐거운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지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피로가 쌓이는 환경 때문. 협곡에서 제법
긴 시간을 보냈기에 유선우는 눈에 띄게 지친 상태였다.
“하아, 하아. 이거 은근히 부담되네요.”
“네가 강해지면 부담은 줄어들 게다.”
“그럼 더 안으로 들어갈 테니 똑같겠죠. 익숙해져야 하는데.”
유선우가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몸이 편해지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실타래처럼 엉
켜갔다.
그중 가장 큰 걱정은 자신의 부족함. 배운 것은 많았지만, 그럴수록 배울 것도 많아졌다.
까마득한 앞길에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걸으며 볼 풍경 하나하나가 기대되기까지 했다.
문제는 단 하나, 시간이었다.
“스승님 덕에 시간은 벌었지만… 솔직히 모르겠어요. 한 오백 년 지나도 스승님은 못 이길 거 같고.”
“내 나이가 몇인지 알고. 목표부터가 한참 잘못됐구나.”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센 게 스승님일 건데요. 뭐, 목표는 크게 잡는 거죠.”
“나쁠 건 없다만 글쎄. 좋을 것도 없어 보이는군.”
금칠하는 말에도 백명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재수 없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실력의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조급하게 굴어봐야 구를 뿐이다. 바삐 움직이되 여유를 가져라.”
“그게 생각처럼 안 되네요.”
“구르고 싶다면 내가 말릴 수는 없겠지. 그래도 비웃는 정도는 해주마. 내 꽤 일가견이 있으니.”
“배배 꼬여 가지곤…….”
유선우는 질렸다는 양 말하면서도 내심 고마웠다. 이제는 이런 태도가 백명 나름의 상냥함임을 알았다.
‘반쯤은 진심이겠지만.’
작게 피식거린 유선우가 화제를 돌렸다. 배울 땐 조용히 있었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초식 같은 건 안 알려주십니까?”
逆天極槍“방금까지 보지 않았느냐. 역천극창 은 초식이 없는 무형의 창술이니라.”
“…역, 뭐요? 와, 쪽팔려.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네.”
“너는 시도 때도 없이 농을….”
타박하려던 백명이 말을 흐렸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제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똥 씹은 표정을 보니 백명마저도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보, 본래 무공 이름 따위는 다 거기서 거기인 게야. 이 정도면 양반이다.”
“아무래도 전 항마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쯧. 널 데려가려 했던 만현이란 놈이 쓰는 게 뭔지는 아느냐? 파천봉법이다, 파천봉법!”
“제발 그만해주세요. 더 듣기 싫습니다.”
유선우가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다고 안 들리는 건 아니지만 더 없는 의사 표현이었다. 백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말이다. 너만이 다른 게 아니라 초식에 얽매이는 변변찮은 초월자는 없어.”
“그렇습니까?”
“뭐, 생전에 익혔던 무공에 발목을 잡히는 놈은 있다만.”
“초식에 얽매이지는 않는데 무공에 발목이 잡힌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아, 혹시 심법 그런 건가
요?”
쓰레기 심법을 수련한 탓에 쓸만한 놈으로 갈아타지 못하는 경우. 무협지에서 종종 나오는 상황이다. 하
지만 유선우의 말은 반만 정답이었다.
“심법의 문제이기도 하나 더 큰 문제는 격의 활용이지.”
“격입니까. 이번에도 말하다 마시면 손절각 재겠… 아, 아닙니다.”
유선우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해 막말을 뱉어버렸다. 하지만 떠올려 보면 말
랑은 아싸라는 말도 곧잘 알아들었었다.
제멋대로 번역이 된다나 뭐라나.
그렇다면 손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입조심 하자.’
죽도록 맞을 뻔한 유선우는 속을 쓸어내렸다. 그의 난데없는 표정 변화에 백명의 시선이 짜게 식었다.
‘역시 미친놈이군.’
제자의 정신 상태가 양호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런 부분만큼은 다른 초월자랑 똑같았다.
내심 혀를 찬 백명이 설명을 재개했다.
“격은 생전의 업적이다. 그러니 업적을 뚜렷하게 재현할수록 외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해지지.”
“그거랑 무공이 무슨 상관인지….”
“업적은 익힌 무공을 통해 쌓은 것이 아니더냐. 마법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 네가 창이 아니라 검을 쥔
다면 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유선우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어렴풋이 알 거 같습니다. 무공이 허접해도 격 때문에 뿌리를 바꿀 수 없다는 거네요.”
“그래. 그런 면에서 넌 꽤 특이하지. 단순한 기본기가 네 바탕이니.”
“어라. 그럼 되게 불리한 거 아니에요?”
걱정 어린 목소리에 백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뿌리가 바뀔 만큼 특색 짙은 무공을 배우지 않으면 될 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돌아가자꾸나. 여기선 편히 쉬지도 못하니.”
백명의 말이 끝나자 창 두 자루가 빛무리로 돌아가 흩어졌다. 백명이 그대로 협곡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됩니까?”
“음?”
“스승님의 무공은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들어서 재밌는 건 아니긴 하나… 흠. 상관없겠지.”
백명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동자공이다.”
***
박아연은 눈꺼풀을 때리는 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알을 굴려보니 쨍쨍한 햇살이 비좁은 방을 비추고 있
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었다.
“아…….”
그녀는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흐느적거렸다. 괴로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는 자신이 장했다.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다시 잠들지 않는다니. 3달 전의 자신에게 이 성장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 3달.
유선우가 눈을 감은지 벌써 3달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