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명
“…구속? 나를?”
마른하늘에 날벼락. 난데없는 소식에 엔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했다.
하지만 거인의 대답은 변치 않았다.
“그렇다. 시국을 어지럽힌 죄로 신계에서 처벌이 결정되었다. 불응할 시 강제로 연행할 테니 경거망동하
지 말도록.”
“잠깐만요. 연행?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브나바가 뾰족한 목소리로 캐물었다. 질문보단 추궁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설명을 듣지 못했나?”
“아니요, 똑똑히 들었어요.”
시국을 어지럽힌 죄라고 했던가. 애매하기 짝이 없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엔라의 삽질로 인해 위험에 노
출된 하위 차원이 부지기수니까.
어디 그뿐이랴.
실제로 망한 차원마저 몇이나 있다.
설상가상으로 관리자들이 복수심에 불타 지구를 노리고 있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신계의 결정도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아브나바는 의문을 느꼈다.
“의도를 모르겠어요. 해결책도 못 낼망정 유예 기간도 없이 즉시 구속이라니. 더 개판이 될 뿐이잖아요.
혹시 다른 관리자가 파견되나요? 그렇다면 전임자한테 들을 얘기가 있을 텐데.”
“그에 대해서는 나도 듣고 싶구나.”
고심에 잠겨 있던 엔라가 한마디를 보탰다. 거인은 한동안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벌 외에 다른 결정은 듣지 못했다.”
“……지구를 아예 버릴 생각인가요?”
아브나바의 낯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물음에 거인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판단은 내 몫도, 네 몫도 아니다. 지시를 따를 뿐이지. 그분들의 의도를 파악하려 들지 마라. 그러라고 우
리를 낳지 아니하셨으니.”
“아니요. 저는 관리자예요. 차원에 문제의 발생이 확실시된다면 나서는 게 제 일이고, 제가 받은 지시예
요.”
“지구가 어찌 되든 네 차원과는 관계가 없을 텐데.”
“그건…….”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뜻. 아브나바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맡은 차원이라면 잘 굴러가고 있지만,
그녀가 지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은 타당했다.
“말은 그만하지. 엔라, 따라와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위에 연락을…!”
“아니, 되었다.”
엔라가 아브나바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자못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조금 전의 시무룩하던 모습은 온
데간데없었다.
“내 발로 가마. 목적지 정도는 알려다오.”
“…명계로 이송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가. 시간은 받을 수 있나?”
“불가하다. 유예 기간은 전달받지 않았다.”
거절당했음에도 엔라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받았다, 받지 않았다, 듣지 못했다. 말투부터 하나하나 딱딱하구나. 융통성이 없어. 내가 아는 놈 하나를
소개해주고 싶을 지경이야.”
태연자약한 태도에 아브나바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 나가셨어요? 갇히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아요.”
명계에 갇힌 관리자의 말로는 처참하다. 유폐된 후, 예고 없이 임의로 찾아오는 신계의 구성원에게 권능
을 회수당한다.
그렇게 껍질만 남은 관리자를 기다리는 것은 기약 없는 옥살이. 이후로 수천 혹은 수만 년이 지나면 폐기
처분을 당하고 만다.
신들에게 관리자는 결국 그러한 것이다.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톱니바퀴.
엔라도 부품인 건 다를 바가 없었다.
분명 본인도 알 터인데 어떻게 웃음이 나오는지. 아브나바로서는 불가해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을 터였다.
“아브나바. 내가 없는 동안 나 대신 일이나 잘 해주거라.”
그러나 엔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했다.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대체 어쩌시려는….”
아브나바는 엔라의 속내를 물으려다가 말을 멈췄다. 입을 다문 그녀의 시선은 거인에게 옮겨갔다.
거인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관심이 없어 보였으나 귀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은 네가 해야 할 것이니라. 지구를 관리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 골머리 좀 앓겠지.”
웃을 수만은 없는 농담이다. 엔라가 거인에게 다가갔다.
“가자꾸나.”
***
“죽는 줄 알았다….”
바닥에 대자로 누운 유선우가 우는 소리를 냈다.
과장 없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심정이 빌어먹을 스승에겐 전해지지 않았다.
“달린 건 난데 왜 네가 힘들어하지? 이상한 일이로고.”
“제가 약골이라 그럽니다. 제가 나쁩니다.”
옳은 소리였다. 자신이 강했다면 이 고생을 겪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안긴 채로 짐짝처럼 옮겨지지도
않았겠지.
말투가 삐딱해진 것은 순전히 감정의 문제였다. 10분이 넘도록 소리 없는 절규를 반복했으니. 한두 마디
툴툴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거라.”
“예이.”
까라면 까야지. 유선우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들어온 풍경은 색다른 것이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험준한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낙원의 광활
하던 평지에도 끝은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굉장히 멀리 온 거 같은데.”
정신 나간 속도로 10여 분간 질주해 도착한 장소. 달려온 거리가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길은 어떻게 외우고 다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백 년쯤 헤매다 보면 길가의 풀만 봐도 구분은 되는 법이지. 이곳의 풀은 건드리지 않으면 자라지도 않
으니 말이다.”
“잡지식 감사합니다. 근데 굳이 여기로 온 이유가 뭐예요? 혹시 수련하기에 좋은 데인가. 그렇다기엔 특
별한 건 없어 보이네요.”
첫인상만 보면 오히려 마이너스. 앞으로도 종종 드나들 생각을 하면 평원이 훨씬 나았다.
“우선 따라와라.”
백명은 의문을 해소해주지도 않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여간 말이 부족한 사람이다. 한숨을 내쉰 유선우가 백명의 뒤를 따랐다.
백명은 한동안 느릿한 발걸음을 유지했다. 협곡으로 이동할 때와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유선우는 그에
작은 의문을 품었다.
‘급하게 굴 때는 언제고.’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넘쳐 보인다.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 걷는 모습이 마치 선인과도 같았다.
‘경치라도 구경하나.’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협곡 내부의 풍경은 볼만했으니까.
‘신기하네.’
협곡에는 녹색의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쓸쓸한 경관이 신비한 인상으로 변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색은 선명해졌고, 신비감도 짙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유선우도 넋 놓고 걷게 되었다. 그리고 20분가량의 시간이 흘러 백명이 발을 멈췄다.
“흠. 오늘은 이쯤에서 멈출까.”
“예? 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수련을 멈추겠다는 말이 아니다. 뭐하러 여기로 왔냐고 물었었지.”
“그걸 이제 대답해주십니까….”
유선우가 질렸다는 기색으로 탄식했다. 백명이 피식거리며 웃다가 대뜸 물었다.
“기분은 괜찮으냐. 몸이 조금 무거울 터인데.”
“몸이요? 몇 분 걸었다고…… 어라.”
의식하고 나자 유선우는 거동이 불편해졌음을 깨달았다. 눈치채기 힘든 극히 미세한 차이. 단순히 컨디
션의 난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정도가 딱 적당한 부담이다. 설명하자면 여긴, 그래. 낙원의 틈새라고 할 수 있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바깥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이 지점이라면 3대 1 수준이겠군. 정확하진 않다만.”
설명 자체는 간단했다. 이 장소에서 3년을 보내면 바깥에선 1년이 흐른다는 뜻. 하지만 유선우는 쉬이 받
아들이지 못했다.
“…허. 그런 게 가능합니까?”
“신계에서 직접 손을 쓴 결과지.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진 실패작이지만 말이다.”
백명이 어쨌든, 하며 말을 돌렸다.
“인간은 괴리감을 견디지 못할 테지만, 우리는 아니다. 조금 부담이 느껴질 뿐이야.”
“이해했습니다. 더 들어가면 배율도 달라지는 거겠네요.”
“옳다.”
백명이 긍정하자 유선우는 탄성을 흘렸다. 협곡에 대해 듣고 나니 백명의 발언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자기 시간이랑 내 시간은 다르다더니.’
그냥 자뻑이라 생각했었는데. 뜻밖으로 말 그대로의 의미였던 모양이다.
덕분에 여태까지의 불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런 장소는 혼자선 절대로 찾지 못했을 테니까. 데려와
준 백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천세 천세 천천세입니다.”
“음?”
“아닙니다. 근데 여긴 왜 사람이 없습니까? 듣기로는 수련하기에 제격인 거 같은데. 무인이라면 더더욱
탐내는 게 맞지 않나요?”
“아까 말했다시피 아는 이가 많지는 않다. 알아봤자 올 이유도 없지. 천년만년 사는 우리가 뭣 하러 시간
을 아까워하겠느냐.”
“아, 그것도 그렇네요.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유선우가 위화감이 드는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전신에 달린 주머니에 실시간으로 모래가 채워지는 기분
이라고 할까. 익숙해지기는 힘들 듯했다.
“궁금증은 다 풀렸나 보군. 자, 받아라.”
백명이 주민의 권한으로 창 두 자루를 만들어 유선우에게 하나를 던져줬다. 외딴곳이라 해도 이 정도의
권한은 유효했다.
가볍게 잡아챈 유선우를 보며 백명이 히죽 웃었다.
“본격적으로 때려 박아주마.”
괜스레 불안해지는 말투였다.
***
“하아. 어디로 갔대.”
토노토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백명의 무관을 뒤로했다. 기껏 찾아왔건만 무관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시끄러워. 또 처맞고 싶어?”
“누가 할 소리를.”
토노토와 한 사내가 아이처럼 말싸움을 벌였다. 사내는 유선우를 두고 삽질을 하던 초월자 중 하나, 만현
이었다.
“하, 됐다. 귀찮아. 근데 넌 왜 왔어?”
“아무래도 궁금해서 말이지. 너나 어르신이나 환장을 하니.”
“건드릴 생각하지 마. 죽여버릴 거야.”
토노토가 사나운 음성으로 위협했다. 만현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네가? 할 수는 있고?”
“아니, 어르신이. 그 사람 제자를 탐내다니, 목숨 아까운 줄 알아야지.”
토노토는 자기가 한 짓도 잊어먹고 백명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건 좀 무섭군.”
협박은 잘만 먹혔다. 칼 들고 쫓아오는 백명을 상상한 만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잘못 걸리면 평생 잠들
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근데 실제로는 어떠셔?”
“질문은 사람이 알아듣게 해라.”
“너도 어르신한테 배웠었잖아. 뭐, 허접하다고 쫓겨났지만.”
토노토가 킬킬거리며 조롱했다. 그러자 만현이 답지도 않게 흥분해 외쳤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는 거냐! 단순히 잘 안 맞아서 갈라섰을 뿐이다!”
“응. 맞아.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뭘.”
“뭐, 뭘 들어?”
“뭐라고 하셨더라. 현이는 다 좋은데 그냥 재능이 딸려서…….”
“닥쳐라, 닥쳐!”
만현은 씩씩거리며 토노토를 노려봤다. 사람에겐 건드려서는 안 될 화제가 하나씩은 있기 마련인데. 도
대체 이 년은 머리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매번 시비를 걸어온다.
“됐으니까 말해봐. 어떠시냐니까.”
그래놓고는 이딴 식으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기까지. 아무리 긴 세월을 어울려도 호감을 품을 수 없는
여자다.
“…넌 항상 제멋대로군.”
“제멋대로면 뭐 어때. 대답이나 하지?”
한숨을 토해낸 만현은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어르신이라, 흠.”
만현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앉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분이시지.”
신입이 불쌍해질 뿐이었다.
***
만현의 연민은 한마디로 괜한 걱정이었다.
그와 유선우는 가진 재능부터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