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명
유선우가 백명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그것에 사명감 따위는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내가 손해 볼 게 없어.’
본래부터 무력 향상의 발판은 필요했다.
때마침 필요할 때 제 발로 코인이 굴러온 셈.
타지 않으면 호구다.
‘그래. 본인이 가르쳐준다는데 배워야지.’
실력 면에서도 더할 나위가 없다. 백명의 힘을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초월자들의 반응이 둘도 없는 근
거가 되었다. 한주의 보증도 있었고.
걱정이 있다면 명선수가 무조건 명감독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 다만 그건 큰 문제도 아니었다. 만약 강의
가 시원찮다면 그때 가서 손절하면 되니까.
그리고 유선우도 마냥 등쳐먹을 생각뿐인 것은 아니었다. 받은 만큼은 확실히 일할 셈이었다.
문제는 예상보다 난이도가 높아 수지타산이 안 맞을 경우.
그때는 뭐, 어쩔 수 없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내 탓은 아니잖아?’
쓰레기라고 매도당해도 상관없다.
욕을 먹더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한 것.
자신의 생명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지금도 애써주고 있을 아이릴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도 생각이 있겠지.’
백명의 발언으로 추측해보면 오래간 계획해온 일인 듯했다. 그러니 믿는 구석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돌연히 찾아온 기회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수도 있겠지만 알 바 아니다. 애도만 표해줄 뿐.
‘이 정도면 첫인상 망친 건 봐줄 만해.’
유선우는 평온해진 정신으로 구배지례를 끝마쳤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자 백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하. 술잔이 필요하겠어.”
백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
백명과 유선우는 동상이몽을 품고 사제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수련의 시간만큼은 달랐다.
백명은 성의껏 가르치고자 했고, 유선우도 성실하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네 실력은 이미 보아 충분히 알고 있다.”
“아, 그러셨군요.”
둘은 외부와 단절된 도장에 선 채 서로를 바라봤다. 뒷짐을 진 백명이 근엄한 낯으로 물었다.
“그런데 자세가 딱딱해 보이는군. 무슨 일이지?”
“역시 아시나 봅니다.”
유선우는 감탄하면서도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정식으로 배우는 게 처음이라서요. 좀 어색하네요.”
“흠. 아까 말했던 게 사실이었나.”
“네. 용병들한테 배웠을 땐 되게 가벼운 분위기였었거든요.”
이거 해봐라, 성공하면 술을 사주겠다. 그런 식이었기에 스승이라기보단 친구와도 같은 관계였다. 당시
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그러한가.”
감정이 전염된 듯 백명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가 유선우의 허벅지를 후려갈겼다.
뻐억!
“악!”
“아주 재밌었겠어. 그딴 실력으로 말이다.”
“뭐, 뭐라 하셨습니까?”
“그딴 실력이라 했다. 왜, 자존심 상하느냐?”
유선우는 어금니만 꽉 깨물었다. 할 말은 있어도 말대꾸가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은 알았다.
‘이거 내가 하던 짓인데.’
이건 유선우의 교육법과 똑 닮아 있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대답이 무엇인지 눈에 훤했다.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것. 즉 예고 없이 쏘아지는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선우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시인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입을 여는 건 그저 어리광이었다.
유선우의 예상이 정답이었는지 백명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다행히 정신머리는 박혀 있는 모양이구나. 어지간해선 다섯 대는 더 맞아야 입을 다무는데 말이다.”
“초월자들이 말입니까?”
“그래. 한 가닥 하는 놈일수록 끓는점이 낮은 건 당연한 게지. 널 비하하는 말은 아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을 버리는 게 배움의 기본이니.”
백명이 하여튼,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그의 눈이 번득거렸다.
“네 창술이 짐승에게는 통했겠다만, 사실 무인으로서의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 내공이 많고 기본
이 훌륭하기만 한 쓰레기지. 즉 반푼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유선우는 화를 억누르고 긍정했다. 토를 달았다간 처맞을 게 뻔했으니까. 무엇보다 백명의 지적은 본인
도 인정하는 바였다.
‘내공이 마력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정확한 지적이었다. 유선우는 아까까지만 해도 마력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고민은 더욱 깊어진 상태였다.
‘대단했지.’
가까이에서 본 초월자들의 전투는 퍽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리저리 휘둘렸던 게 열 받기는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마력, 그러니까 내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군요. 토노토 씨들이 쓰던 게 뭔지 궁금합니다.”
“틀렸다. 쓰는 방법을 달리할 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 이건 미뤄두마.”
왜 말을 하다 말아.
경청하던 유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스승님. 사람을 제일 화나게 하는 방법 두 가지가 뭔지 아십니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어디 말해봐라.”
“한 가지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유선우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뭐요, 하는 표정으로 백명을 쳐다봤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뒤늦게 알아들은 백명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개소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머리 박겠습니다.”
유선우는 적당히 설치고 우선 찌그러졌다. 뒷말이 궁금하긴 해도 백명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가르침을 아끼는 눈치였다면 바로 손절각을 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뭐부터 해야 합니까?”
“창술과 보법이다. 넌 병사로서는 훌륭하더라도 무인으로서 싸우는 법은 몰라. 기본기만 제대로 익혀도
반은 간다고 하나, 이미 반은 넘어오지 않았더냐. 네가 목표로 삼아야 할 건 전체다.”
“응용이라는 말씀이시네요. 이해했습니다. 짚이는 구석도 있고요.”
“짚이는 것이라.”
“전 찌르고 벨 줄밖에 몰라서요. 변화가 필요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면 왜 고치지 않았느냐.”
“뭣도 모르는데 어떻게 고치고 말고 하겠습니까?”
지식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무술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선 이론의 이해가 필요불가결.
무지한 채로 창술을 만들겠답시고 설칠 수는 없었다. 연구할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그 어떠한 일도 대성하려면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남의 고생으로 편하게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할 시행착오는 다른 데 있겠죠.”
“뻔뻔하구나.”
“사람은 뻔뻔해야 대성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안 되는 것을 붙잡았다가 결과물이 어설프다면 역효과만
나올 거고, 결국은 겉멋충이 됐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제 지인 중에도 몇 있고요.”
다분히 공격적인 말. 유선우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구태여 속내를 가감 없이 전했다. 서로의 성향을 파악
하는 게 중요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무인의 대다수를 머저리 취급하는 말이군.”
“전 사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인은 잘 모릅니다. 병사나 기사밖에 모르죠. 그래도 제 머릿속 인상과
같다면 삽질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꼭 저가 특별하다고 여기는 치들이 있더랍니다. 자기만의 검술을 만들겠다, 마법을 만들겠다…….”
말을 흐린 유선우가 피식거리며 조소했다.
“병신들 아닙니까? 왜 기본도 못 하면서 남들이 닦아준 길을 멀리합니까?”
“대성한 이들은 특별한 걸 가지고 있으니까. 꿈을 품는 건 당연하다.”
“그 사람들은 다 평범한 무술도 할 줄 압니다.”
백명은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고심하다가 환한 미소를 보였다.
“네 말이 옳다. 대다수는 머저리에 천치, 병신이지. 재능이 아니라 사고방식이 문제인 게다. 고수들을 보
며 그들의 노력은 쥐뿔도 생각지 않아.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이 지랄뿐이다. 끈기 대신 영감을 찾
는 것이야.”
“……크흠. 사실 그렇게까진 생각 안 하는데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되었다. 다행히도 너는 그에 포함되지 않아. 아까 말했다시피 기본만큼은 누구보
다 탄탄하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다.”
“어… 감사합니다?”
일갈이 아니라 칭찬이 돌아왔다. 유선우는 백명도 머리가 약간 돌았다고 판단했다.
“어떤 창술을 가르쳐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게야. 문제는 너보다는 창술 쪽이구나.”
“예?”
“기억하고 있는 건 많다만 쓸 만한 게 몇 없다. 그마저도 조금씩 하자가 있어.”
“그럼 어떡합니까?”
난처해져 묻자 백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게 딱 맞는 놈으로 만들어주마. 보법도 마찬가지로.”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만… 오래 걸리지 않나요?”
“음? 그야 나름대로 걸리긴 하겠지. 그만큼 완성도는 뛰어날 게다.”
“제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서요. 들으셨으니 아시겠지만요.”
백명이 손수 만들어준다면 터무니없는 결과물이 나올 터. 기대는 되지만 몇 년씩이나 기다릴 여유는 없었
다.
하지만 백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해봤자 반나절이니 그 정도는 참아라.”
“에이, 그건 좀 허풍 같은데요.”
“내 반나절과 네 반나절이 같은 줄 아느냐. 다만, 실전에서 먹힐 정도로 익히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터
인데…….”
“수십 년이라니요. 아직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유선우는 본인의 재능을 믿었다. 그건 자만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을 의심해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을 테니까.
“물론 앞으로 봐야 견적이 나오겠지만, 재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금 네 나이가 몇이더냐.”
“스물셋… 아니, 이제 스물넷이 됐습니다.”
지랄 맞게도 1월 1일을 기일로 삼을 뻔했다.
“호오. 생각보다도 어리구나. 좋은 일이다.”
“제가 그리도 노안입니까?”
“내가 몇 살로 보이느냐?”
“실언했습니다.”
“알면 되었다. 초월자의 외견은 생전의 전성기에 머무른다. 애초에 경지에 이른 무인에겐 외견은 중요치
않다마는. 하여튼 넌 최소 15년은 창을 휘둘러 왔을 테지. 그보다는 한참 오래 걸릴 게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실력을 일견하면 경력 정도는 짐작이 가는바. 백명이 보기에 유선우는 창과
함께 살아온 무인이었다.
‘그렇다 쳐도 스물넷이라. 귀신같은 재능이군.’
불세출의 천재가 판치는 낙원에도 이만한 인재는 없었다. 그 재능을 자신의 손으로 꽃피울 수 있다니. 아
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키울 맛이 났다.
하지만 백명의 예상은 크게 어긋났다.
다행히도 좋은 방향으로.
“15년까진 아니고요. 6년 조금 안 됐어요. 와, 생각해보니 수저랑 펜 다음으로 오래 잡았네. 신기하다.”
“……뭐라고?”
“저 사실 되게 금방 질리는 성격이거든요. 뭐 하나를 길게 해본 적이 없어요.”
“그, 그게 아니라. 경력 말이다. 몇 살부터 무술을 시작했느냐?”
“18살이요. 무술이라 할 것도 못 됐었죠. 무기 안 든 병사한테도 발렸었으니까.”
백명의 진중하던 태도가 산산이 조각났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로서도 이해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게 무슨 미친놈이지?’
***
지도는 곧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원인은 순전히 백명의 변덕 탓이었다.
그는 반나절이라는 말을 철회하곤 사흘의 대기를 지시했다. 지고의 창술을 만들어주겠다는 한마디를 남
기고서는.
그런 이유로 유선우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지루한 사흘이 지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백명이 찾아왔다.
“오랜만이구나.”
“네? 3일이 별로 오랜만은 아니죠.”
“말하지 않았느냐. 내 시간과 네 시간이 같지는 않다고.”
“아, 예.”
만나자마자 지 자랑이다.
대충 받아넘긴 유선우는 백명의 모습을 살폈다. 별 변화는 없었지만 조금 수척한 기색이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피로가 쌓였을 뿐이다. 백 일간 쉬지도 않고 움직였으니.”
“뭐라는 거야. 진짜로 노망나셨….”
“입 다물고 꽉 잡거라.”
말을 자른 백명이 유선우를 번쩍 안아 들었다. 동작이 전광석화처럼 재빨라 저항할 틈도 없었다.
“제발 이것 좀 안 하시면 안 됩니까? 저도 발 있어요!”
졸지에 아저씨에게 안긴 유선우가 질색했다. 이 끔찍한 경험도 벌써 두 번째였다.
“나도 안다. 느린 발이지.”
“아니, 무관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제법 먼 곳에 있긴 해도 달리면 금방이다. 사흘을 날려놓고 무슨 10분을 아끼겠다고 이러는지.
하지만 백명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느냐. 무관보다는 훨씬 먼 곳으로 갈 셈이다.”
“어디로요?”
“낙원의 심층이다. 수련하기에 제격인 곳이지.”
잡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제 할 말만 마친 백명이 허공을 박찼다.
그리고 유선우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속도가 문제였다. 눈앞을 분간하기도 힘든 정신 나간 속도가.
‘사, 살려줘……!’
***
“소득은 있었나요?”
가구라곤 탁자와 의자뿐인, 사방이 새하얀 공간.
그 기괴하고 삭막한 장소에 관능적인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
말을 받을 사람은 있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말은 이따금 놓치기도 하는 것이었다.
“선배님, 안 들리세요?”
“어, 응? 아, 왔구나. 미안해.”
그제야 방문자를 알아차린 엔라가 면목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어색한 표정이 아브나바의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아직 못 찾으셨나 보네요.”
요즘 들어 두 관리자는 주어를 빼먹고 대화하는 일이 잦았다. 한 명의 화제만을 입에 올렸기에 그러는 편
이 훨씬 좋았다.
수고 면에서도, 감정 면에서도.
하지만 그렇게 대화를 쌓아도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유선우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빠져나간
혼의 행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짐작 가는 데는….”
“또 낙원이겠죠.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아시나요?”
“거기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해.”
“저도 마찬가지긴 한데. 저희가 따로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응. 그렇지.”
유선우의 혼이 향했으리라 예상되는 장소, 초월자의 낙원. 그곳은 일개 관리자가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정보를 얻는 방법은 신계에 요청하는 것뿐.
“답장은 아직인가요?”
“너도 알잖아.”
어느 사회에서나 윗대가리는 반응이 굼뜬 법이다. 혹은 느린 척을 하거나.
“그럼 명계 쪽은요?”
“일손이 부족해서 시간 더 걸릴 거래.”
“참나. 명계가 일손이 부족해요?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겠지.”
하여간 개 같은 놈들. 험악하게 낯을 구긴 아브나바가 쌍소리를 중얼거렸다.
전 차원에서 혼이 모이는 명계는 의외로 한가한 장소다. 굳이 명계가 아니더라도 차원마다 사후세계가 따
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육체를 잃으면, 물질계에 머물지 사후세계로 이동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거른 뒤에는 신계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서 ‘특정한’ 혼이 명계로 옮겨진다.
혼이 명계까지 도달하는 길은 꽤 먼 셈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기에 명계에 머무는 혼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인력은 남아돌 정도로 많다. 이는 깊은 곳에 갇혀 있는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예비 전력이다.
즉 평소에는 할 일도 없다는 뜻. 그런 주제에 일손이 부족하다니, 개소리가 지나치다.
아브나바가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직접 가볼까 해.”
“…뭐라고요? 그럼 지구는 어쩌시려고.”
엔라는 대꾸하는 대신 아브나바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의미는 간결했다.
나는 바쁘니 네가 눈치껏 땜빵해라.
찰떡같이 알아들은 아브나바가 질색했다.
“아, 제발. 그러지 마요.”
“맡아줄 거지?”
“절대 싫어. 맡았다가 일이라도 터지면 책임은 누가 지고요? 괜한 원망 듣기 싫어요. 그리고 전 이딴 걸레
짝 차원 줘도 안 가져요.”
그녀의 말에 엔라가 길길이 날뛰었다.
“거, 걸레짝이라니! 아직 100년은 거뜬해!”
“100년이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 않나요? 됐네요. 차라리 직접 가고 말지.”
“네가? 으음…….”
엔라는 어째 수상해 눈을 가늘게 떴다.
“찾아서 숨기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 그렇게 분간 없는 사람 아니에요.”
아브나바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내뱉었다.
새빨간 거짓말을.
그녀는 유선우를 찾아내는 즉시 잠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순진한 엔라가 그 속내를 알 리가 없었다.
“알았어, 믿을게. 꼭 데려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보험까지 들었다. 설계를 끝낸 아브나바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예고 없이 나타난 빛의 기둥이 엔라의 공간을 밝혔다. 기둥의 꼭대기에서는 큼지막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청색 피부를 지닌 거인. 가슴에 달린 금색 휘장이 휘황하게 빛났다.
“이게 무슨….”
아브나바는 경악한 표정으로 거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저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전령이자 집행관. 때로는 심판관. 이런저런 호칭으로 불리는 저것은 한정적인 상황에만 움직인다.
그 상황이란, 신계에서 명령을 받았을 경우.
즉 신계에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분명 좋은 일일 텐데.’
아브나바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거인의 입이 벌어졌을 때, 직감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관리자 엔라. 네 구속이 결정되었다.”
돌아가는 꼴이 명백히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