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 받아라
촌극은 이제 지겨웠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유선우는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토노토와 백명은 그 뒷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같은 행동을 하는 둘의 감정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유선우의 마음을 헤아린 토노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멋대로 스승이니 제자니 뭐니. 당사자를 빼놓고
지껄이는 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라!”
반면에 백명은 혼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왜요. 아직도 볼일 남으셨나.”
유선우는 고개만 돌려 백명을 쳐다봤다.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실린 눈빛. 노골적인 반응에도 백명은
애써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너, 물불 가릴 때는 아니지 않으냐.”
“뭐가요?”
“한주와 했던 얘기 말이다.”
“…아, 댁이 그 아저씨인가 보네. 진짜로 들으셨구나.”
유선우가 감탄 반 꺼림칙 반으로 말했다. 한주와의 대화에서 튀어나왔던 아저씨. 엿듣고 있을 것이라곤
했었지만 정말일 줄이야.
백명은 보기보다 대단한 양반인 모양이었다.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마이너스 요소이다만.
“그건 맞아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이렇게 납치까지 당하니까 더 그런 생각 들고요.”
“…크흠. 그렇다면 더 미련한 선택이다. 자존심이 문제인 게냐?”
“글쎄요.”
자존심이라. 확실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자존심은 반 정도고요. 스승이면 그거잖아요. 합법적으로 노동력 착취하는 사기꾼. 그딴 취급 당하고 싶
지 않습니다.”
유선우는 사제 관계에 어떠한 환상도 없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괴팍하지만 따뜻한 스승?
그딴 건 허구다. 백 보 양보해 실존한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인생과는 연이 없었다.
‘아니, 그런 스승이 근처에 아예 없지는 않지.’
하지만 통탄하게도 그 인물에게 배울 순 없었다.
자기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유선우가 아는 참스승은 자신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유선우의 말에 토노토의 시선이 짜게 식었다. 그녀는 유선우의 피해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리고 찾아온 기묘한 침묵.
유선우의 한숨이 그것을 몰아냈다.
“그럼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별꼴을 다 보네. 작게 중얼거린 유선우는 출구로 걸어갔다.
“기다려 보래도!”
“또 뭡니까.”
“허드렛일 따윈 시키지 않겠다. 애초에 제자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미친놈이 어디 있느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백명은 따뜻한 세상에서 살아온 듯했다. 필시 정이 많은 세상이었겠지.
“은근히 많던데요. 제가 본 것만 다섯은 됩니다.”
“허어.”
백명이 탄식했다. 초월자는 죄다 재능뿐만 아니라 스승 복을 타고난 인물들. 그러니 유선우의 말을 믿기
가 힘들었다.
“하여튼 내 약조하마.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게다.”
“…어르신?”
토노토가 의문 섞인 눈초리로 백명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지?’
유선우가 특별하다는 건 그녀도 아는 바였다. 하지만 그건 자신과 여타 초월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 백
명에겐 그저 재밌는 장난감 정도일 터였다.
그런데도 사정사정하면서 제자로 받으려 한다니.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의문은 토노토만의 것이지는 않았다. 유선우도 백명의 의도를 파악하려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대단한 분이신 모양이던데. 왜 굳이 저를?”
“이유 말이냐.”
백명이 고심에 잠기듯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이 떠진 건 5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딱히 숨길 것은 아니지.”
그가 손을 휘적거리자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느릿하게 출입구로 향해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마치 자연
이 의지를 가진 듯했다.
곧이어 진중한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우선 설명하기 전에 확약을 받아야겠다. 여기서 듣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나불대지 않겠다고 말이야.”
“…어라. 혹시 위험한 얘기인가요?”
“그래. 듣기 싫나?”
“그럴 리가요.”
토노토가 눈을 반짝거렸다. 위험한 얘기. 응당 초월자라면 눈이 홱 돌아가는 화제였다.
“그리고 얌전히 보내줄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내가 그렇게 못돼먹은 사람으로 보이나?”
“시치미떼지 마시죠. 신입이랑 뭘 꾸미고 있다는 소리만 돌아도 문제니까. 참, 그래서 제일 시끄러울 때
나오셨구나. 중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잘 아는군. 역시 마법사가 머리가 좋아.”
낮은 웃음소리가 장내에 흘렀다. 백명을 잘 아는 토노토에게는 그게 섬뜩하게만 들려왔다.
“유선우라고 했었지.”
“…네.”
백명의 말에 유선우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어느새 달라진 분위기에 몸이 경직되었다.
“우선 난 네가 물질계로 돌아가는 걸 돕고 싶다. 진심으로.”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아서 판단해라. 설명은 귀찮으니.”
토노토가 떨떠름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반응이 시원찮은 건 유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왜요? 그쪽한테 무슨 득이 된다고.”
“당연한 의심이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개인적으로 널 키워보고 싶기도 하고.”
“사족은 됐어요. 부탁이라 하심은?”
피식거린 유선우가 뒷말을 재촉했다. 백명의 입에서는 나온 것은 영문 모를 발언이었다.
“낙원의 문을 열어줬으면 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유선우가 의아함에 눈매를 좁혔다. 반면에 토노토는 언성을 높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 어르신! 노망났어요?”
“아까부터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나이를 반대로 처먹었나?”
“댁이 개소리하시니까 그렇죠! 뭔 말도 안 되는.”
반응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낙원의 문을 연다니. 자칫 걸리기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될지도 몰랐다.
“기다려 봐요. 문을 연다는 게 정확히 뭐예요?”
“낙원은 구조상 안에서는 나갈 수가 없게 만들어져 있다. 이른바 감옥이지. 우리를 가둬놓은 게야.”
“누가, 뭐하러 그래요?”
“신계에서. 그쪽이랑은 옛날부터 사이가 험악했거든. 맞죠?”
토노토가 대답했고, 백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뭣도 모르는 문외한이 이해하기엔 조잡한 설명이었다.
“죄송한데 전 신계라는 것도 잘 모르거든요. 관리자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고.”
“관리자도 관련이 없지는 않아. 신계에서 만든 놈들이니까.”
“만들어요? 관리자를?”
“그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 일을 떠넘길 셈이었겠지. 안내원도 똑같아. 그래서 걔들은 신계에 적
대할 수 없는 거고.”
상세를 들은 유선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결국은 초월자의 존재가 유일하게 신계에 위협이 되었다는 의미. 그렇기에 낙원을 만들어 초월자를 감금
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난이도. 얼핏 들었을 뿐인데도 난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토노토가 질색하는 게 과장이 아니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해요?”
“당연히 못 하지! 진지하게 듣지 마. 개소리니까.”
“너도 원하던 거 아니었나?”
“하. 그야 원하기는 하죠. 저뿐만 아니라 다들 쌍수 들고 환영할 거고요.”
토노토가 짜증을 부렸다. 제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녀가 말을 반전시켰다.
“근데 전제부터 답이 없잖아요. 대체 어떻게 나갈 건데요?”
“아, 나갈 수는 있다고 들었어요.”
“뭐? 누가 그래?”
“한주라는 사람이요.”
“한주는 또 누구… 그 한주?”
토노토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받아들이기는 힘들어도 수석 안내원의 말이라면 틀림없었다. 사실이라
고 생각한다면 백명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구나.’
아무래도 이 신입은 생각보다도 특별한 듯했다. 절로 군침이 돌지만 그건 둘째치고서.
“설령 나간다 쳐도 문은 어딨는데요?”
“위치는 내가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미친. 그런 걸 어떻게 아셨대.”
“난 낙원보다도 나이가 많아.”
웃음을 띤 백명이 대답했다. 그는 낙원이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초월자였다. 직접 끌려오기까지 한 역사
의 산증인. 위치 정도야 아는 게 당연했다.
“그동안 위치를 바꿔뒀을 가능성도 있겠죠.”
“그건 이미 확인했다. 전에 안내원 한둘이 사라진 적이 있었지, 아마.”
“…와. 알고 보니 제일 정신 나간 분이셨네.”
토노토는 놀라는 것도 지쳐가고 있었다. 동시에 반박당할수록 의욕이 샘솟아갔다.
‘못할 건 없을지도.’
낙원에서의 탈출은 초월자들의 오랜 염원이었다. 물론 벗어나봤자 육체가 없으니 인간과 섞여 살지는 못
하겠지.
그래도 그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바깥에서 삶의 처음과 끝을 맞이했던 그들에게 낙원은 답답하기 짝이 없
었다.
“대략적인 설명은 여기서 끝이다. 대답을 듣고 싶군.”
백명과 토노토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유선우를 쳐다봤다.
한동안 대답은 없었다.
유선우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정적이 끊어진 것은 10여 초가 흐른 뒤였다.
“알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백명은 적당한 긴장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이런 감각을 맛본 게 대체 언제인지. 긴 세월로 인해 마모된
감정이 오늘따라 시끄러웠다.
“별 건 아니고요.”
그리고 유선우는 굳어 있는 백명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냥 성심껏 가르쳐주세요.”
그게 전부였다.
백명은 귀를 의심하다가도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당연한 소리를! 말하지 않았느냐. 널 키워보고 싶기도 하다고.”
“그럼 앞으로 스승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 좋다. 제자를 들이는 건 오랜만이구나.”
장내에 따스한 공기가 감돌았다.
방금까지의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치.”
화기애애한 둘을 쳐다보던 토노토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백명의 의도를 안 이상 자신이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백명이 동아줄을 내려줬다.
“토노토에게도 한 수 배우는 게 좋을 것이다. 싫으냐?”
“아니요. 아까도 발렸으니까요. 설욕해야죠.”
유선우는 거절하지 않고 의욕을 내비쳤다. 토노토의 수준을 고려해보면 대련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했던
싸움. 그때 그녀의 수읽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싸움 상대로는 나쁘지 않겠지.
제자가 되는 건 사양이지만.
“지, 진짜요?”
뜻밖의 말에 토노토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관계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만.”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네가 아니라 나겠지. 수고를 덜어주겠다니 고맙구나.”
이후로도 훈훈한 덕담이 오갔다. 그리고 백명은 유선우에게 스승에 대한 예를 요구했다.
“구배지례를 올리거라.”
“알겠습니다.”
유선우는 반듯하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입가는 음흉하게 올라가 있었다.
‘먹튀 각 섰냐.’
낙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아무도 못 쫓아온다.
즉, 문을 열든 말든 개뿔도 상관없다는 뜻.
배우고 돌아간 뒤에 배나 긁으면서 꿀잠 자면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