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 받아라
그녀가 신입을 보는 기준은 투쟁심 하나뿐이었다.
지닌바 힘 따위는 딱히 중요치 않았다. 지금은 약하더라도 낙원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레 강해질 테니까.
오히려 처음에 강한 편이었던 이가 시원찮았던 이에게 뒤처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래요? 전 벌써 실망했는데. 성격 뜯어고치고 오십쇼.”
“낙원에선 나 정도면 양반이야. 넌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럼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서 TV나 봐야겠….”
“말은 그만하자.”
지가 먼저 해놓고. 속으로 투덜거린 유선우는 스위치를 바꾸듯 사고를 전환했다. 판단할 내용은 이 전투
에서의 대략적인 방침이었다.
‘마법 쪽이랬지.’
본인이 명확하게 밝히진 않았지만 틀림없을 터. 저 불길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마법사의 상대
법은 당연하게도 근접전이다.
‘문제는 정보가 너무 적어.’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다. 수준급의 마법사라면 방패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쉽게 틈을 줄 만큼 허접하다면 선배인 척하지도 않았겠지. 저래놓고 지면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
‘탐색부터 가자.’
결론을 내린 유선우가 땅을 박찼다.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든다.
토노토가 놀란 듯 약간의 빈틈을 보였다.
그러나 물지 않는다. 질 떨어지는 연기다.
유선우는 흔들림 없이 행동했다.
팔을 뻗으면 창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위치. 더 다가가지 않고 옆으로 크게 방향을 틀었다. 페이크였다.
찰나의 순간에 오가는 심리전. 끝내 토노토는 유선우가 달려오던 전방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때, 유선우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하지만 수 싸움에서 밀린 쪽은 오히려 유선우였다.
화르르륵!
불길이 솟구쳐 그의 사방을 가로막았다. 네 면을 막은 불의 장막은 감옥과도 같았다.
‘미친….’
유선우는 열기에 노출된 채로 황급히 눈알을 굴렸다. 불길을 보니 높이가 묘하게 낮았다.
‘유도하는 건가.’
그렇다면 피해 없이 벗어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한다. 유선우는 마나까지 듬뿍 담아 한기 서린 창을 휘둘
렀다.
찢는 것은 정면이 아니라 우측의 벽. 격이 담긴 불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면 뚫어낼
정도는 되었다.
유선우는 최대한 몸을 보호하며 불길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수천의 반딧불 같은 구체가 그를 반겼다.
“이런 씨…!”
콰아아앙!
연쇄적인 폭발이 유선우의 신체를 강타했다. 그는 불꽃 속에서 초승달 모양의 검기를 흩뿌렸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행동이었다.
그가 헐레벌떡 거리를 벌렸다. 다섯 발을 채 떼기도 전에 밑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퍼엉!
유선우는 마력으로 몸을 감쌌다. 빠른 대처로 넘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혼이 타격을 입는 듯한 생소한 고통이 괴로웠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이게 읽혔다고?’
유선우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토노토를 바라봤다. 경악한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여전히 유들유들
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아직 안 끝났는데. 아니면 벌써 항복인가?”
“…항복은 무슨.”
유선우가 날 선 목소리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기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었다.
모든 움직임이 읽히고 있었다.
무슨 겟앰하는 고인물도 아니고.
이렇게 농락당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속도와 예측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휘둘리기만 하다가 끝이 날 터다.
유선우는 어떻게든 토노토를 당황케 하고자 결심했다. 그가 다시 돌진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뿜어진
냉기가 주변의 열기를 미세하게 갉아먹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도 썼었지, 그거.”
마나, 즉 간섭력을 감지한 토노토가 흥미를 보였다. 갓 초월자가 된 놈이 어떻게 간섭력을 쓰는 것일까.
하지만 호기심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진짜 관리자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수준이었으니까.
그녀는 실제로 관리자를 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불길을 잠재우지도 못하는 간섭력에 위기감을 가지진
않았다.
그때 쇄도한 유선우가 현란하게 발을 놀렸다. 수십의 잔상이 어지럽게 흐트러지며 눈을 현혹했다.
‘좀 투박하네.’
토노토는 간단하게 눈속임을 간파했다. 나름대로 괜찮긴 해도 뛰어난 무인들의 동작보다는 뒤떨어졌다.
‘이상하다. 체계가 안 잡혀 있어.’
그녀는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내며 고심했다. 묘한 일이었다. 초월자가 될 정도의 인재라면 기술적인 면
에서 모자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유선우의 움직임은 세련되지 못했다.
토노토는 의문으로 생각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선우가 갈고닦아온 창술은 몬스터를 죽이기 위
한 것.
자연스레 효율만을 찾게 되었고, 실제로 성과를 거두며 그대로 굳어졌다.
비유하자면 짐승 같은 움직임이다. 평생 기술을 가다듬는 무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들처럼 수련했더라면 유선우는 아직도 431-9 차원에서 썩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토노토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됐어.”
턱!
토노토의 손이 쏘아지던 창을 잡아챘다. 의욕이 확 떨어진 모습이었다. 실력보단 투쟁심을 중요시하는
그녀라도 이건 아니라 판단했다.
그녀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격을 다루는 방법뿐. 기본이 안 되어 있으면 가르쳐봤자 돼지 목의 진주였다.
‘빌어먹을.’
한편으로 유선우는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마법사에게 무기를 잡힌다니. 여태 겪어본 적도 없는 굴욕이
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토노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멋대로 싸우자 해놓고 미안한데 말이야.”
“…뭡니까.”
“너, 약하네.”
개뿔도 미안하지 않다는 어조. 하지만 비웃는 투도 아니었고, 그저 담담했다. 그게 관심이 식었음을 명명
백백하게 알리고 있었다.
“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허접해. 그야 인간 시절이었으면 힘으로 다 찍어누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글쎄.”
낙원에 너보다 떨어지는 놈은 한 명도 없어. 그 말까지는 내뱉지 않았다. 토노토도 유선우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연민마저 들기 시작했다.
“스승이 누구였는지 얼굴 좀 보고 싶네. 별것도 아닌 놈이었겠어.”
스승을 하늘처럼 아는 무인에게는 해서는 안 될 말. 그토록 무례한 언동이었다.
하지만 유선우는 크게 발끈하지 않았다. 조금 짜증 난 기색으로 사실을 내뱉을 뿐.
“없었는데요.”
“응?”
“그딴 거 없었다고요. 죄다 사기꾼 새끼들뿐이라서.”
431-9 차원에서 창의 명인이랍시고 이름을 알리던 놈들은 몇 있었다. 싹 다 입만 산 놈들이었지.
게을러빠져서는 집안일만 시키고, 가르침도 똑바로 주지 않는다. 참다 못해서 나가려고 하면 사료처럼
떡밥만 던져주는 게 전부.
그딴 놈들 밑에서 배웠으면 언젠가 죽이고 탈출했을 터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토노토는 유선우의 말을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침도 받지 않고 초월자가 되었다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초월자들도 믿지 않을 개소리였다.
마법이든 무공이든 그 끝은 아득히 멀다. 벼랑으로 이어지는 갈림길마저 무수히 존재한다. 그것을 최대
한 줄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이 겪어온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최적의 교육. 그에 불세출의 재능이 더해지고
나서야 초월자 하나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스승이 없다니. 참나.’
토노토에게도 스승은 있었다. 비록 초월자가 되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 사람의 가르침 덕분에 그녀는 낙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낙원에서 자신의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초월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 혹시 화났어? 그랬으면 미안해. 그냥 더 괜찮은 사람한테 배웠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어서….”
하지만 이번 신입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없던 사람이라 여길 만큼 싫어하는 게 아닐까. 이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화는 났는데, 댁 말투 때문에 그런 거고요.”
유선우가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그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탓에 머리가 복잡했다.
“굳이 꼽자면 가끔 보던 용병이나 사냥꾼들이 제 스승이겠죠. 생존 기술 같은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됐었으
니까.”
“창술은?”
“아뇨. 딱히.”
부정하고는 창을 빙글 돌렸다.
“제가 활동하던 차원은 창을 좀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거든요. 병사들이나 쓰는 거라면서. 그래서 창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하여간 뭣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거짓 없는 진솔한 대답. 이쯤 되니 토노토도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의 안에서 유선우에
대한 평가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월척이다.’
현주소만 보자면 유선우는 허접하다. 격은 미약하고, 실력도 초월자가 될 정도는 아닌 수준. 그러나 인간
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변변한 교육도 받지 않았는데 이 수준이라니. 그야말로 괴물 같은 재능이었다.
꿀꺽.
토노토가 군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의 색으로 유선우를 물들이고 싶었다.
뛰어난 제자를 기르고 싶다는 건 경지에 이른 자의 대부분이 가지는 욕구다. 마법사인 그녀마저도 참을
수 없이 탐났다.
‘절대로 안 뺏겨.’
토노토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언젠가 모든 초월자가 유선우에게 침을 묻히려 들리라. 그러기 전
에 행동해야만 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얘, 얘. 혹시 지금 시간 있니?”
“그야 뭐. 시간이야 많죠. 여기서 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럼 둘이 얘기 좀 할까? 우리 집으로 와서.”
토노토가 몸을 바싹 붙이며 속삭였다. 유선우는 달콤한 향과 함께 부드러움을 느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유선우는 남자의 본능을 무시하고 토노토의 팔을 뿌리쳤다. 180도 달라진 태도가 꺼림칙했다.
“아니이,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싶어서. 사과나 할 겸. 응? 바로 저기야!”
토노토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몇 번이나 봤던 불타오르는 섬이 있었다. 말랑이 하룻밤에 제국
을 불태웠다는 여자가 살고 있다고 했던 장소였다.
‘그 미친년이 이 미친년이었구나.’
낙원은 참 좁았다.
묘한 감상을 품은 유선우는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더 엮이고 싶지 않은데.’
거절하는 편이 옳을 터. 하지만 보기에 토노토는 쉽게 꺾일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몇 번이나 찾아와서 불을 질러대면 어떻게 될까. 결국은 참지 못하고 이 여자를 따라가게 될 것
이다.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거절하면 다음부턴 관계가 좀 험악해지겠지.’
차라리 지금부터 양호한 관계를 쌓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생각을 정리한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의 표현에 토노토가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손이 유선우의 손을 감쌌다.
“좋아, 좋아. 늦기 전에 빨리…!”
다급하게 발을 떼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콰악!
돌연히 토노토의 발 앞에 칼 한 자루가 내리꽂혔다. 명백한 위협 행위.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알아챘구나.’
조용하고 원만하게 데려가서 감금하고 조교해줄 셈이었건만. 이렇게 빨리 걸릴 줄 알았다면 강제적으로
라도 데려갔어야만 했다.
혀를 찬 토노토가 하늘을 바라봤다.
허공에는 총 다섯의 초월자가 떠다니고 있었다.
“어디서 선수를 쳐. 교활한 년 같으니.”
“누님. 이러시면 안 되죠.”
“공평하게 하자고! 왜 말을 못 알아 처먹어!”
공격적인 말이 한바탕 쏟아졌다. 그러나 토노토는 기가 죽기는커녕 세상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얜 내 거야.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죽여버리기 전에 다 꺼져!”
격이 담긴 외침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소리에 반응하듯이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하늘 아래에 열기가 가득 차올라 세상이 일렁거린다. 스케일이 다른 광경. 유선우가 숨을 삼켰다.
‘이게 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