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 받아라
대화를 마친 후에 유선우는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가 처음으로 한 행동은 연무장을 만드는 것이
었다.
방법은 건물을 만들었을 때와 동일.
떠올리자 이미지 그대로의 장소가 만들어졌다.
‘됐다.’
유선우의 눈이 휑한 연무장을 훑었다. 어딜 봐도 모래뿐인, 재미라곤 쥐뿔도 없는 장소.
하지만 안정감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431-9 차원에서 신세를 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바닥 위에 선 탓일까.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떠올린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씨발이었다.
‘뒈지게 아팠었는데.’
근육통은 기본 옵션.
매번 토악질해대며 훈련을 거듭했었다.
무리한 운동은 안 좋다지만, 그건 지구에서나 쓰이는 말이다. 사제만 있다면 훈련의 강도는 얼마든지 높
일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유선우에겐 일반적인 사제가 아닌 성녀가 붙어 있었다. 어떻게든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었다.
“후우.”
유선우는 길게 숨을 뽑아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차분해진 정신으로 창 한 자루를 강하게 떠올렸다. 그
러자 빛무리가 모여들어 기다란 창의 형태를 빚어냈다.
‘진짜 편하네.’
말랑이 유선우에게 양도해준 권한.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만능이라 부를 만했다.
제약은 있지만 별것도 아니었다.
본인 소유의 섬 외에서는 권한이 축소되는 것뿐.
남의 땅에서 깽판 치는 것을 막기 위한 당연한 조치다. 그것이 편리성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다.
‘익숙해지면 돌아갔을 때가 큰일이겠어.’
유선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답잖은 생각이다. 김칫국을 마실 시간에 훈련하는 게 득이겠지.
그가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벌리고 창끝을 비스듬히 내린다. 폭발적으로 흘러나온 마력이 전신에 휘감
긴다.
쿠웅!
유선우가 뻗은 발이 지면에 닿자 땅이 울렸다. 굉음을 찢는 것처럼 창이 허공으로 내질러졌다.
일격에 강풍이 몰아치고 구름의 형태가 흐트러진다. 기괴하게 비틀린 공간이 끔찍한 소리를 낳는다.
유선우의 창끝이 흔들리며 다음 동작으로 이어졌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수십의 창격이 행해졌다.
그 뒤에야 유선우가 손을 멈췄다. 그는 창끝을 내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불만족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음.’
둘러보니 연무장은 멀쩡했다. 구조는 같아도 내구성은 낙원의 것이 뛰어난 모양. 유선우는 그게 어쩐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을 훼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따지자면 그냥 엄한 짜증. 그런 마음을 품을 정도로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 여겼다.
‘일단 전보다 세지긴 했어.’
실제로 움직여보니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즉각적인 반응. 기존에는 동작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명령을 몸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
었다.
물론 그런 무의식적인 일을 의식하는 미친놈은 없겠지. 하지만 찰나의 지체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
고 지금은 그 당연한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것은 유선우에게 적잖은 쾌감을 안겨주었다.
상쾌했다. 달려 있던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것처럼.
‘지치지도 않았고.’
마력을 쏟아부었는데도 부담은 전혀 없었다. 고갈은커녕 소모마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나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고작 그뿐인 변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성장은 아
니었다. 이대로는 평생이 지나도 관리자의 파편을 꺾지 못하리라.
‘아예 근본부터 바꿀 필요가 있어.’
유선우의 무력은 창술을 근간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알맹이를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마력.
유선우는 마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숙련을 떠나서 원동력 자체의 한계가 보이고 있다고.
앞으로 상대할 존재는 터무니없는 마나를 보유한 관리자들이다. 지금은 힘의 상성은 물론 총량에서도 밀
리는 실정. 수련의 방향을 대폭으로 바꿔야만 했다.
‘그럼 나도 마나를 써야 하나?’
얼핏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유선우가 지닌 마나는 관리자에 비하면 한 줌도 되지 않는 수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이다.
‘방법이 없네.’
마력도 안 돼, 마나도 안 돼.
시작부터 앞길이 막막했다.
‘이런 건 취향이 아닌데.’
넘어설 벽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시야를 흐리는 안개라면 글쎄.
이번에 맞닥뜨린 것은 명백히 후자였다.
유선우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뭐해?”
여성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듣기 좋은 낭랑한 음성. 그러나 유선우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숨만 삼켰다.
‘뭐야. 대체 언제….’
전조조차 없이 홀연히 나타난 여성. 그녀가 서 있는 위치는 유선우의 등 뒤였다.
어이없게 후방을 내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깨에 새하얀 손이 올려져 있었다.
“…누구십니까?”
태연함을 가장한 유선우가 손을 치우며 물었다. 여성은 아까 전의 한주와는 다르게 선선히 물러났다.
“누구긴 누구야. 네 선배지. 그리고 넌 신입이고. 내 말 틀려?”
“음, 아니요. 뭐.”
“대답이 시원찮네?”
“……죄송합니다?”
근엄한 어조에 유선우가 어색하게 대꾸했다.
무슨 군기라도 잡을 생각인 걸까. 이런 타입은 백이면 백 때리고 싶어지는데.
“됐어. 근데 훈련하고 있었나 봐?”
의외로 여성의 낯에 웃음이 그려졌다.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방금 시작했지만요.”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너도 별나다.”
“저 같은 사람이 별로 없었나요?”
“아니. 다들 처음부터 훈련하고 연구하고 그랬지.”
나도 마찬가지고. 짧게 덧붙인 여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유선우를 훑었다.
‘보기에는 좀… 아니, 많이 모자라네.’
속으로 평가를 마치자 여성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변변찮음은 그녀에겐 플러스 요소였다. 신입은 모
자랄수록 챙겨줄 맛이 나기 마련이니.
“어쨌든 반갑다고. 뭐라고 부르면 돼?”
“유선우입니다. 선우 쪽이 이름이에요. 그쪽은요?”
“그냥 토노토. 성은 글쎄. 잘 기억 안 나.”
자기 성씨를 까먹을 수가 있나. 유선우는 의문스럽게 여기면서도 대충 넘어갔다. 혹시 거짓이라면 말하
기 싫은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빡대가리일 뿐이다.
“근데 무슨 일이신지. 지금 좀 바쁜데.”
“아, 그랬지.”
토노토가 구름같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무공 방면인 거 같은데. 맞아?”
“네. 보시다시피.”
유선우가 창대를 흔들며 대답했다. 창을 바라보는 토노토의 낯이 흐리다.
“하, 역시. 좋다 말았네.”
“그러시구나. 볼 일 없으시면….”
“아니야. 별로 상관없어. 사실 맨날 몸 쓰는 놈만 오니까 별로 기대도 없었고.”
초월자의 구성 비율은 마법사가 2할, 무인이 8할가량. 이만한 차이가 나는 까닭은 그냥 무인이 장수하기
때문이다. 오래 살았다면 자연스레 생전의 업적도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2할에 속하는 토노토는 근 천 년간 마법사 출신 신입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기간은 더
길어질 모양이었다.
“얘, 있잖아.”
“왜요.”
유선우의 음성에 귀찮다는 감정이 담겼다. 대체 뭐 하러 찾아온 건지. 인사는 좋다만 초면부터 묘하게 제
멋대로다. 친해지면 성가셔질 유형이다.
그런 그의 속에는 관심도 없는 토노토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랑 한 번 해볼래?”
“뭘 해요 미….”
친년아. 유선우는 욕설을 가까스로 목구멍에서 틀어막았다. 토노토는 외견이야 젊어 보여도 실제 나이론
천 살은 가볍게 넘을 터.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는 나이 차다.
“싫어? 달렸으면 남자답게 굴어야지. 하자니까, 응? 살살해줄게.”
“미친년.”
두 번은 안 참는다. 원래부터 유선우는 그다지 예의를 중시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예의 깍듯이 따졌으면
김한성도 안 죽었지.
“관심 없으니까 곱게 돌아가세요. 그리고 남자답게라는 말 쓰지 맙시다. 저도 여자답게라는 말 안 쓰니
까.”
“별 이상한 걸 물고 늘어지네.”
“제가 살던 곳에선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이해하지 못했는지 토노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다시금 싱글벙글 웃음 짓는다.
“아하하. 거절당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처음 받아서 아주 좋네요. 영광이고 감사하니 슬슬 집에나 가시죠.”
“응. 새롭고 짜릿해!”
과장되게 말한 그녀가 유선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근데 혹시 쫄았어?”
“진짜 성격 씹….”
“하긴, 초면부터 싸우자고 하는 건데. 알겠다고 하는 사람이 별난 거지. 이해해.”
전혀 이해한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처음에 했던 말을 재활용해 빙 돌려 까는 것이었다.
‘별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 너만이 그렇지 않다’.
평소였다면 칭찬이었으리라. 하지만 별나기에 특출난 이들뿐인 낙원에서는 비하였다.
유선우는 그 뉘앙스를 알아차렸으나 화를 내진 않았다. 그보다도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볼
을 긁적였다.
“아, 아아. 싸우자고요. 아, 그 한 번.”
“응? 뭐야, 무슨 오해한 거야?”
“오해 같은 거 안 했습니다. 네.”
“흐응.”
토노토가 콧소리를 흘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유선우를 흘겨보던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래서. 나랑 한 판 할 거냐니까?”
“솔직히 이번 건 고의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참나.”
헛웃음 친 유선우가 창을 빙글 돌렸다. 승낙의 의미. 토노토가 빙긋 웃더니 손을 뻗었다.
정말로 별것 아닌 행동. 그러나 유선우는 전신의 털이 삐죽 서는 감각을 느꼈다.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찰나의 지연시간도 없이 발이 움직였다.
생각과 동시에 동작이 행해진다. 허공을 가른 토노토의 손을 보자 그 효용성이 새삼 와닿았다.
“좋아. 그래야지.”
만족했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둥실 떠올랐다. 토노토가 유선우를 향해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피어올랐다.
유선우는 긴장감을 안은 채 토노토를 주시했다.
‘잘 됐지.’
어차피 막히고 있던 참. 초월자와의 대련을 통해 안개가 걷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토노토가 오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홀로 끙끙댔을 터. 끝에는 다른 초월자를 찾아갔을 것이다.
즉 수고를 덜었다는 의미.
유선우가 창끝을 겨냥하며 자세를 잡았다.
“실망할 뻔했는데. 아주 꽝은 아닌 모양이네.”
토노토가 흡족하다는 듯 콧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