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
“허억!”
꿈에서 깨어난 유선우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익숙한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장의 모습은 어
디에도 없었다.
“후우, 후우.”
유선우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수 초가 지난 뒤에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
다. 그의 입에서는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더럽게 세네.”
꿈속에서 유선우는 허무하게 패배했다.
손도 쓰지 못했다. 한두 수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기에 복기를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다가가자마자 온몸이 불타버리니 뭘 할 수가 있어야지. 공략법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다.
‘…하긴. 못 이기는 것도 당연한가.’
썩어도 준치라.
파편일지라도 관리자다.
그것도 인간의 그릇을 빌린 게 아니라 본체의 일부. 그러니 이전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터다.
갓 초월자가 된 유선우에게 승산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근데 별로 아무렇지도 않네.’
천만다행으로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꿈속에서의 죽음이 현실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듯했다. 하지
만 변화가 없다는 것이 마냥 낙관적인 일이기만 할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본래대로라면 격이 안정되어 온전한 초월자에 가까워져 있었을 테니까. 아마 방해를 받은 탓에 성장이 정
체되었으리라.
‘골치 아픈데.’
생각을 정리한 유선우가 혀를 찼다. 짜증스러운 몸짓과는 달리 눈에는 호승심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조질까.’
게임을 할 때면 매번 극악 난이도를 선택하는 인종이 있다. 그 변태가 딱 유선우였다.
그는 높은 벽을 넘어설 때의 성취감을 좋아했다.
그러니 좌절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유선우는 몸이 근질거렸으나 당장 움직이진 않았다. 훈련하기에 앞서 말랑과 대화를 나누기 위함. 벽도
중요하기는 하다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알아서 찾아온다 했었나.’
그럼 차분히 기다려야겠지.
시간도 죽일 겸 지인들을 떠올렸다.
유선우의 상념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건 단연코 차세정이었다. 크리스마스의 이브, 울먹이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씁.”
입맛을 다신 유선우는 소파에 퍼질러 누웠다.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터폰은 작동하지 않는 걸까.
유선우는 작은 의문을 품은 채로 문을 열어줬다.
“또 뵙습니다. 잘 주무신… 거 같지는 않네요.”
“소파에서 자서 그런가 봐요. 근데 이분은 누구신지.”
너스레를 떤 유선우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현관에는 말랑 외에도 다른 손님이 있었다.
갈 때는 하나더니, 올 때는 둘이다.
둘을 보는 그의 눈빛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이렇게 찾아오는 동행인은 귀찮은 인물일 경우가 잦았다.
“제 상사예요. 고참 안내원이시죠.”
“한주다. 잘 부탁해.”
태연하게 인사한 한주가 악수를 청했다. 한주 또한 말랑과 같은 소인이었기에 보기에 묘한 구도였다.
“…유선우입니다.”
유선우는 떨떠름하게 손을 맞잡았다. 소년에게 반말을 듣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말랑의 말로 미루어보아 한주는 까마득한 고령일 테니까.
“으음.”
한주는 악수를 나눈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악력을 가하며 단단히 붙잡았다.
한주 나름대로 상대를 알아보는 절차였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유선우에겐 실례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요? 손 좀.”
“아, 미안.”
날이 선 목소리가 향해진 뒤에야 손이 풀어졌다. 그러자 말랑이 작게 소곤거렸다.
“한주님. 뭐 알아내셨어요?”
“음. 글쎄.”
한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내기는 했다.
의문은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부풀었지만.
‘재밌는 애네.’
확인한 결과, 눈앞에 있는 초월자의 격은 이질적이었다.
한 존재의 안에 깃들어 있는 두 가지의 격.
그건 물과 기름처럼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았다.
서로 뒤섞여 충돌하고 있었다.
한주는 그 상세를 정확히 파악했다.
“너, 관리자를 먹었구나.”
“네? 네. 아마도. 소화불량이지만요.”
“아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한주의 입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인간의 몸으로 관리자를 죽였다니. 긴 세월을 살아온 그도 이런 초월자
는 처음이었다.
“말도 안 되는데. 대체 어떻게 죽인 거야?”
사실 관리자를 죽인 초월자는 낙원에 몇이나 있다. 전례가 있기에 한주도 알아차리는 게 가능했다. 낙원
이 만들어지기도 전인 옛적의 일이라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하지만 그마저도 초월자가 된 후에 행한 것. 인간 시절에 관리자를 죽인 존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관리자를 죽여요? 에이, 무슨 그런.”
“그냥 어쩌다가요.”
“……뭐라고요?”
황당함에 말랑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유선우의 말은 틀림없는 긍정이었다. ‘어쩌
다가’라는 맥빠지는 말투는 둘째치고서.
“그럴 리가 없는데. 애초에 싸우기는커녕 만날 일도 없잖아요.”
“그쪽에서 찾아오더라고요. 남의 구역에서 불쇼 하는데 싸워야지 어떡해.”
“…찾아와요? 아, 그러고 보니 지구 출신이라고 하셨죠.”
지구는 현재 전 차원에서 가장 화제성이 높은 핫플레이스다. 엔라에게 앙심을 품은 관리자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
사태는 나아질 전망도 없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그 탓에 방임주의인 신계마저 움직일 것이라는 추측이
돌고 있는 상태다.
‘거기서 왔다면 만날 일 정도야 있을지도 몰라.’
말랑은 최대한 상식을 버리고 생각해봤다. 백 보 양보해 천문학적인 확률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 한들 죽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유선우와 한주의 말을 믿는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본인의 격이 아니었구나.’
업적이 격으로 인정되는 건 사후부터의 일.
신체가 살아 있음에도 초월자가 된 이유는 관리자의 격을 흡수했기 때문이리라.
‘어쩐지 약해 보이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상적인 초월자라면 관리자의 파편보다는 강할 테니까. 엔라 같은
강자는 예외가 되겠다만 어쨌든.
‘그렇다면 이제는…….’
말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관리자를 먹음으로 최소의 기반은 다져졌다.
남은 건 본인의 격을 완성해 온전한 초월자가 되는 것뿐. 그다음에 어떠한 방법으로 물질계에 돌아가게
된다면.
만약의 가능성을 상상한 말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미래가 찾아온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반드시 지구에 피바람이 불게 되리라.
***
유선우는 한주와 말랑에게 정황을 전해 들었다.
자신이 이른바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산 채로 낙원에 오게 된 경위까지.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그다지 복잡한 일도 아니었고.
“정리하면 제가 관리자를 죽여서 여기 있다는 거네요.”
“응. 네가 반쯤 죽은 탓이기도 하고.”
관리자를 죽여 격의 일부를 흡수했고, 동시에 강신의 여파로 반죽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혼만이 빠져나
와 불완전한 초월자로서 낙원에 입성하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알았다. 하지만 의문이 해소되니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제가 살아 있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렇지. 혼이 떨어질 정도로 육체가 손상됐으니. 뭣보다 혼이 멀어지면 몸이 못 버텨야 정상이
야. 근데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네. 왜일까?”
“사지가 멀쩡해요?”
유선우가 한주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가 기억하기로 자신의 몸의 1/3가량은 뼈도 남기지 않고 불탔었
다. 멀쩡하긴커녕 그냥 송장일 터였다.
“혹시 저도 볼 수 있을까요?”
“기록 정도면 뭐. 띄워줄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한주는 허공에 기록 영상을 띄웠다. 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규칙위반이지만 뭐
어쩌라고. 어차피 안 걸리면 된다.
“허. 진짜네.”
유선우는 신기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특이사항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나 꼽자면 서리가 잔뜩 끼어 있다는 것일까. 아마 강신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모양.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멀쩡하네요. 혈색도 밝고. 이렇게 보니까 기분 이상하다. 제가 저렇게 된 지는 얼마나 지났죠?”
“그건 모르겠고. 네가 여기 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그대로야. 외부의 도움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
한 일이지.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인간한테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사회생활 어지간히 잘했나 봐?”
“사회생활이요? 아, 설마.”
유선우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아이릴이구나.’
아이릴 외에 있을 리가 없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모양이다.
그리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미어졌다.
“저기, 그런데요.”
유선우가 감상에 젖으려 할 때.
조용히 있던 말랑이 끼어들었다.
“돌아갈 방법이 없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찬물을 끼얹는 말. 그래도 타당한 의견이었다. 애초에 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한 상황이었
다.
“그건 그래. 우선 어떻게 죽였고, 또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 죽을 뻔했는지 알고 싶은데. 제대로 알아야
해결책이 나오지.”
호기심이 동한 한주가 물었다. 그는 요청받지도 않았으나 유선우를 도울 생각이 넘쳤다.
“한주님, 잠깐만요.”
한주의 의중을 눈치챈 말랑이 소곤거렸다.
“응? 왜?”
“저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거. 위쪽에서 락까지 걸어둔 거를….”
게으른 상관이 의욕에 찬 건 좋다. 그래도 건드려도 될 게 있고 건드려서는 안 될 게 있는 법.
이 경우는 명백히 후자였다. 하지만 말랑의 제지에도 한주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재밌잖아. 그리고 정보 몇 개만 던져주는 게 뭐 어때서?”
“아니, 그래도 걸리면 어떡해요.”
“걸리기는 무슨. 신계에서도 여기는 안 쳐다봐. 너도 짬 먹을 대로 먹었으니까 알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초월자의 낙원을 관리하는 존재는 안내원뿐이다.
그들에게 할당된 직무도 정기적인 보고와 초월자의 안내가 전부. 그것이 신계가 낙원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무관심의 이유는 낙원의 구조에 있다.
낙원이 만들어진 후로 빠져나온 초월자는 전무.
완벽하게 격리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장소에 신경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말랑은 지금만큼은 다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판단했다.
“어디서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죠. 저 사람은 주목받고 있잖아요.”
“그랬으면 그 아저씨가 먼저 알아차렸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그 아저씨. 애매한 호칭이었지만 말랑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지 못한 건 유선우뿐이었다.
“아저씨라니, 그게 누구예요?”
“여기 대빵. 아마 우리가 지금 하는 말도 다 듣고 있을걸.”
“관리자처럼요? 좀 기분 나쁜데.”
“아니, 너랑 똑같아.”
초월자라는 의미다.
듣기로는 신계마저도 견제하는 양반인 모양.
유선우는 그 인물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흥미가 있으면 본인이 직접 만나러 오겠지. 그보다 썰 풀어보라니까.”
“…음. 네.”
한주의 말에 유선우는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본인이 도와주겠다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당시의 일을 읊었다. 들으면서 한주는 눈을 빛냈고, 말랑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강신의 대가를 치렀다는 것까지 이야기했을 때. 한주가 말을 끊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겠다. 좀 어렵겠는데.”
“뭐가요?”
“네가 돌아가는 거.”
두 쌍의 시선이 한주에게 쏘아져 뒷말을 재촉했다. 한주는 잠시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엔라의 권능을 빌려 썼으니 대가도 당연히 크지. 그런데도 어떻게든 살아 있는 거 보면 네 주변
인이 생각보다도 더 능력 있는 모양이네.”
“여태까지 몇 번이나 도움받았죠.”
아이릴이 고평가를 받으니 유선우로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안에서 그녀에 대한 감사가 더욱 커
졌다.
그래도 지금은 덮어두고.
“어쨌든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하는 건 간단한데…. 일단 엔라의 권능이 네 몸에 남아서 악영향을 주고 있는 거지.”
원인 다음에는 해결책이 나올 차례. 유선우는 약간의 긴장을 안고 한주의 말을 기다렸다.
“그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네가 강해지면 돼.”
아무래도 할 일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
같은 시각, 한 명의 여성이 새로이 떠오른 섬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의 신입이야.”
여성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혼잣말은 낙원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버릇이었다.
“불쌍해라.”
동정 어린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 허울만 좋은 장소에 떨어진 누군가에 대한 연민이었다.
여성은 낙원을 끔찍하다고 여겼다. 즐길 거리라고는 단련과 연구뿐인 심심한 곳이니까. 다른 게 있다면
같은 처지인 멍청이들과 치고받는 것 정도다.
아직 보지도 못한 저 신입 역시 똑같이 고여가겠지. 하지만 혼자서라면 지루할 뿐만 아니라 외로울 게 분
명하다.
“내가 도와줘야겠어.”
뉴비는 언제나 환영이다.
여성은 싱글벙글 웃으며 허공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