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홀로 남은 유선우는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부도 기억에 남아 있는 그
대로였다.
거의 모든 것이 여전했다.
아이릴을 위해 샀던 TV. 침대처럼 쓰던 소파.
유선우가 혼자라는 사실만이 달랐다.
‘어색하네.’
아이릴과 지낸 시간은 빈말로도 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기이한 동거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
이었다.
“하아.”
유선우는 숨을 토해냄으로 잡념을 치워냈다. 외롭기는 해도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그보
다 중요한 문제와 마주 봐야만 한다.
‘내가 죽었다고.’
그는 말랑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지금껏 숱하게 사선을 넘어왔기에 쉽게 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었건만. 결국은 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니, 허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충격은 이미 씻은 듯 사라진 뒤였다. 죽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고,
‘실감이 안 나.’
몸을 움직일수록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이 가벼워 새로 태어난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희망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말랑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자신이 특별한 케이스임은 확실했다.
‘어떻게 다른지는 아직 모르지만.’
부디 긍정적인 방향이기를 빌 뿐이다. 예를 들자면 어쩌다가 우연히 산 채로 초월자가 되었다거나. 그래
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너무 행복회로 돌리는 건가.’
절로 쓴웃음이 나왔지만 상상하는 건 자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생각을 정리한 유선우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푹신함에 둘러싸이니 급격히 졸음이 쏟아졌다.
***
말랑의 눈앞에는 고동색의 문이 있었다.
광활한 평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문.
기괴한 광경이었지만 말랑의 태도는 담담했다.
마치 그마저도 그림의 일부인 것만 같았다.
“한주님. 들어갑니다.”
말랑은 두어 번 노크하곤 문을 활짝 열었다.
대답은 없었다만 뭐 어쩌라고.
어차피 들려오지도 않을 대답이다.
그가 발을 내디뎠다. 문 너머는 어둑한 실내. 바닥에는 쓰레기가 가득해 누울 곳도 없었고, 퀴퀴한 냄새도
났다. 어디에나 있는 방구석 여포의 방이었다.
“저 왔어요.”
말랑은 쓰레기를 발로 툭툭 치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왜?”
손님을 눈치챘는지 앳된 목소리가 흘렀다. 들려온 장소는 방의 한구석. 그곳엔 한 소년이 양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신입 문제로 여쭤볼 게 있어서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바빠.”
칼같이 일축한 소년, 한주가 유려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 손놀림에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말랑은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맨날 게임만 하시면서 뭘.”
한주의 몸짓은 예술이었지만 하고 있는 건 게임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야 한주는 근 백 년
간 게임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고로 말랑은 이대로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신입이 왔거든요? 아, 저희 신입 말고 초월자 쪽이요.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혹시 아시
는 거 있나 해서요.”
“몰라. 관심 없어. 나가.”
“아니…….”
기가 막힌 말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상관이라는 게 이 모양인지. 오래간 지켜봤지만 일을 제대로 하는
꼴을 보질 못했다.
“잠깐만 알아봐 주세요. 이따가 듀오 해드릴 테니까.”
듀오라는 말에 한주가 흠칫거리며 몸을 굳혔다.
“……진짜? 같이 해줄 거야?”
“그 정도야 뭐.”
“알았어. 기다려봐.”
한주가 히죽거리면서 즐기던 게임을 정지했다. 이 평화로운 곳에서 게임 친구는 둘도 없이 소중했다. 주
민이야 제법 많아도 초월자들은 게임을 즐기지 않으니까.
“이름이 뭔데?”
“유선우요. 지구 출신이라던데요.”
“지구? 신기하네. 그만큼 상위 차원에서 나온 건 처음 아니야?”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초월자는 낙후된 차원에서 태어나는 경향이 짙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개인의 무력에 무관심해지기 때문
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선우는 확실히 특이한 경우였다.
“혹시 그 사람일 수도 있겠다. 거 누구냐. 아브나바 차원 구했다던.”
“글쎄요.”
말랑 또한 익히 아는 소문이었다.
엔라가 보낸 청년이 차원 하나를 구해냈다던가.
처음 들었을 때 말랑은 터무니없는 개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아마 아닐걸요. 그 정도 업적이면 말도 안 되게 강해야 정상인데. 미안한 말이지만… 유선우 씨는 격이
상당히 불안정하더라고요. 처음인 걸 감안해도요.”
“그래? 뭐, 확인해보면 알겠지.”
한주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초월자의 생전 기록을 보는 것 정도야 그에겐 간단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지구와 유선우라는 키워드를 넣어 검색하자, 한주의 망막에 하나의 사진이 표시됐다. 그냥 이 과정이 끝
이다. 이제 사진을 누르면 유선우에 대한 자료가 빼곡하게 나타나겠지.
“어라. 에러 뜨는데.”
하지만 정작 나타난 창은 접근 불가란 에러였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가볍지 않았다. 시스템에 락을 걸 수 있는 건 신계에 거주하는 존재들뿐.
즉, 까마득한 윗선에서 유선우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에러요?”
“기다려봐. 한 번 캐볼게.”
한주의 손놀림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수상쩍은 상황이라는 건 그의 의욕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아직 꼬리가 보였을 뿐이지만 냄새가 솔솔 났다. 꿀잼의 냄새가.
그리고 한주가 손을 멈춘 것은 5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어느덧 그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 죽었다는데.”
“네?”
“네가 말한 애, 살아 있다고. 이거 봐.”
한주가 시스템을 조작해 영상을 띄웠다. 영상에는 누워 있는 유선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게 살아 있는 거예요?”
주의 깊게 쳐다보던 말랑이 의문을 표했다.
확실히 시체라기에는 몸이 깨끗하기는 했다. 하지만 두 눈을 굳게 닫고 있어 잠든 것처럼, 또 죽은 것처럼
만 보였다.
“그렇다네. 죽기 직전에서 멈췄다더라.”
“말이 안 되는데…. 그럼 여긴 어떻게 왔대요?”
“몸이랑 정신이 떨어진 거지. 혼수상태라고 보면 돼.”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말랑이 보기에 유선우는 분명히 격을 갖추고 있었다. 미약하기는 해도 초월자의 반열에 들 정도로는. 그
러니 한주의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세워도 육체가 있으면 격으로 인정되지는 않을 텐데요. 제 눈이 잘못됐나요? 설마
저 고장 났어요? 저 폐기됩니까?”
“난 모르지.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한주도 그 이상의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애초에 신계는 폐쇄적인 탓에 교류가 극단적으로 적다.
아니, 정확히는 일방적인 교류라고 보는 게 옳다. 신들은 자신들의 피조물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걸 싫어
하니까. 그들은 그저 보고만 받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하겠죠?”
“그거야 보면 알겠지.”
한주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실로 오랜만의 기상이었다.
“내가 직접 봐야겠다.”
***
“진군하라!”
우렁찬 외침이 유선우의 귀를 찔렀다. 소란에 눈을 뜨니 펼쳐진 장소는 광대한 평원이었다.
‘여긴 또 어딘데?’
또다시 생소한 공간.
이쯤 되면 슬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오감은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였다.
눈에 들어오는 병장기를 쥔 군세.
코를 괴롭히는 비릿한 쇠 냄새.
평원에서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인간끼리가 아닌, 인간과 몬스터와의 사투라는
것.
‘어라. 좀 낯익은데.’
둘러보던 유선우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였다.
‘맞네. 아마 두 번째 출진이었지.’
새파랗던 시절에 참가했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었다. 그것을 눈치챈 유선우는 말랑의 설명을 떠올렸
다.
이는 분명 격이 안정되는 과정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전장이 나타난 것도 이해가 가능했다.
기억하기로 자신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첫 출진 때는 구석에서 토악질만 해
댔었으니까. 그건 업적은커녕 흑역사였다.
‘그럼 어디…….’
흥미가 동한 유선우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예상대로라면 자신의 모습이 있을 터였다.
다행히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래 난전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특별히 눈에 띄었기 때
문이다.
“죽어, 죽어! 돼지들아아아아아!”
전장의 최전선.
그곳에서 스무 살의 유선우는 욕설을 내뱉으며 오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는 액체가 가득했다. 대부분이 피였지만 눈물이 차지하는 비중도 상
당했다. 특히 잔뜩 부은 눈가가 보기에 퍽 안쓰러웠다.
“으아아아아아! 뒤져, 꺼져! 죽여버릴 거야. 카일, 망할 새끼야!”
오크의 시체를 쌓을수록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와 비례해 스물넷이 된 유선우의 부끄러움도 커져만 갔
다.
‘아, 쪽팔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광대놀음이다. 그야 이곳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전장이었으니까.
이 당시의 적군은 숫자만 많은, 그야말로 속 빈 강정이었다. 즉 경험과 명성을 쌓기에 딱 좋았다는 뜻이
다.
그러니 황족 측에서 유선우를 강제로 차출한 것. 때마침 욕먹고 있는 카일이 그 황족이다.
‘그래도 덕분에 자신감은 붙었었지.’
쓰게 웃은 유선우는 계속해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무력은 해봤자 강창민보다 나은 수준일까. 처참
하기까지 했으나 어째 눈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독기에 찬 모습이 그러했다.
그건 지금은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비린 혈향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전투는 어느덧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억상으로는 이대로 대승으로 끝날 터.
하지만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쿠우웅!
난데없이 거대하며 불길한 존재감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과거의 장면에마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끄으으윽!”
“크후흡….”
가해진 압력이 평원의 생명체들을 무릎 꿇렸다. 인간과 몬스터를 구분하지도 않는 압도적인 폭력. 유일
하게 저항해낸 이는 현재의 유선우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과거에 이러한 일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심상찮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심각성을 인지한 유선우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하늘에서는 무언가가 느릿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저건…….’
유선우는 그 형체를 제대로 시인하지 못했다. 검은 불꽃에 휘감겨 있는 탓에 속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자신과 엔라가 죽인 이름 모를 관리자였다.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정체는 알았다만 의문은 깊어질 따름이었다. 이 꿈은 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불
청객이 끼어들 요소는 없어야만 했다.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하네.’
경계 어린 기색으로 쳐다보던 유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담겨 있는 힘은 여전히 강대했다. 다만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동안 주시하자 느낌은 확신으로 변했다. 형체의 행동에서 지성이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인 것처럼.
머리를 굴리던 유선우는 끝내 답을 도출해냈다.
‘찌꺼기구나.’
관리자가 죽어서 남긴 찌꺼기.
이른바 격의 파편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내부로 흘러들어온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서로의 격이
충돌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쓸데없이 끈질기기는.’
죽어서도 민폐가 되는 놈이다.
혀를 찬 유선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찌 됐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