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화
낙원
“…낙원?”
소리 내어 곱씹어봐도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유선우의 상식 속 낙원은 진기한 동식물이 가득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하지만 펼쳐져 있는 광경은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상하다. 진짜 아무것도 못 들으셨나 보네.”
말랑은 유선우의 혼란을 알아봤다. 아무래도 이 새로운 주민은 정보조차 없이 낙원에 떨어진 모양. 이런 별난 케이스는 길고 긴 안내원 생에서도 처음이었다.
“이상하다뇨?”
“여기 오기 전에는 다들 기본적인 설명은 듣고 오거든요. 그다음부터는 제가 맡는 거고요.”
“글쎄요. 특별히 뭘 들은 기억은 없는데…….”
자신은 김한성과 죽도록 치고받은 뒤에 강신의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는 이 기괴한 장소에서 깨어났다.
그것이 유선우가 파악하고 있는 전부였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맞죠?”
“흠. 잠시만 가만히 서 있어 주세요.”
말랑이 의아해하는 유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투명한 시선에 유선우가 몸을 떨었다.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감각. 참을 만은 했지만,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는 거북했다.
다행히도 불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묘한 대치 끝에 말랑이 미소지었다.
“아니요. 자격은 있으십니다. 격은 미약하지만, 당신은 틀림없는 초월자예요.”
초월자. 벌써 여러 번 나온 단어다.
유선우는 자연스레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의문은 곧바로 해소되진 못했다.
“일단 따라오시죠. 이동하면서 알려드릴게요.”
“어디 가는데요?”
“유선우 씨의 거처가 될 곳이죠. 걸으면서 질문 정리해주세요. 일일이 묻고 답하긴 귀찮잖아요?”
말랑이 익살맞게 말했다. 그는 공중을 계단처럼 밟으며 나아갔다. 그 현상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말랑의 등을 바라보는 유선우의 감정이었다. 지금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경계심이 짙었다.
‘따라가도 되나?’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가야 하는가.
혹은 엔라든 아브나바든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가.
자문자답의 결과는 금세 나왔다. 답은 전자.
일반적으로는 설치면 단명한다지만, 이 경우엔 가만히 있어도 나아질 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유선우는 간격을 유지하며 말랑의 뒤를 걸었다. 걸음을 거듭할수록 혼란은 잦아들었고, 머리는 식어갔다. 차분해지니 이성적으로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지구가 아닌 건 확실해.’
부유하는 섬만 봐도 명백한 사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차원일 텐데, 431-9 차원과도 공통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도 이러한 애니메이션 같은 광경은 없었다.
‘초월자의 낙원이라고 했었지.’
저 개성적인 섬의 주인이 초월자일 터다. 실제로 이곳이 낙원인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
‘문제는 내가 왜 여기 있냐는 건데.’
말랑은 유선우가 초월자라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다. 불가해한 말이었기에 유선우는 착각이거나 거짓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진실임을 몸소 깨달아가고 있었다.
‘달라.’
머리가 냉정해지니 변화가 느껴졌다.
몸이 평소보다 가볍다.
무엇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김한성과의 일전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 그때보다도 눈앞이 선명했다.
뿌연 렌즈를 제거한 듯한 상쾌함. 여태 흐림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어째선지 걷는 것마저 즐거워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유선우의 변화를 눈치챈 말랑이 말문을 열었다.
“좀 진정하신 모양인데. 뭐부터 듣고 싶으세요?”
“제가 초월자라고 했었죠. 그게 뭡니까?”
말랑은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골랐다. 이런 설명은 그의 몫이 아니었기에 대답이 바로바로 나오지 않았다.
“음. 쉽게 말하면 인간의 상위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상위종이라면… 관리자요?”
“아니요. 관리자랑은 태생부터가 다릅니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격을 가지고 관리자로 태어났고, 초월자는 인간에서 본인의 힘으로 승격한 거죠.”
“아, 이해했어요.”
비유하자면 관리자는 금수저다.
반면에 초월자는 자수성가한 흙수저고.
뇌 내에서 변환을 마친 유선우는 격차에 혀를 내둘렀다. 소피아마저도 관리자에 비하면 천한 태생이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차이점은 많습니다. 궁금하세요?”
“그건 나중에 들을게요.”
우선 작은 의문은 덮어두었다. 관리자에 관해서는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천천히 들어도 되는 정보였다.
“근데 좀 뜬금없네요. 제가 어쩌다가 그, 승격한 거죠?”
“조건을 채우셨으니까요. 짚이는 게 있으실 텐데요.”
“아뇨. 딱히 없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격의 완성입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간단하기는 무슨,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유선우가 멍한 표정을 짓자 말랑이 끙끙거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업적이라고 보시면 돼요. 인간이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하고, 칭송을 받으면 그 자체가 존재의 힘이 되는 거죠. 그게 어느 선을 넘어가면 격이 완성되는 거예요.”
컷이 굉장히 높지만요. 한마디 덧붙인 말랑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향한 장소에는 불타오르는 섬이 있었다. 넘실거리는 불길만 보아도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저기 사는 여자는 하룻밤에 인간의 제국을 절반이나 불태웠죠.”
“섬뜩하네. 하룻밤이라니, 그게 가능해요?”
악마 같은 소행이다. 유선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도시 하나도 충분히 경악할 일이건만 절반이라니. 초월자는 하는 짓의 스케일도 남다른 모양이었다.
“상식으론 불가능하죠. 그리고 정말로 드물게도 가능한 분들이 이곳까지 오시는 거고요. 한 차원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합니다.”
“와, 경쟁률 봐라.”
유선우가 입을 떡 벌렸다. 여태 알던 가장 치열한 경쟁은 정자의 수정이었는데. 오늘부로 그것이 바뀌게 되었다.
“혹시 저 여자는 왜 그랬대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귀찮게 굴어서 그랬을 거예요, 아마.”
“……그냥 미친년 같은데요.”
“맞아요. 그 괴팍한 성격 덕에 더 위대한 격이 만들어졌죠.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미쳤는데요 뭘.”
말랑이 당신도 똑같아요, 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똑같다니. 유선우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졸지에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구태여 반박하진 않았다. 그런 영양가 없는 말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일단 이해는 했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마음껏 물어보세요. 그러라고 저희가 있는 거니까요.”
말랑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성가시다는 기색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초월자를 위해 태어난 안내원이 그 사명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 일각에선 감시라고도 말하지만, 말랑만큼은 그들의 감시자가 아닌 친구로 있고 싶었다.
이윽고 유선우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저, 죽은 건가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질문이기는 했다. 감각은 생생했고, 멀쩡하게 대화도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말랑의 말을 들으니 이곳이 마치 사후세계인 것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그 생각에 쐐기를 박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야 뭐. 죽었겠죠. 인간의 몸으론 아무리 칭송을 받아도 격이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육신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힘이 쌓여가는 거예요.”
말랑은 말하면서 유선우의 표정을 살폈다. 젊은 얼굴에는 의심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역시 자연사나 병사가 아닌 이상은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기록 조회해드릴까요?”
“…부탁드릴게요.”
“어디 차원에서 오셨죠?”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유선우는 잠시간 고민해야만 했다.
말랑에게 들은 대로라면 초월자가 되려면 격이 필요하고, 격은 곧 업적이다. 자신의 업적은 431-9 차원에서의 활동에 치중되어 있을 터.
그렇다고 그쪽 출신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긴 힘들었다.
“아마 지구일 거예요.”
“제일 핫한 데서 오셨네. 엔라님 구역 아녜요?”
“엔라… 아, 네. 아세요?”
흰머리 관리자의 이름이었던가. 유선우로선 익숙하진 않았지만 기억에는 남아 있었다.
“워낙 유명하시니까요. 엔라님 멋있으시죠. 기품 있으시잖아요.”
“기품이라. 이상한 환상이 있으시네.”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 기품 있는 엔라님의 볼기짝을 때려본 남자였다.
입이 근질거렸으나 애써 말을 참아냈다. 그녀의 명예와 말랑의 환상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하. 사실 전 실제로 뵌 적은 없어요. 다른 관리자분들도 다가가기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엔라가 아싸인 이유를 알겠네요.”
“엔라님이 친구 많을 상은 아니시죠. 가까운 것보단 멀리서 보고 싶다고 해야 하나.”
“어라. 말 알아들으시네.”
“네? 아, 적당히 비슷한 단어로 번역되거든요. 애초부터 저흰 다른 언어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둘은 한동안 잡담을 나누며 발을 옮겼다.
기약 없는 걸음이었지만 유선우는 지루해하진 않았다. 그와 말랑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이쯤이면 되겠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말랑이 이동을 멈췄다.
도착한 곳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근처에 섬이 없어 더욱 휑해졌다는 것 정도일까.
“잠시만요. 준비해드릴게요.”
어째선지 의기양양하게 말한 말랑이 키보드를 치듯이 허공을 두드렸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굉음과 함께 지면에 거대한 금이 갈라졌다. 아니, 금이라기보다는 칼로 자른 흔적이라는 편이 적합했다.
흔적은 계속해서 새겨졌다. 이윽고 땅이 마름모꼴로 잘려나갔다.
신기하게도 땅은 꺼지기는커녕 하늘에 붕 떠올랐다. 그리고 텅 빈 지면은 스스로 제 몸을 복구시켰다.
그건 유선우가 낙원에서 본 것 중에 가장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와. 설마 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네. 처음엔 다들 놀라시죠.”
리액션에 만족한 말랑이 손을 탈탈 털었다. 팔팔한 신인의 반응을 보는 건 수백 년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여흥이었다.
“그럼 갑시다.”
충분히 즐긴 말랑이 공중을 날았다. 유선우도 그 뒤를 따라 허공을 밟았다. 몸은 가벼웠고, 섬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여기서 생활하시면 됩니다. 잠깐 손 줘보세요.”
섬에 발을 디딘 말랑이 손을 내밀었다. 나름 친밀해졌기에 유선우는 미혹 없이 손을 잡았다.
[안내원 말랑이 당신에게 제232 섬의 소유권을 양도합니다.]
뒤이어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런 곳에서도 메시지를 보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유선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기도 관리자가 있나 보네요.”
“아뇨, 없어요. 초월자분들 외엔 저 같은 안내원이 몇 명 있는 게 전부예요.”
“없다고요? 이 메시지, 관리자가 보내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이거는 조금 복잡한 얘긴데…….”
말랑이 고심하며 낮게 숨을 흘렸다. 사실 설명하는 건 어렵지도 않다. 문제는 전해도 되는 정보와 전해서는 안 되는 정보의 구별.
“메시지는 그냥 시스템이에요. 관리자들도, 저희도 그걸 쓸 수 있는 권한을 하사받은 거죠.”
“……하사받아요?”
관리자보다도 위가 있다는 뜻.
유선우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관리자의 위를 신경 쓰기에는 자신의 발이 닿은 위치가 너무도 낮았으니까.
“대체 누구한테?”
“신계의 높으신 분들이죠.”
“신계라니, 그럼….”
“죄송한데 더 캐묻지는 말아주세요. 그분들에 대해서는 저희가 대답하기 곤란하거든요.”
답변을 거절한 말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면목 없다는 모습에 유선우가 입을 다물었다.
“우선은 하던 일부터 마칩시다.”
불편한 침묵이 흐르려 할 때. 말랑이 화제를 돌렸다.
“원하시는 건물을 상상해주세요. 세부적인 건 시스템이 알아서 보충해줄 겁니다. 지금까지 보신 걸 예시로 삼으시면 돼요.”
“죄다 너무 개성적이라 별로 예시는 안 되네요.”
유선우는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말하곤 한 건물을 떠올렸다. 그러자 무수한 빛의 알갱이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빛은 섬의 한 중앙을 뒤덮었다. 상상한 형태 그대로 건물이 빚어졌다.
빛의 기세가 죽은 건 30여 초가 흐른 뒤였다. 어느새 섬의 한복판에는 집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아이릴과 살던 집과 판박이인 외견.
처음 보는 지구 건물에 말랑이 휘파람을 불었다.
“신기하게 생겼네요. 근데 저걸로 충분하세요?”
“공간 남아봤자 쓸모도 없잖아요.”
“하긴. 비슷한 분들도 몇 계시죠. 혼자 넓은 데 살면 외롭다던가. 전 잘 모르겠지만요.”
말랑은 하여튼,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대략적인 설명은 마쳤으니 이제는 다른 일을 할 시간이었다.
“그럼 잠시 주무시고 계세요. 슬슬 피곤하실 텐데.”
“조금요. 어떻게 알았어요?”
“당연한 과정이니까요. 수면을 통해서 갓 태어난 격이 안정되는 거죠.”
그리고 수면의 주기는 점차 길어진다. 끝내는 온전한 초월자로 거듭나 잠을 잘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힘을 과도하게 소모하면 휴식을 취해야 하는 건 똑같지만.
“그동안 요청하신 정보는 구해둘게요. 아, 그리고.”
발을 옮기려던 말랑이 유선우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말랑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앞으로 고생 좀 하실 거예요.”
무려 삼백 년 만의 신인이시니까.
그리 말한 말랑이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