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화
조금 나쁜 새해
강신降神.
유선우는 그에 대해 적게나마 아는 바가 있었다.
관리자가 인간의 육체를 빌림으로 현실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릇이 되는 인간에겐 적잖은 부담이 걸린다는 것.
아니, 단순한 부담으론 끝나지 않을 터였다.
‘감당 못 한다고 했었지.’
유선우는 아브나바의 말을 떠올렸다.
그건 아마 농담도, 과장도 아니었으리라.
그때의 아브나바는 한없이 진지했었다.
하지만 그밖에는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친다 한들 서울은 불지옥이 될 테니까. 저 상태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지만, 놈에게 그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여기서 죽여야 한다.’
유선우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
한편 관리자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맹렬하게 반대합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당신이 죽을 것이라 말합니다.]
“내가 죽긴 왜 죽어.”
유선우가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짓을.”
유선우의 의도를 눈치챈 라오가 인상을 구겼다. 그가 손을 떨치자 화마가 피어올랐다. 천지가 불꽃으로 휩싸였다. 달빛마저도 어둠을 몰아내지 못했다.
커튼처럼 퍼진 검은 불꽃이 둥그렇게 유선우를 둘러쌌다.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라오가 주먹을 쥐자 불꽃이 일제히 유선우를 덮쳤다.
유선우는 고갈 직전인 마력과 마나를 전부 쏟아냈다. 검기는 금세 얼어붙어 형태를 띠었고, 불길을 막고자 분전했다.
결과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격이 담긴 불꽃은 냉기를 불태우며 검기를 찢어발겼다.
진행을 약간 더뎌지게 만들었을 뿐.
그러나 유선우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빨리 오라고! 안 와도 죽어!”
유선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확실한 죽음보다는 생사가 확실치 않은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만년설의 수호자가 눈물을 흘립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자신의 진명을 밝힙니다.]
[만년설의 수호자, 엔라와 당신의 인연이 한층 깊어졌습니다.]
“네 이름 안 궁금하니까 빨리 오라고! 한 번이라도 쓸모는 있어야지!”
한 맺힌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어느덧 유선우의 사지는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 있었다.
불꽃이 목숨을 앗아가기 직전.
메시지가 떠올랐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유선우의 정신이 순식간에 밀려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몸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마치 1인칭으로 찍은 영화를 보는 듯했다.
유선우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그를 뒤덮은 불길이 강풍에 노출된 것처럼 크게 일렁였다.
“……늦었나.”
라오가 탄식을 토해냈다. 유선우를 회유하고자 일부러 여유를 부렸건만. 그게 독이 되었다. 그가 혀를 찼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히죽 웃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됐어. 네년을 죽이면 이 귀찮은 짓거리도 끝이니까.”
라오는 유선우를 바라보며 투쟁심을 불태웠다. 내 아이들의 복수를 완수하리라. 그리 결심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릇이 삐걱거릴 정도로, 가까스로 망가지지만 않을 정도로.
격이 발출되자 대기가 굴복하듯이 주저앉았다. 반경의 모든 사물이 가루가 되어, 도심 한복판이 황량한 사막처럼 변했다.
불타는 사막이었다.
발밑의 어디도 불길이 치솟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주 만족스럽진 않다만, 이 정도면….’
라오가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그는 관리자치고는 젊으면서도 강자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만큼 패기가 넘쳤기에,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허풍쟁이 년 따위한테 질 리가 있나.’
엔라의 악명은 익히 들어봤지만, 전부 날조이며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차원을 통째로 얼린다는 둥.
수십의 관리자를 혼자 때려잡았다는 둥.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들을 믿을 리가 없었다.
복수와 더불어 허풍쟁이를 잡는다는 생각에 라오의 가슴이 부풀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난데없는 추위를 느꼈다.
“…뭐지?”
라오가 의아함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순간, 천지에 가득하던 불꽃이 소멸되었다.
흡사 불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듯했다.
그가 재차 불을 뿜기도 전에, 두 번째 변화가 나타났다.
쩌저저적!
아무것도 없는 지면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닿는 곳마다 서리꽃이 피어났다.
사막 같던 땅은 온기 없는 정원이 되었다.
라오의 어깨 언저리에서도 꽃이 만개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유선우를 쳐다봤다.
아니, 엔라를 봤다.
그녀의 낯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해 있었다.
“미안하구나.”
그리 말한 엔라가 자신의 손을 지그시 바라봤다. 화마에 휩싸였던, 또 유선우가 스스로 잘라냈던 손. 그건 투명한 얼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다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엔라의 시선은 이내 라오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에 시리도록 차가운 분노가 담겼다.
“제 분수도 모르는 버러지 같으니. 대가는 톡톡히 받아가마.”
“늙어빠진 년이…!”
라오는 힘의 제한을 더욱 느슨하게 풀었다. 그의 몸에서 먹물 같은 화염이 튀어나왔다. 화염은 수백의 맹수로 돌변했다.
“쿨럭!”
권능을 사용한 라오가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그릇이 깨져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기는커녕 비열한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릇 하나로 엔라를 죽일 수 있다면 충분히 싸게 먹히는 것이니까.
라오는 맹수들을 지휘하며 자신의 몸을 태웠다. 그의 신체는 금세 형태를 잃어, 불 자체가 되었다. 불은 맹수들을 뒤따라 엔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싸우는 것마저 저급하구나.”
엔라가 양손을 반쯤 들어 올렸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이 서로를 휘감아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똑같은 광경이 동시에 네 곳에서 펼쳐졌다.
넷의 소용돌이는 불길에 녹을지언정 기세가 죽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눈발이 나선에 더해져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격돌의 승자는 엔라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불꽃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불은 구체의 형태로 바뀌었다.
구체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불똥이 사방에 튀어 얼음을 녹였다.
그것은 여파일 뿐이었고, 회전을 거듭할수록 구체가 비대하게 커졌다.
“쓸데없이 끈질기도다.”
엔라가 손을 휘젓자 소용돌이가 구체를 향해 움직였다. 눈의 회오리가 사방에서 검은 태양을 덮쳤다.
둘은 시시각각 녹아가며 얼어갔다.
유선우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있었다.
‘그냥 괴물들이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인간과 관리자 사이에 이만한 격차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를 더욱 경악하게 한 사실은 양측 모두 전력이 아니라는 것. 그릇을 빌려 한정된 힘을 쓰고 있음에도 이 정도였다.
처음으로 벽다운 벽과 맞닥뜨린 기분.
물론 여태도 벽은 몇 봐왔으나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깨달음이 필요하다거나. 그런 종류의 벽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이만한 무위를 보고 있는데, 가슴이 떨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강해지고 싶다.’
유선우는 홀린 듯이 세상을 보았다.
소용돌이는 반쯤 사라졌고, 검은 태양의 표면에는 서리가 끼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관리자들의 힘은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그걸 본 순간, 유선우는 손을 뻗었다.
그 경지를 한 번이라도 엿보기 위해서.
- 야, 비켜.
안에서 들려온 말에 엔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잘못 들었다 여기기에는 음성이 너무도 또렷했다.
“무어라?”
- 비키라고.
“미안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관리자는 그리 쉽게 죽지….”
- 알아.
유선우가 말을 끊었다.
- 이젠 내가 할게. 힘만 빌려줘.
“말도 안 되는 소릴.”
들뜬 어조에 엔라가 칼같이 일축했다. 못할 건 없었으나 그녀는 유선우의 혼이라도 지켜내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저 이름 모를 관리자를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는 것이었다. 저렇게 날뛰었다가는 그릇의 영혼마저도 소멸당할 테니까.
실제로 김한성의 영혼은 진즉에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그걸 원치 않기에 천천히 깎아가고 있었건만. 정작 본인이 어리광을 부리니 엔라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네가 실수하면 난 더 많은 힘을 끌어와야 한다. 그건 다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이고.”
엔라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나 유선우의 태도는 여전했다.
- 실수는 무슨. 내가 너보다 더 잘 싸워.
“……농담할 때가 아니니라.”
- 장난 아니야.
진솔한 발언이었다. 연결이 되어 있기에 엔라 또한 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감이 과하구나.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낱 인간일 뿐이거늘.”
- 그러니까 주먹질 창질은 너보다 잘하지.
유선우가 감탄한 것은 관리자들의 힘이지, 기술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그들에게 기술 따윈 없었다. 단지 서로의 권능과 힘을 맞부딪힐 뿐.
그것은 태생부터 고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상위존재로 시작을 끊은 그들에게 기술은 필요치 않았다.
권능을 가다듬고, 간섭력을 끌어모으기만 해도 강해지기에. 땀내 나는 육탄전을 일삼는 이는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고는 했다.
즉 힘만 있다면 유선우가 밀릴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엔라는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잠시간의 주저 끝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뜻대로 하거라.”
짤막하게 말한 엔라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검은 태양에 몰아치던 소용돌이가 일제히 정지했다.
정적이 흐르고, 유선우가 눈을 떴다.
“후우우….”
유선우는 주먹을 쥐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의수였다. 위화감이 상당하긴 하나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글거리는 검은 불꽃이 새벽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유선우는 그것이 눈곱만치도 두렵지 않았다.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그는 여유로웠다.
느긋하게 체내를 관조했다.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아랫배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였다. 그간 쌓아온 마나가 우스울 정도로 강대했다.
‘나름 쌓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터무니없는 자만이었다. 관리자와 비교해보니 종이컵 한 잔과 바다의 차이와도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분명히 영혼까지 얼릴 법한 냉기였으나 어딘가 포근했다. 모순되게도 냉기의 이면에는 온기가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유선우는 그것을 무어라 일컫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깃든 관리자의 격. 엔라의 생명, 그 자체이자 본질이었다.
‘기분 되게 이상하네.’
유선우가 피식거리고는 주의를 돌렸다. 큰소리친 만큼 일은 똑바로 해야 체면이 살 터였다.
그는 한껏 다가온 태양을 보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콰드드득!
빙판이 갈라졌다. 밑에서부터 꼬챙이가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생김새다.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길이는 기괴하게 길다.
하지만 유선우에겐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창으로 보였다. 담겨 있는 힘이 눈에 선했다.
‘할 만해.’
유선우가 마나를 써온 기간은 짧았으나 마력은 아니었다. 그는 마력 운용에 있어 어떠한 마법사보다도 뛰어났다. 마나와 마력이 상통하는 면이 큰 만큼, 관리자의 힘을 사용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꼬챙이를 쥔 유선우가 크게 발을 굴렀다. 지면이 요동쳤다.
멈춰 있던 소용돌이가 형태를 달리했다. 이윽고 소용돌이는 네 자루의 창이 되었다. 용솟음치는 나선형의 창대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았다.
지면부터 이어진 창끝이 검은 태양에 꽂혔다. 창끝에서 얼음이 퍼져 태양을 뒤덮었다.
태양이 움직임을 멈췄다. 유선우가 공중을 밟았다. 신형이 쏘아지면서 그의 온몸에 내려앉은 서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흩뿌려진 서리는 발자국처럼, 또 길처럼 천지를 이었다.
하늘에 도달한 유선우가 창을 내질렀다. 창끝이 태양의 한가운데를 꿰어냈다. 그대로 회전시키자 창에서 방출된 한기가 내부를 냉각시켰다.
불이 얼어붙는다. 그 불가해한 현상이야말로 격의 손상을 알리는 증거였다.
‘빌어먹을.’
라오는 위험을 감지했다. 이대로는 손상을 넘어 아예 존재가 소멸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그가 힘을 쥐어짜 남은 화염을 압축시켰다. 한 줄기 불길이 얼음의 표면을 꿰뚫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억, 허억!”
지면에 착지한 라오가 신체를 재구성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곧바로 눈을 감았다. 강신을 풀어 도주하려는 것이었다.
파지직!
하지만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조금 전과 같은 스파크가 튀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이런 개 같은 년이!”
라오가 혼란에 찬 외침을 내뱉었다. 그는 몸부림을 쳐봤으나 간섭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돌연 몸뚱어리가 휘청거렸다.
“쿨럭!”
하늘에서 날아온 꼬챙이가 라오의 가슴을 꿰뚫었다.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전신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아아아아아악!”
라오가 미친 듯 절규했다. 아무리 권능을 제한했다 해도 격은 온전히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격이 깨져가고 있다.
유선우가 라오에게 다가갔다.
“야.”
“살려줘. 앞으로 다시는 넘보지 않겠다. 그러니 제발!”
애원하는 모습에 유선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 안에 새로운 창이 생겨났다.
“엿 먹어, 인마.”
“뭣…!”
푸욱!
유선우가 라오의 가슴에 창을 찔러넣었다. 꺼먼 피가 터져 나옴에도 개의치 않고 손을 움직였다.
창을 뽑아 다시 안구를 찔렀다. 입안을 찔렀다.
상처가 늘어난다. 얼음이 시시각각 퍼져간다.
머잖아 라오의 몸이 완전히 빙결되었다.
유선우가 마지막으로 창을 휘둘렀다.
머리의 정중앙부터 내리긋자 라오가 반쪽이 되어 갈라졌다. 유선우는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잘도 살려주겠다, 새끼야.”
중얼거린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아침은 멀었는지 달빛만이 아스라이 빛났다.
이제는 대가를 치를 차례다.
유선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