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화
조금 나쁜 새해
이변이 벌어지자 유선우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졌다. 끝이라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다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게임도 아니고. 웬 2페이즈야.’
유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땅을 박찼다. 부활이든 변신이든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손을 뻗자, 전봇대에 처박혀 있던 창이 매섭게 날아왔다.
유선우는 손쉽게 창대를 잡아챘다. 그가 물 흐르듯이 창끝을 내리찍었다.
김한성의 머리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그것으로 끝이 날 터였다.
하지만 정작 벌어진 광경은, 예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김한성의 몸을 휘감은 화염이 창을 막아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게걸스럽게 창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유선우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시선을 떨궈 보니 창의 절반이 녹아 있었다. 형태를 바꿔봐도 상태가 돌아오진 않았다.
‘이건 또 왜 이래.’
마치 무기 자체가 손상당한 듯했다.
형태뿐만 아니라 무기가 지닌 능력의 본질이.
영문을 알 수 없어도 심상찮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유선우는 눈을 부릅뜬 채 김한성을 주시했다. 진작 멈췄어야 할 몸에서 끊임없이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공기를 먹어치우며 세를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한성의 몸은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지켜보던 유선우는 숨을 삼켰다.
그는 불꽃에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그것을 감지하자, 메시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후퇴를 지시합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달아나라고 외칩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수십이 족히 넘는 메시지.
말이야 전부 달랐지만 도망가라는 의미였다.
유선우의 직감 또한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성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내가 도망가면 어떻게 되지?’
달아난다면 이후에 ‘저것’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
애초에 도주를 할 수나 있을까.
무수한 가정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켰다. 그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광범위하게 퍼지던 흑염이 다시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불길은 김한성의 안구와 콧구멍으로. 또 입안과 구멍 난 가슴으로 들어갔다.
두근!
심장의 고동이 크게 울려 퍼졌다.
유선우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유선우는 원초적인 공포를 느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을 때.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이제 막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였다. 이내 김한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기가 탁한데. 아주 마음에 들어.”
김한성의 입가에는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유선우에겐 그마저도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입도 벙긋 못하고 김한성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깃든 누군가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심연의 인도자, 라오는 유선우의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히죽 웃기만 했다.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는 아이 같은 미소였다.
“너, 인간치곤 제법 하더군. 소문만 들었는데 듣던 이상이야.”
유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도주와 전투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도주를 명령했으나, 저것을 서울에 풀어두는 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반응이 없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오가 혀를 찼다.
“배짱은 부족한가. 어쨌든 이 그릇보다는 훨씬 낫다만.”
그는 양손으로 자기 몸을 더듬어댔다.
“아니, 이것도 감지덕지겠지. 인간 주제에 간섭력을 쓰고 다니는 건 아니꼽지만… 덕분에 이렇게 강림까지 했으니.”
말한 뒤에는 유선우를 향해 느긋하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빠지직!
세 걸음을 뻗자 라오의 주위로 백색의 스파크가 튀었다. 유선우를 보호하기 위한 관리자의 발악이었다.
“꺼져라. 늙다리 년.”
발걸음을 제지당한 라오가 손을 휘적거렸다. 손에서 뿜어진 검은 불꽃이 스파크를 휘감았다.
라오의 발을 묶은 스파크의 기세는 시시각각 죽어갔다. 쓸만한 육체에 강림한 이상, 이러한 간섭 따위는 같잖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유로워지기에 앞서, 유선우가 정신을 다잡았다.
‘등신 같은 새끼.’
유선우는 놈을 두려워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아니, 겁에 질렸다는 것보다는 움직이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에게 공포는 달밤처럼 익숙했다.
처음 창을 잡았을 때도.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도.
자기보다 강한 이와 겨룰 때는 항상 두려웠다.
그러니 지금도 상대가 누구인지, 얼마나 강한지는 중요치 않았다.
유선우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도망은 개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놈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유선우가 땅을 박찼다. 고물이 된 창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리의 관절이 비틀린다. 팔의 근육과 혈관이 끊어진다. 마력의 격류를 버티지 못한 탓이다.
상관없다.
다리는 제 역할을 마쳤다. 창은 휘둘러졌다.
한 줄기의 섬광이 어둑한 도로를 가로질렀다.
얼어붙은 검기가 창의 궤적을 따라갔다.
라오의 머리를, 어느덧 메워진 가슴을 향해서.
“쓸데없는 짓을.”
라오에게는 그것이 벌레의 발버둥처럼 보였다. 그가 가볍게 손을 뻗어 창을 받아냈다. 전신에서 솟구친 불길이 검기와 얽혀들었다.
콰드드득!
라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창끝이 그의 손을 파내고 있었다. 아주 느릿했지만, 그건 분명히 불길을 뚫어내 자신의 몸에 닿았다.
“하핫!”
라오가 광인처럼 눈을 부릅뜨고 폭소를 터뜨렸다.
“마력인가? 아니, 아닌데. 하물며 간섭력도 아니야. 이건….”
“입 닫아.”
낮게 내뱉은 유선우가 다음 공격을 이행했다. 시시각각 가루가 되어가는 창을 억지로 보수하며 팔을 뻗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더라도 조절 없이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라오의 손이 창대를 쳐냈고, 창끝을 막아냈다.
불길이 검기를 잠재우며 얼음을 녹였다.
라오와 비교하면 유선우는 명백한 약자였다.
유선우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나 창을 멈추지 않았다.
‘익숙해.’
그의 인생에 패배는 많고 많았다.
고수는커녕 견습 기사에게도 져봤다.
심지어는 평범한 병사에게도 져봤다.
패배를 통해 강해진 그가 좌절할 이유는 없었다.
휘두름의 횟수가 다섯 번을 넘어가는 순간.
유선우는 문득 고요함을 느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도, 얼음이 으스러지는 소리도 어딘가 낯설고 멀었다.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창을 휘두르는 팔이 보였다.
‘아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분명 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자세였음에도.
완성하고 난 뒤로 꺾지 못한 상대가 없었고, 스스로 완벽하다 여겼음에도.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쓸데없이 요란하며 비효율적인, 구멍투성이로만 보였다.
그러니 달리할 수밖에.
다행히도 나아갈 길은 눈에 선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유선우의 눈앞에 벽은 없었다.
단지 정상을 착각하고 있었을 뿐.
거듭할수록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일곱 번째 찌르기는 벼락처럼 날카로웠다.
다음은 잔잔한 물처럼 조용했고, 머잖아 화마(火魔)처럼 맹렬해졌다.
스무 번째에 이르러서는 안개처럼 흐릿해졌다.
마침내 스물일곱 번째에 이르러서.
그 모든 묘리가 한 데 섞였다.
유선우가 내지른 창이 라오의 손을 찔렀다.
창끝에서 몰아친 칼바람이 공간을 찢었다.
파편이 된 공간은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불길을 몰아냈다.
한 번의 휘두름이 무수한 창격을 만들어냈다.
그 모든 공격에 유선우의 창술, 그 정수가 담겨 있었다.
라오는 그 전부를 막아냈다. 하지만 창끝이 닿을 때마다 손바닥에 생긴 구멍이 깊어졌다.
피와 살점이 흩뿌려진다. 라오의 것이며, 유선우의 것이었다. 창을 휘두르면서 그의 오른팔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유선우는 창을 놓지 않았다. 라오는 검기와 불길 속에서 유선우의 눈을 들여다봤다. 눈동자에는 지독한 투쟁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안타깝군. 역시 너를 대리자로 삼았어야 했어.”
유선우는 말없이 창을 휘둘렀다. 아니, 그의 손에 쥐여 있는 건 창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얼음쪼가리였다.
창은 진작 가루가 되어 있었으나 필요치 않았다.
그가 창이었으며, 그가 쥔 모든 것이 창이었다.
얇은 얼음의 송곳은 끝끝내 라오의 오른손을 뚫어냈다. 그리고 머리에 닿기 전에, 라오가 왼손을 들어 유선우의 팔을 잡았다.
그를 방해하던 스파크는 멎은 지 오래였다.
“죽여두는 편이 낫겠지.”
라오는 실로 안타까웠다. 그는 강자를 존중했고, 유선우는 존중받아 마땅한 강자였다.
그러니 더더욱 살려둘 수는 없었다. 지구를 불사르는 것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기에.
“그래도 너라면 낙원에는 닿을 수 있겠지.”
“혼자 뭐라는 거야. 별 버러지 같은 게.”
욕설을 내뱉은 유선우가 비교적 멀쩡한 왼팔을 휘둘렀다. 라오의 팔이 아니라, 붙잡힌 자신의 팔을 향해서.
놈의 팔을 자를 수 없으니 이쪽이 나았다. 어차피 망가진 오른팔은 이제 쓸모도 없었다.
푸확!
팔꿈치만 남은 오른팔에서 대량의 혈액이 터져 나왔다. 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유선우가 땅을 박차 거리를 벌렸다. 그는 상처 부위를 얼려 출혈을 막아냈다.
“허억, 허억…….”
유선우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몇 걸음 남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바라마지않던 무(武)의 완성.
어느새 그것이 한없이 가까워져 있었다.
‘마나가 부족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헛다리였다.
인간에게 있어 마나는 빌려온 힘, 그 이상의 의미를 갖추지 못했다. 인간의 완성은 오로지 본신의 무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자신은 약했을 뿐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는 강했겠지. 저쪽에도, 지구에도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자만에 빠져버렸다.
부족한 것은 외적인 무언가라고만 생각했었다.
창술을 더 가다듬을 수는 있었지만, 그를 통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었다.
‘병신 같으니.’
유선우는 잘못을 인지했다. 인정했다.
그러자 시야가 개였다.
충분히 선명하다 여겼던 눈앞이 더욱 맑아졌다.
뛰어나다 여겼던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라오를 바라봤다.
놈은 아직 멀쩡했고, 불길한 불꽃도 여전했다.
하지만 놈을 보는 유선우의 눈에는 두려움이 지워져 있었다.
“야.”
“음? 생각이 바뀌었나?”
“그래. 제대로 바꿔먹었지.”
유선우가 빙긋 웃었다.
“내 팔은 이 모양이고, 솔직히 지금 봐도 못 이기겠다 싶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자신감이 결여된 말. 또 진심이기도 했다.
지금의 유선우는 라오가 두르고 있는 격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는 말은 아니다만 확실히 괜찮게 들리는군.”
“그래서 말인데.”
유선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라오를 죽일 방법을 딱 한 가지 알고 있었다.
“나도 교대해야겠다.”
“…뭐라고?”
이이제이.
관리자는 관리자가 죽이면 될 뿐이다.
“빨리 와. 쓸모없는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