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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87화 (87/179)

제 87화

조금 나쁜 새해

김광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빛이 번쩍거리지 않나, 시체와 연결이 끊어지질 않나.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래서 살펴보려 1층까지 내려가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뭐지?’

눈앞에 있는 여자. 피로 물든 갑주를 입은 여자를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본능이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달아나라고.

절대로 맞서서는 안 된다고.

김광수는 직감에 따라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발도 떼기 전에, 서늘한 음성이 흘렀다.

“정화하겠습니다.”

말에 반응하듯이 사슬이 나타났다. 천장에서 둘, 바닥에서 둘. 넷 모두가 일제히 김광수에게 쏘아졌다.

“이런 씹…!”

김광수가 자신의 몸을 마나로 감쌌다. 그의 신체가 검은 안개로 변해 허공을 떠다녔다.

‘이대로 튀면 돼.’

김광수가 1층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황금빛의 사슬 하나가 안개의 발목을 잡았다.

기체를 속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에 당황한 건 김광수뿐이었다. 아이릴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휘적거렸다.

휘둘러진 사슬이 안개를 층계참에 처박았다. 뒤이어 사슬 세 개가 더 달라붙자 김광수의 몸이 재구성됐다.

“끄아아아악!”

몸을 덮친 고통에 김광수가 비명을 터뜨렸다. 마치 영혼이 불타는 듯했다. 유선우에게 머리가 터졌을 때보다도 극심한 고통이었다.

상극에 있는 상성이 원인이었다.

물론 마나는 마력이나 신성력보다 우위에 있는 힘이다. 아이릴과 김광수가 동격이었다면 비명을 지르는 건 아이릴이 되었을 터.

그러나 그녀는, 김광수가 비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너, 너! 누구야, 빌어먹을 년아!”

김광수는 눈물과 콧물을 죽죽 흘려댔다. 그러다가 눈이 여자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부자연스럽게 긴 머리. 그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설마 유선우가 죽였던….”

“닥쳐.”

돌연 아이릴의 목소리에 깊은 감정이 서렸다. 뜨겁디뜨거운 분노였다.

“네가 부를 이름이 아니야. 벌레 같은 것.”

사납게 내뱉은 아이릴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안 돼. 그만, 그만! 아악, 아아아악!”

김광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마나도 내뿜어봤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사슬을 약간 좀먹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해와 같은 신성력에 밀려 사슬을 끊어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망할 년아아아아아!”

김광수가 침을 튀겨가며 외쳤다.

그리고, 그의 사지가 통째로 뽑혀나갔다.

피가 콸콸 뿜어져 주변을 적셨다. 계단이며 벽이며 천장이며, 사방에 핏자국이 들러붙었다.

치지직!

부식성을 가진 핏물이 건물을 녹였다. 그러나 아이릴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진즉 보호막을 쳐뒀기 때문. 흑마법사의 혈액은 죄다 이따위였기에 그녀로선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술사를 손쉽게 처리한 아이릴이 등을 돌렸다.

‘여기까지만 하자.’

아직 건물 내에 남아 있는 적들은 많을 터. 하지만 하나하나 잡으러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유선우가 부탁한 일은 언데드의 처리뿐이었고.

“으, 피 냄새.”

아이릴이 질색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는 때였다.

부글부글!

뒤에서 거품이 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예기치 못한 일임에도 아이릴은 담담했다. 다시 살아나면 죽을 때까지 죽이면 될 뿐이다.

‘귀찮게.’

그녀는 한숨을 쉬며 등을 돌리려 했다.

쿠우웅!

형용할 수 없는 거력이 아이릴의 몸을 짓눌렀다. 그녀는 저항도 못 한 채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갑자기 뭐야.’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지 못했다. 숨조차도 쉬기가 힘든 압력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아이릴을 당황케 한 게 있었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그러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감.

맹수의 앞에 벌거벗은 채 선 것만 같은 공포.

이성과 본능이 모두 위험을 알려왔다.

‘뭐가 있는 거야…?’

단지 몇 초가 지났을 뿐. 그런데도 아이릴에겐 이 시간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의 온몸에는 땀이 가득했다.

그때, 기괴한 목소리가 공간을 뒤덮었다.

- 그릇…이 부족…한가.

짧은 한마디임에도 말이 뚝뚝 끊어졌다. 혐오스러운 목소리다. 아이릴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능한 일이라곤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게 전부였다.

머지않아 아이릴의 눈가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흘렀다. 그녀는 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릿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거대한 존재감을 모를 리가 만무했다.

서서히 다가온 그것은, 끝끝내 아이릴의 목에 닿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그렇다면 실로 허무한 죽음이다. 아이릴의 머릿속에는 그러한 비관적인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에서 감촉이 사라졌다.

- 나…기억…하겠다…. 색욕…의 사도….

그것의 목소리는 차츰 늘어졌고, 또 작아졌다.

십여 초가 넘도록 이어진 말이 끝맺어지자마자 존재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푸확!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액체가 아이릴의 온몸을 적셨다.

“허억, 허억!”

그제야 그녀의 숨통이 트였다. 대리석마저 녹이는 피가 등에 끼얹어졌으나, 고통 따위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쿨럭! 우웨엑, 우웨에엑!”

숨을 몰아쉬던 아이릴이 속을 죄다 게워냈다. 질퍽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그녀는 네 번을 내리 토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콜록! 커흑, 커흑!”

위액이 역류해 목청이 따끔거린다. 입안이 시큼하다. 아이릴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신성력을 뿜어냈다. 달라붙은 피가 정화되어 부식력을 잃었다.

“이게 뭐야. 흐윽.”

그녀는 훌쩍거리면서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계단의 층계참에는 시체가 없었다.

살점과 장기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널브러져 있을 뿐. 자그마한 조각뿐이고, 새끼손가락보다 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행히도 아이릴에게 이러한 광경은 익숙했다. 그녀는 이단자들의 고문도 숱하게 해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꼴 좋다. 벌레 놈.’

콧방귀를 뀌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시도는 몇 번이나 실패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쏟은 후에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대체 뭐였을까.’

난데없는 봉변이었다. 두 번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감각. 상상만 해도 솜털이 서는 듯했다.

아이릴은 벽을 짚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선우.’

불길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건 마냥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

유선우가 땅을 박찰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청일에서 벗어난 그는 넓은 공간을 찾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그동안 피난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집안에 박혀 있거나.

파직!

전류가 튀는 소리가 유선우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는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방금까지 있던 곳으로 벼락의 줄기가 지나갔다. 벼락은 그대로 허공을 가로질러 건물을 반파시켰다.

유선우가 눈을 찌푸렸다. 바로 앞에서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는 억지로 발을 멈춰 창대로 주먹을 후려쳤다.

공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먹과 창이 뒤섞여 육탄전이 행해졌다.

공방의 여파만으로도 주변의 유리창이 깨졌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김한성이 두 걸음을 물러났다.

우우우웅!

뇌기의 구슬이 허공에 떠올랐다. 수십의 구슬이 유선우의 사방을 둘러쌌다.

‘마나가 무슨 끝도 없네.’

유선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김한성이 가소롭다는 듯 입가를 들썩거렸다. 허공에서라면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리라. 그리 생각한 그는 양손을 모은 채로 앞으로 내밀었다.

뇌기가 장막처럼 펼쳐져 유선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선우가 선택한 건 방어도, 회피도 아니었다.

창끝을 김한성에게 조준한 채 허공을 박찼다. 마력으로 공중에 발판을 만들어내는 것. 그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창을 앞세운 유선우의 신형이 유성처럼 쏘아졌다. 김한성은 벗어나려 했으나,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모르는 새 발목이 얼어붙어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김한성은 헛숨을 집어삼키면서도 곧바로 방어에 착수했다. 마나를 주먹에 집중시키자, 주위에 강렬한 스파크가 번졌다.

콰아앙!

창과 주먹이 격돌했다. 힘을 겨루면서, 김한성은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유선우의 창에 담긴 마나는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다.

예상대로 창끝은 전류에 밀리기 시작했다. 한기는 뿜어지는 족족 뇌기에 침식당했다. 창을 뒤덮던 얼음도 죄다 가루가 되었다.

마침내 벼락이 유선우를 덮치려는 때였다.

삐걱!

묘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새파란 연기가 유선우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연기는 급속도로 짙어지며, 반쯤은 흑창에 휘감겼다.

다른 반은 수백의 창으로 빚어졌다. 모든 창이 일제히 김한성에게 달려들었다.

‘망할.’

김한성은 낯을 구기며 꽁무니를 내뺐다. 유선우의 창은 목표를 잃어 지면에 꽂혔다.

아스팔트가 종잇장처럼 꿰뚫렸고, 큼직한 구덩이가 파였다. 운석이 떨어진 흔적과도 같았다.

‘방금 건 뭐였지?’

김한성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유선우를 쳐다봤다. 연기구름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아도 존재감은 여전했다. 아니, 존재감은 방금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여지를 남겨뒀었나.’

김한성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에게도 아직 여유는 있었다. 마나를 물처럼 썼음에도 7할 이상은 남아 있었고, 화력을 높이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김한성은 갈수록 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강자와의 목숨을 건 전투. 성장하기에 이만큼 알맞은 무대는 없었다.

‘승산은 넘친다.’

자신감에 찬 김한성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연기구름 너머에서 시퍼런 섬광이 번쩍거렸다.

김한성은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옆구리에 통증이 내달렸다. 무언가가 몸을 스쳐 간 것이었다.

“후욱…!”

김한성은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오감을 곤두세우며 전류로 몸을 휘감았다.

번쩍!

자세를 바로잡자마자 두 번째 섬광이 터졌다.

이번에는 김한성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터무니없는 속도와 위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김한성은 피해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보호막을 씌우듯 전류를 방출시켰다. 여유 따위는 일순간에 사라졌고,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쿠웅!

두 번째의 충격이 김한성을 덮쳤다.

어찌어찌 막아내기는 했으나 정신이 혼미했다.

그것을 지켜본 유선우가 혀를 내둘렀다.

‘단단한데.’

공방이 뛰어난 동시에 속력마저 탁월하다. 이런 강적은 그의 기억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보다 성장한다면 유선우로서도 승패를 점치기가 힘들어질 터. 반드시 지금 죽여야만 했다.

유선우가 창을 으스러지라 쥐었다. 그의 온몸에선 여전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몸에 부담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대로 전투를 속행하면 조만간 팔이 찢어지리라. 하지만 회복하면 그만인 일이다.

‘아이릴은 언제 오려나.’

유선우는 창을 겨드랑이까지 당겼다. 그가 공격을 이어가기 전, 김한성이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빠지지직!

검은빛의 꼬리가 도로를 가로질렀다. 발자국이 새겨지듯이 지면에 수천 갈래의 금이 갈라졌다.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전류는 모든 줄기가 팔뚝만큼 굵었고, 속도는 유선우의 찌르기와도 얼추 비슷했다.

김한성의 한계를, 제어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단순히 정신을 놓고 일직선으로 달릴 뿐.

방어에만 전념했다간 결말이 훤했기에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능력이 사기라니까.’

유선우는 속으로 탄식했다. 경지가 일천해도 고삐를 풀고 능력을 쓰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이전에 이성결이 자신의 동작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면서 능력을 썼었던 것이 좋은 예시다. 무인의 입장에서 이는 편법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상대하긴 쉽지.’

이런 폭주에는 어울려줄 이유가 없다. 유선우는 팔을 내려놓고 보법을 밟았다.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흐트러졌다.

김한성은 몇 번을 달려들었으나 유선우의 손끝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전류는 잔상과 애꿎은 건물만을 무너뜨릴 뿐이었다.

직선적인 움직임의 한계였다. 유선우의 경지는 단순무식한 힘에 굴할 정도로 하찮지 않았다.

“허어억!”

머지않아 김한성이 발을 멈추고 헐떡거렸다.

‘빌어먹을.’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양손을 휘적거렸다. 바닥에 잔류하던 뇌기가 일제히 꿈틀거렸다.

김한성이 손을 들어 올려 벼락을 떨구려 했다.

크고, 빈틈이 많은 동작.

실책의 결과는 본인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세 번째 섬광이 달렸다.

앞선 두 번의 휘두름과는 또 다른 일격.

얼음으로 뒤덮인 창이 유선우의 손을 떠났다.

던져진 창은 김한성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푸욱!

“우웁.”

김한성의 입은 비명 대신 핏물을 토해냈다.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그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죽음이 다가온다. 끝을 느끼면서도 김한성의 눈은 유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은 추웠으나 머리는 뜨거웠다.

고작 이런 결말을 원해서 관리자와 손을 잡은 게 아니었다.

전부 잃었음에도 바라는 미래는 있었다.

아니, 잃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이대로 불명예와 치욕만을 겪으며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김한성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투쟁심을 불태웠다. 그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메시지를 보았다.

[심연의 인도자가 당신의 의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심연의 인도자가 자신의 진명을 밝힙니다.]

[심연의 인도자, 라오와의 인연이 한층 깊어졌습니다.]

[심연의 인도자가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곧이어 김한성은 자신의 내부에 무언가가 차오름을 느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감각에 몸을 맡겼다.

쿠우우웅!

예고 없이 대기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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