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화
조금 나쁜 새해
김한성은 눈을 부릅뜬 채 유선우를 응시했다.
두른 분위기와 창을 쥔 자세, 걷는 걸음걸이.
여유로워 보였으나 찌를 틈이 보이지 않았다.
김한성이 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돌연 유선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콰드드득!
먹색의 창이 내질러져 섬뜩한 소리를 냈다. 창이 지나간 곳은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일격을, 김한성은 감지했다. 전신에 검은 번개를 두른 그가 유선우의 뒤에서 나타났다.
인지 밖의 속도였다. 김한성은 대리자가 된 후로 힘을 제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직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는 지금의 성취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부웅!
안광을 번뜩인 김한성이 일권을 쏘아냈다. 벼락을 머금은 주먹의 기세는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한 점으로 집중된 전류가 유선우의 심장을 노렸다. 등을 돌리고 있던 유선우가 신묘한 발놀림을 펼쳤다.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흔들렸다. 무수한 잔상이 생겨나고, 전류에 노출되어 흐트러졌다. 잔상이 모두 지워졌으나 유선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냐.’
김한성은 최대한 시각의 의존도를 떨어뜨렸다. 오로지 공기의 흐름과 본능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전투에서 한낱 인간의 시각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문득 발아래에서 공기가 흐트러졌다. 강가에 돌을 던진 듯 작은 파문. 미세한 변화를 잡아챈 김한성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쐐액!
공기를 찢는 매서운 소리가 김한성의 고막을 찔렀다. 그의 두 걸음 앞에서 푸른 선이 그어졌다.
선은 금세 수를 불려 다발이 되었다. 그러고도 끝없이 증식해 머잖아 선보다 면에 가까워졌다.
주위로 칼바람이 몰아쳤다. 김한성의 옷자락이 갈가리 찢어졌다. 살갗마저도 종잇장처럼 베여 핏물이 뚝뚝 흘렀다.
김한성은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힘을 끌어올렸다. 검은 전류가 사방으로 튀며 힘이 퍼져나갔다.
아직도 허공에 잔류하는 짙푸른 창격. 전류가 그것을 물어뜯고, 유선우에게 덮쳐들었다.
유선우의 발은 벼락보다 빠르지 못했다. 일찌감치 회피를 포기한 그가 마나로 맞서 대응했다.
쩌적!
뿜어져 나온 한기가 만물을 얼리기 시작했다. 정순한 냉기와 탁한 뇌기가 사투를 벌였다.
소모전이 벌어지던 도중 유선우가 손을 떨쳤다. 소리 없이 뻗어진 검기가 김한성의 어깨를 뚫어냈다.
“끄윽…!”
김한성은 이를 악물고 오른발을 굴렀다. 발밑이 푹 패이며 전류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내 모든 줄기가 다시금 한곳으로 모이더니, 하늘 위로 뇌전이 솟구쳐 올랐다.
쿠르릉!
굉음에 이어 하늘의 달빛이 가려졌다. 낌새를 알아챈 유선우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핫.”
꽁무니 빼는 모습에 김한성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 쏜살같이 유선우를 추격했다.
유선우는 발을 멈추지 않은 채 집중력을 극도로 가다듬었다. 마력과 마나가 창끝에 압축되었다. 그대로 허공을 찔러 내리긋자 공간이 어긋났다.
위험을 느낀 김한성이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갈라진 공간을 중심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 닿는 모든 사물을 먼지로 만들었다.
추격을 떨쳐낸 유선우는 재빨리 호신강기를 펼쳤다. 김한성이 뇌전을 쏘아낸 후로 새벽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번쩍!
직후에 검은 낙뢰가 유선우에게 떨어졌다. 번개는 유선우의 호신강기를 걸레짝처럼 찢었다. 뒤늦게 울려 퍼진 뇌명(雷鳴)이 그 충격을 천하에 알렸다.
연기가 주위에 잔뜩 끼어 시야를 방해했다. 수 초가 지난 뒤에야 매서운 칼바람이 정적과 연기를 몰아냈다.
“후욱!”
유선우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의 옷은 반쯤 불타 있었다. 몸에도 그을음이 가득했다.
‘아프다.’
전신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었다. 이만한 상처를 입어본 게 과연 얼마 만인지. 적어도 근 1년간은 이만큼 당해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유선우의 정신을 채운 것은 위기감이 아니었다. 횃불처럼 일렁이는 투쟁심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하기야 S급 헌터가 대리자가 된 것이다. 간단하게 끝난다면 도리어 허무했으리라. 유선우가 창을 고쳐잡았다.
***
박아연은 차량의 룸미러를 힐끔 곁눈질했다. 뒷좌석에는 아이릴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무표정했다.
‘원래는 이런 사람이구나.’
전에 봤었던 천진난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마 그건 유선우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으리라.
‘선우 씨는 어떻게 됐을까.’
아까 전, 유선우는 본사로 향한다는 말을 남긴 채 바로 사라졌다. 직접 서울까지 뛰어가겠다는 것처럼.
박아연에게는 그게 무모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움직임을 눈으로도 좇기가 힘들었으니까. 지금쯤이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괜찮을 거야.’
박아연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냈다. 그녀는 유선우보다 강한 이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믿을 뿐이다.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기를.
운전대를 잡은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차가 도로를 달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오래간 이어지던 침묵이 끝을 고했다.
“멈춰주세요.”
아이릴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네? 도착하려면 10분은 더 남았는데.”
“여기서 내릴게요. 천천히 오세요.”
“아니, 잠깐만…!”
아이릴이 주먹을 들었다. 그 몸짓에 박아연이 화들짝 놀라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 부수지 마세요!”
“저 그런 몰상식한 사람 아니에요.”
“근데 주먹은 왜….”
“창문만 부수려 했어요.”
퍽 당당한 투였다. 박아연은 입매를 비틀면서도 불평하진 않았다. 그녀는 아직 아이릴이 무서웠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아이릴은 차 문을 활짝 열고 높게 도약했다. 그녀는 찬바람을 맞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한 방향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사법(邪法)의 증거였다.
‘지구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지만….’
아이릴은 여전히 교회의 성녀였다.
아브나바의 사도이자 이단 심문관의 필두였다.
그런 그녀가 가증스러운 흑마법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선우 부탁이니까.’
잡놈을 몇 치워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그 보상으로 무언가를 받겠지만. 아이릴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음흉하게 키득거렸다.
그녀는 공중을 밟으며 악취의 근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이내 협회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근처에선 반백이 넘는 시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죽은 자들을 보는 아이릴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리브라 루 페로 페스토.”
아이릴이 짤막한 영창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몸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빛은 갑주가 되었고, 거대한 망치가 되었다.
쿠웅!
무장한 아이릴이 협회의 부지에 떨어졌다. 그녀가 떨어진 장소에 큼직한 구덩이가 파였다.
요란한 소리와 살아 있는 인간의 냄새. 죽은 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이보다 좋은 건 없었다.
“흐르르….”
아니나 다를까 시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목이 덜렁거리는 이도 있었고, 팔다리가 없는 이도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에도 아이릴은 태연했다.
퍼억!
망치가 달려오던 시체의 머리를 터뜨렸다. 이어서 세 망자가 육편이 되었다. 그다음 아이릴은 망치를 바닥에 꽂고 눈을 감았다.
“브루쉬 르 비엘라 아스트레아.”
입을 달싹거리자 샛노란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밤을 몰아내는 신성한 구체가 하늘에 떠올랐다.
시체들의 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새하얀 불이 살점을 녹여내며 뼈마저도 가루로 만들었다.
“끄으으으!”
“흐어어….”
망자의 절규가 부지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구체가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모든 망자가 재로 돌아갔다.
이게 유선우가 아이릴을 협회로 보낸 이유였다. 언데드와의 전투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페셜리스트. 수십의 리치와 싸우더라도 밀리지 않는 게 그녀였다.
재빨리 정리한 아이릴이 등을 돌렸다. 시선은 협회와 이어지는 대로에 닿았다.
‘어쩔까.’
길가에 돌아다니는 망자 또한 있을 터. 아니, 실제로 냄새가 나고 있다.
다행히도 멀리 간 놈은 없어 보였다. 소란을 듣고 출동한 이들이 막아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선택지는 둘. 직접 하나하나 찾아 처리하거나, 술사를 죽이거나.
아이릴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 전자를 택하기엔 그녀는 눈에 띌수록 곤란한 몸이었다. 무엇보다 귀찮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협회 건물을 쳐다봤다. 그리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어 냄새를 맡았다.
‘이 안에 있어.’
썩은 내와 짙은 혈향이 진동을 했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내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릴은 로비에 발을 들이밀었다.
부웅!
다 깨진 유리문을 넘자마자 단검이 날아왔다. 그녀는 굳이 피하지도 않았다. 단검은 갑주에 막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릴이 눈알을 굴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일곱 명. 모두가 피칠갑을 한 채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여자,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뭐 예쁘면 다 본 거 같대. 미친 새끼.”
“아니, 이번엔 진짜로.”
“시끄럽다. 먼저 제압부터 하지.”
그들은 경계하면서 아이릴에게 다가갔다. 한편으로 아이릴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죽여도 되겠지?’
신앙에 걸리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믿는 종교에 살인하지 말라는 교리 따위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상대는 누가 봐도 악인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선우가 뭐라 하는 거 아닐까.’
문제는 유선우였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목격자만 없으면 돼.’
결론을 내린 아이릴이 입술을 달싹였다. 달려오던 이들의 발밑에서 빛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칼날은 쉽사리 적들의 심장과 머리를 꿰었다.
“커억!”
해봤자 평균 B급 헌터 정도인 피라미들. 아이릴이 고전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릴은 피를 흩뿌리며 불쾌한 냄새를 찾아 올라갔다. 냄새의 근원은 점차 내려오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었다.
“당신이군요.”
“……뉘십니까?”
나타난 건 똥 씹은 표정을 지은 김광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