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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84화 (84/179)

제 84화

조금 나쁜 새해

“선우 씨,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혹시 세정 씨랑 싸웠어요?”

박아연은 조수석에 앉은 유선우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요 며칠간 낌새가 묘했기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싸운 건 아니고요. 제가 몹쓸 짓 좀 했죠.”

“몹쓸 짓이요?”

“너무 물어보시네. 별로 재밌는 일도 아니에요.”

“…미안해요.”

그녀는 묻고도 내심 자괴감이 들었다. 격려해주진 못할망정 기회라 여기고 있으니. 지금도 그런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혹시 걔가 상담이라도 부탁하면 잘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혹시라도 저 감싸주지는 말고요.”

“알았어요.”

박아연은 복잡한 마음을 감추고 수긍했다. 그녀는 머리를 굴려 다른 화제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선우 씨도 이제 정식으로 S급 달겠네요.”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죠. 이제 올해도 다 끝나가는데. 분기마다 일괄적으로 발표하거든요. 사실 그거 때문에라도 검사는 받아야 했을 거예요.”

유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삼스레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했지만, 공식적인 등급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기 마련.

지위는 곧 명분이 된다. 쓸데없이 발목을 잡힐 일이 대폭으로 줄어들게 되리라.

“그건 어떻게 됐어요? 교육생 시험 본다던 거.”

“아직 결과는 안 나왔어요. 근데 한강 씨는 아마 늦어도 1개월 안에 조기 수료할 거 같네요.”

“1개월이라.”

길지는 않지만, 짧지도 않은 기간이다.

그동안의 목표는 가능한 한 헌터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 팀을 짜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하는 건 그다음이 될 것이다.

물론, 예정대로 흘러간다는 가정하에서.

***

“여기요.”

유선우는 하품을 내뱉으며 박아연에게 결과지를 내밀었다.

“보기는 했어요?”

“아니요. 읽어줘요.”

결과지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항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랬기에 유선우로선 까막눈 뜨고 훑어보기가 귀찮았다. 본인 일인데도 태평한 모습에 박아연이 피식거렸다.

“잠깐만요. 음….”

박아연은 손가락으로 종이를 훑기 시작했다. 이내 한 곳에서 멈춘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Mana value : 8213]

“미친.”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이었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842였던 수치.

그게 10배가량 상승해 있었다.

“어떤데요?”

“8, 8213이네요.”

박아연은 대답하면서도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앞자리를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일의 자리조차도 달라지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 그게 어느 정도예요?”

“…B급이면 오백에서 천오백쯤이고, A급이면 대개 천오백에서 삼천 선이죠. 예외는 있지만.”

“오. 높은 거네요 그럼.”

유선우는 흡족해하면서도 놀라지는 않았다. 여타 각성자들과는 달리 관리자에게 직접 받은 힘이니까. 남들보다 특출할 수밖에 없었다.

태연한 유선우와는 반대로, 박아연은 어이가 없었다.

“…진짜 말도 안 되네.”

질투나 자괴감 등의 부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질투도 사람을 봐가면서 하기 마련. 이젠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배가 아플 이유는 없었다.

“S급이랑 비교하면 어떤데요? 아무래도 비공개이려나.”

“승급할 때는 전부 공개돼요. 갱신하는 건 본인 자유긴 한데, 자신 있는 몇몇은 1년에 한 번씩은 해요.”

“홍보 같은 거네요.”

“네. 올해 초에 소피아 씨가 만오천 조금 넘는 정도였어요.”

유선우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잘 와닿지는 않긴 했지만, 남들과는 단위부터가 다른 모양이었다.

“A급이랑 그렇게 차이가 나요?”

“보기에만 한 등급 차이지, 그냥 천외천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등급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도 자주 나와요.”

“만들면 뭘 만들어요? A+나 AA 이러나.”

저렴한 어감에 박아연이 싱겁게 웃었다.

“글쎄요. 하여튼 S급들은 최소 1만은 되더라고요. 소피아 씨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편이고.”

“하긴. 거의 마법사던데.”

유선우는 가볍게 수긍했다. 확실히 소피아는 능력 면에서는 특출하다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근접전에서는 모자랐지만.

“그럼 제 결과 공개되면 태클 거는 사람 좀 있겠는데요. 남들보다 부족한 거 아니냐고.”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선우 씨가 소피아 씨 꺾은 게 도움이 되겠죠.”

“아, 그것도 그렇겠구나.”

“애초에 마나 수치만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것도 멍청한 짓이고요. 그리고 선우 씨는….”

박아연은 새삼스레 경외 어린 눈으로 유선우를 쳐다봤다. 각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정도라니. 이게 공개된다면 다시 한번 세상이 뒤집힐 터였다.

그녀는 오히려 제 가슴이 더 설렜다. 유선우의 행보에 대중이 놀랄 상상을 하니 짜릿하기까지 했다.

‘내년이 기대되네.’

내년의 1월은 지금보다도 떠들썩해지리라.

다행히도 좋은 일로 인해서.

안일하게도, 박아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경.

헌터 협회의 정문 앞에서 김현중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떻게 연말을 일하면서 보내냐.”

김현중은 협회의 야간 경비를 맡은 헌터였다. 불평하는 한편으로는 이게 자신의 천직임을 모르진 않았다.

밤눈은 올빼미만큼 뛰어나고, 후각은 개만큼 민감하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그에겐 손전등조차 필요치 않았다.

“뭐 어쩌겠어요. 저 사람들보단 낫잖아요.”

다른 경비원인 윤민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협회의 건물이 있었는데, 불이 전부 켜져 있었다. 야간 근무조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런데… 내일 마누라 보기가 무섭다.”

“저도요. 남자친구가 징징대더라고요.”

“결혼할 거면 다른 일 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피식거린 김현중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잠깐 갔다 온다.”

“왜요? 그냥 여기서 피우시지.”

“됐어. 남들 일하는데 무슨 민폐야.”

“그럼 오빠 갔다 오면 저도…….”

윤민영이 말을 흐렸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한 방향을 주시했다. 분위기가 달라지자 김현중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뭐해?”

“저거 뭐예요?”

“응?”

윤민영이 어딘가로 손가락을 뻗었다. 김현중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어?”

눈에 들어온 것은 마흔이 넘는 사람의 무리. 그들은 협회를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반은 맨손이었고, 또 반은 각기 다른 무기를 든 상태였다.

달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빛나는 칼날. 그걸 본 두 경비의 낯이 급속도로 굳었다.

“오, 오빠. 지원 불러요. 빨리!”

“기다려봐. 저 새끼들 설마….”

눈이 밝은 김현중은 몇몇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전국에서 보도되는 지명수배 범죄자. 불법 각성자 조직, 초한의 간부들이었다.

“미, 민영아, 건물 안으로…!”

김현중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날아온 칼날이 그의 머리에 꽂혔다.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 분수가 윤민영의 옷을 적셨다.

“꺄아아아악!”

난데없는 참극에 윤민영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낸 소리가 되었다.

단숨에 접근한 한 남자가 윤민영의 목을 베어냈다. 머리가 툭, 하고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안타까운 눈초리로 잘린 머리를 바라봤다.

“아까워라. 반반하게 생겼는데.”

남자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후드티를 입은 사내, 김광수가 다가와 히죽거렸다.

“필요하면 머리 붙여드리죠. 맘대로 쓰십쇼.”

“오, 그래 주시면 고맙죠. 이대로 들어갑니까?”

김광수는 대답에 앞서 위를 쳐다봤다. 비명을 들었는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들이 몇 있었다.

이내 한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김광수는 그녀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하하. 더럽게 못생겼네.”

“누구요?”

“아닙니다. 슬슬 시작합시다.”

그리 말한 김광수가 2구의 시체를 바라봤다. 그가 손을 휘적거리자 두 시체가 저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신기하네. 무슨 원리예요?”

“원리 알고 능력 쓰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것도 그러네. 그럼 먼저 갑니다.”

칼을 든 남자가 협회의 유리문을 깨며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서른의 인파가 그 뒤를 따랐고, 김광수는 느긋하게 걸어갔다.

밤이 깊은 탓에 로비에는 인적이 몇 없었다. 휴식을 나온 서넛이 있을 뿐. 그마저도 금세 피를 뿜으며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김광수는 시체를 일으키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몇 번의 조작을 거친 후에 신호음이 울렸다.

전화는 금방 연결됐지만, 상대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은 김광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쪽은 시작했습니다.”

- …….

“협회장님?”

대답을 재촉하자 깊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딱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쪽도 시작하지.

“예. 그럼 잘 부탁….”

김광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그는 대기화면으로 돌아간 스마트폰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싸가지 없으니 남들이 다 싫어하지.”

김광수는 혀까지 쯧쯧 차며 시각을 확인했다. 폰의 시계는 정확히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2019년 1월 1일.

조금 나쁜 한 해의 시작이었다.

***

같은 시각, 유선우는 송년회에 와 있었다.

술집은 어느 테이블이나 웃음기가 가득했다.

손님 모두가 청일의 직원이었다. 회사 차원에서 오늘 하루 전세를 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선우도 답답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빠, 우리 짠 해요!”

유선우의 옆에 앉은 한강이 맥주잔을 들고 외쳤다. 테이블에는 둘을 제외하고도 네 남녀가 합석해 있었다.

박아연과 유선혜, 강창민과 최현석이었다. 이성결은 최근에 생긴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고, 차세정은 비각성자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넌 딱 그거만 마셔.”

“싫은데요. 더 마실 건데요. 그냥 꽐라 될 거야.”

“그럼 두고 간다.”

칼 같이 말한 유선우가 잔을 내밀었다. 뒤따라 다른 이들도 팔을 뻗어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곧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술로 목구멍을 적셨다.

마시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뿐. 의외로 박아연이었다.

“박아연 씨. 어디 아파요?”

유선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술고래가 빼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박아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올해는 술 끊을 거예요.”

“아, 네.”

“진짜거든요. 못 믿겠나 보죠?”

“누가 뭐래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박아연이 유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실실거리고 있는 게, 믿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내기해도 좋아요. 저번처럼.”

“이야. 자신감 보소. 기간은 어쩔까요?”

“당연히 1년이죠.”

“그래도 되겠어요? 줄여도 괜찮은데.”

그러자 박아연이 흠칫거렸다. 그녀가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6개월로…….”

“한 3개월까지 쳐도 괜찮은데. 안 그러냐?”

유선우가 강창민에게 화제를 던졌다. 대답한 것은 강창민이 아닌 유선혜였다.

“나도 껴. 언니, 저는 한 달에 걸게요.”

“한 달은 참지. 내가 알코올 중독도 아닌데.”

“어, 아니에요?”

“……아니지 않을까?”

오가는 대화는 공처럼 통통 튀어 막힘이 없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엔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리고 차세정은 술집의 한구석에서 그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원망이 가득했다.

‘나쁜 새끼…….’

차세정은 유선우와 박아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눈에 띄게 친밀한 모습이었다.

특히 박아연은 유선우에게 곱게 눈웃음을 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 차세정은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양다리의 상대가 박아연이라는 오해를.

‘짜증 나.’

모든 게 짜증이 났다.

속 편히 웃고 있는 유선우도 싫었고, 남의 남자를 탐내는 박아연도 싫었다. 그래서 술만 벌컥벌컥 마실 따름이었다.

“세정 씨, 너무 마시는 거 아니에요? 바람이라도 쐬러….”

“아직 괜찮아요. 그리고 죄송한데 성 붙여서 불러주세요, 민진섭 씨.”

걱정하는 척하는 남자 동기도 마음에 안 들었다. 불쾌함이 커질수록 잔을 비우는 빈도가 잦아졌다.

그렇게 차세정은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입안이 알싸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선우가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언니, 저 소맥 좀 말아줘요.”

“소맥 하면 저죠. 잔 줘봐요.”

“네? 아, 네.”

강창민이 유선혜의 잔을 받아 소맥을 말기 시작했다. 사심 넘치는 그는 심혈을 기울였지만, 정작 유선혜는 시큰둥했다.

그때, 느닷없이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 전화 온 거 같은데.”

“내 건가 보다.”

최현석의 말에 유선우가 대답했다. 벗어둔 코트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니 김정수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뭐야. 대표님이네.”

“오빠. 대표님이랑 전화도 해요?”

“저번에도 몇 번 봤잖아. 내가 전화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대표님일걸.”

“세정 언니는… 웁!”

박아연이 잽싸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녀가 한강의 입에 닭튀김을 밀어 넣었다.

“한강 씨, 눈치 좀 제발.”

“우움. 저 별말 안 했는데.”

유선우는 멋쩍게 볼을 긁적이면서 전화를 받았다. 한강을 제외하곤 전부 김정수와 면식이 있으니 나가서 받을 이유는 없었다.

“여보세요.”

- 유선, 후욱, 유선우 씨.

유선우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그와는 다르게 김정수의 어조는 다급했다.

- 지금, 지금 당장 서울로 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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